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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다수성 그리고 얽힘의 트랜스페미니즘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 교수 방한 특별 인터뷰 ①
에큐메니안 | 승인 2017.11.03 02:04

지난 달 한국을 방문, 감신대, 연서대 등에서 강연을 진행한 미국 드루대학교의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의 사상을 한국 교계와 신학계에 좀더 심층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특별 인터뷰를 진행했다. 10월29일(일) 오후 3시30분부터 왕십리에 위치한 ‘꽃재교회’(감리교, 담임목사 김성복 목사)에서 진행되었다.

본 인터뷰는 최근 높아지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과 또한 교계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린 성소수자 문제 등을 놓고 현재 미국 신학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여성 감리교 신학자인 캐서린 켈러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신학적 그리고 목회적 대안들을 모색해 보기 위한 자리였다.

페미니즘에 관한 오해와 진실

특히 페미니즘과 여성 신학에 대한 이론적 대안들을 충실히 모색해 보자는 취지였다. 80-90년대 우리에게 모더니즘의 이상들도 충분히 현실화되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이 유입되어, 지적 그리고 실천적 혼란을 야기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그러한 혼돈과 실패가 현재의 페미니즘 논의 속에서 반복되지 않거나 혹은 실수를 최소화하자는 취지이다.

▲ 사진 왼쪽부 지날 달 한국을 찾아 트랜스페미니즘을 여러 대학에서 강연한 캐서린 캘러 교수, 최순양 박사, 그리고 전현식 교수 ⓒ에큐메니안

최근 일고 있는 소위 페미니즘 열풍은 뒤늦게나마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지다. 하지만 그 출발이 매우 늦었던 탓에, 서구사회에서 진행되었던 페미니즘 논쟁들의 문제점들을 현시대에 반복하고 있는 측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별히 남/녀의 생물학적 이분법에 근거하여 여성해방과 권리를 주장하던 ‘제2물결’(the Second-Wave) 시대의 루이스 이라가라이의 주장들이 ‘포스트페미니즘’을 주창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담론과 구별 없이 뒤섞여, 담론으로 유통되고 있는 측면들이 있다.

90년대 후반 페미니즘 담론이 ‘여성’이라는 이름을 ‘백인여성’을 위한 담론으로 독점하고 있는 모습이 흑인여성들이나 다른 인종의 여성들로부터 비판받고 있는 상황에서, 버틀러는 ‘성’(sex)과 ‘젠더’(gender)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뒤집었다.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이해(gender)는 기본적으로 생물학적 성(sex)에 기반하여 구성된다는 통념을 뒤집어, 젠더가 성에 기반하여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성이 젠더를 통해서 구성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니 생물학적으로 선천적인 것으로 이해된 성에 대한 모든 이해는 이미 젠더 즉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투사되어 재구성된 것에 다름 아닌 것이 되었다.

이를 통해 버틀러는 ‘성’(sex)을 남/녀의 이분법으로 설정하고, 양성 간의 갈등과 해방을 모색하는 페미니즘이 성적 소수자들에게 매우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기제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제2 물결 시대의 성차의 페미니즘이 인종적으로 백인이 아닌 모든 여성들에게 전혀 해방의 담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동시에 노출한 것이다. 이후 미국에서 페미니즘 연구는 ‘성차’(sexual difference)가 아니라 ‘젠더’에 입각하여 진행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90년대 이후 즉 버틀러 이후 페미니즘의 동향을 ‘포스트페미니즘’이라 부른다. 켈러가 여러 강연에서 지적했듯이, 이 포스트페미니즘 담론은 여러 다양한 소수자들을 ‘페미니즘’의 우산 아래 결집하는 공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의 과제가 이미 완료되었다라는 의미에서 ‘포스트-’ 즉 ‘탈-페미니즘’의 담론으로 들리는 단점도 동시에 내재한다. 사실 대한민국 사회의 현재 페미니즘 담론은 초기 페미니즘 담론과 버틀러 시대의 포스트-페미니즘 담론이 뒤섞여 있는 상태이다.

켈러 교수의 트랜스페미니즘이란

트랜스페미니즘(transfeminism)은 이미 유행하고 있는 용어라기보다는 기존의 페미니즘과 포스트페미니즘 담론들 사이에 야기되고 있는 내적 긴장과 갈등을 넘어서기 위한 대안적 전략 모색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차별받고 억압받는 ‘여성’을 해방의 주체로 세우려는 페미니즘의 정신을 다시금 강조함과 동시에, ‘여성’(women)들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소수자들을 함께 품고 나아가야 한다는 포스트페미니즘의 강조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포스트페미니즘은 그러한 연대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마치 페미니즘의 문제들이 이미 극복되었거나 해소된듯한 태도를 취하였다. 캐서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가 『변화하는 차이: 여성성과 철학의 물음』(Changing Difference: The Feminine and the Question of Philosophy)에서 지적했듯이, 포스트페미니즘의 시대에도 가정폭력으로 억압을 받는 사람의 대다수는 여전히 ‘여성’(women)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성의 문제가 ‘여성성’(the feminine)이라는 연대의 이름 하에서 희석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트랜스페미니즘은 다양한 소수자들과 주변화된 사람들과의 연대를 도모하면서도, 여전히 여성억압의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다. 현재 트랜스페미니즘은 바로 페미니즘과 포스트페미니즘의 관계에 대한 문제인식이며, 이에 대한 대안적 사유를 도모하는 중이다.

트랜스페미니즘, 관계성을 중심에 둔 사상

인터뷰는 최순양 박사(이화여대)가 켈러 교수의 트랜스페미니즘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최 박사는 켈러 교수가 주창하는 트랜스페미니즘은 우선 전대의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들 자체 안에서 동의를 얻지 못했던 문제를 지적한 ‘포스트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대안적 착상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제2의 물결이라 일컬어지는 초기 페미니즘 운동은 이리가라이의 경우처럼 여/남의 성차(sexual difference)에 근거하여, 여성의 해방과 권리획득에 초점을 두었지만, 이 페미니즘 운동에서 말하는 ‘여성’은 모든 여성을 포괄하는 개념이 되지 못했음을 이미 흑인여성들의 ‘우머니스트 운동,’ 스피박의 ‘탈식민주의,’ 그리고 버틀러의 ‘젠더 연구’ 등이 지적한 바 있다.

특별히 스피박은 페미니즘 운동이 제시하는 여성의 이미지 속에 제3세계 여성들이 포함되지 못하며, 페미니즘 운동이 지향하는 해방이 결코 이 비백인, 제3세계 여성들의 해방을 의미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 운동을 주창하였다. 켈러 교수의 트랜스페미니즘은 바로 이러한 포스트페미니즘 운동이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초기 페미니즘은 여/남을 구별하고, 분리하여, 억압당한 여성들의 해방을 주장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생각했지만, 문제의 해결 혹은 대안에 이르는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그래서 켈러는 ‘관계성’ 개념을 좀 더 발전시켜—현대 물리학의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의 사고실험으로부터 유래하는 개념-‘얽힘’ 혹은 중첩성(entanglement)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우머니스트 운동가들이 지적하듯, 관계는 단지 여/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빠로서 어머니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다양하게 “얽혀지기”(entangled)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여성해방은 단지 여/남 이분법에 근거해서 모색될 것이 아니라, 삶이 일구어가는 관계의 복잡성과 중층성 그리고 모호성 등을 성찰하면서 차근차근 해방의 과제가 수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수성과 얽힘

더 나아가 켈러 교수는 존재를 실체나 관계로 특정하는 이전의 신학들과 달리 ‘신비’로 조망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모든 것을 명백히 자명하게 기술하거나 진술하거나 알 수 있다는 입장을 거절한다. 따라서 ‘여성’에 대해서 그리고 ‘남성’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입장에 근거해 ‘정형화’(stereotyping)하려는 모든 시도를 우상화라고 조망한다. 그래서 켈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 즉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다는 신학적 개념을 ‘관계적 육화’(intercarnation)로 제안한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특정 육체성을 구현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들)과의 관계로 진입하셔서 관계를 이루시고 완성하신다는 말로 이해한다.

어떤 존재든 그 존재는 ‘단순한 존재’(simpleton)이 아니라, 다수성(multiplicity)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한 두 마디의 말로 규정하거나 정의할 수 없다. 이는 관계를 구성하는 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다수성의 측면은 왜 우리가 그 누구를 규정하거나 이해할 때, 단순하게 정형화하면 안 되는지를 설명한다. 즉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이 그 사람의 존재 전체가 아닌 것이다.

즉 다수성은 모든 존재가 단순하고 명확한 관계로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얽혀있음”(entanglement)을 말하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신비’(mystery)의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저 사람 혹은 존재는 내가 알고 있는 모습 그 이상의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과 관계를 품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모든 권력은 이 다수성의 존재 즉 복잡하고 다양하고 중층적인 존재를 획일화하여, 그 획일적으로 정형화된 존재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다루려는 힘을 발휘하고자 한다. 바로 이 힘은 켈러에 따르면 언제나 ‘예외적인 힘’인데, 말하자면 자신의 권력을 모든 표준화된 질서의 바깥에 예외적으로 정초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방은 자신의 존재와 힘을 다른 존재들로부터 예외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부장제는 그 질서에 속한 모든 존재에게 너는 그 예외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부추기면서, 그 예외적 존재가 되기위한 무한한 경쟁을 부추긴다. 그 무한한 경쟁 속에서 우리는 서로와 연대하기 보다는 서로를 짓밟고 넘어서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따라서 해방은 바로 이 예외적 존재가 되기 위한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극복함으로서 가능할 것이며, 이 해방은 이 무한경쟁의 구조 속에서 패자로 규정되거나 낙인찍은 소수자들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 질것이라는 점을 켈러는 ‘얽힘’(entanglement)라는 말을 통해 함의한다.

최 박사의 이러한 켈러 교수 사상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 이어 인터뷰에 참석한 참여자들의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갔다. 켈러 교수와 참여자들의 대화는 다음 시간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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