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생활 칼럼
상사화처럼 피고 싶다[탐라, 사랑허염쪄]
임정훈 | 승인 2017.11.04 01:14

나는 지금 제주도 애월읍에 살고 있다.

ⓒ임정훈

2년 동안 동티모르에서 푹 잠겨 지내다가 지난 7월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한국은 끝도 보이지 않는 장마철이었다. 긴 터널 속을 지나는 것처럼 지루한 장마가 어서 끝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뜻밖에 제주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를 강의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아싸~
제주였다.

야고보가 전도여행을 떠났다는 남프랑스에서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길을 따라 걸으면서 예순 이후의 삶을 그리고자 했던 여정을 바꾸어도 좋을 제주였다. 그래, 순례자의 길을 걷는 마음으로 제주도를 걷는 거다.

제주에서 학생들 앞에 서는 것만큼 이나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길을 걷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언제냐고 묻는 다면 나는 주저 없이 숲길을 걸을 때라고 준비 된 답을 말 할 것이다.

제주에 와서 먼저 나선 길은 절물자연휴양림이다. 하늘을 향해 우직하게 쭉쭉 뻗어있는 삼나무 길이 걷고 싶었다. 그래서 나선 절물 자연 휴양림 삼나무 숲에서 뜻밖에 상사화를 보았다. 

ⓒ임정훈

상사화가 삼나무 밑에 무리를 지어 피어있었다. 우리가 살면서 예상치 못한 날 보너스처럼 기쁨 가득한 날이 찾아오듯이, 삼나무 숲길에  펼쳐져있는 상사화를 대하는 내 마음이 그랬다.

수년 전
'화엽불상견 상사화(花葉不相見 相思花)'라는 말에 연민을 느끼며 선운사로 상사화를 보러 간 적이 있다. 그녀가 선운사에 잠시 머물었을 때 보았다던 상사화를 보러 가자고 하였을 때 흔쾌히 응했던 것은 상사화라는 꽃 이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월 하늘이 맑고 곱던 날, 
그녀와 유쾌하게 떠난 선운사에서 보았던 꽃이 사실은 상사화가 아니고 꽃무릇 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선운사를 다녀 온지 한참 후였다. 
꽃무릇은 10월에 피는 꽃으로 꽃이 지고 난 후 잎이 나며, 상사화는 7,8월에 피는 꽃으로 잎이 지고 난 후 꽃이 핀다는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그 후로 나는 꽃무릇이 아닌  상사화를 제대로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제주 절물 휴양림에서 상사화를 본 기쁨은 참으로 컸다. 세상에 꽃 들이 이른 봄부터 제각기 앞 다투어 만개하던 봄날을 보내고, 한여름 더위에 모두 풀 죽어 있을 때에 큰 나무 아래  상사화가 슬며시 피어 있었다.

상사화는 서로를 그리워 하지만 만나지 못하고 숨바꼭질 같은 사랑을 말하는 꽃이라지만 그날 내가 보았던 상사화는 경쟁적으로 피었다 지는 꽃 속에서 한발 늦게 피어 더위를 견뎌내며 당차게 피어있는 속 깊고 영리한 꽃이었다. 상사화 잎은 오로지 꽃을 세워주기 위해 시기를 알고 내려 올 줄  알며, 꽃이 덧보이도록 거름으로 남아주고, 꽃은 잎의 마음을 담고 심오한 모습으로 피어나니 상사화의 꽃과 잎의 서로에 대한 배려가 참으로 곱다는 생각을 했다

상사화처럼 나도 그렇게 배려하고 배려 받으며 살고 싶다.

이순이라는 나이가 나를 위축시키지만 앞으로 걷게 될 길이 한발 늦춰 피는 상사화처럼 나도 꽃을 피우며 살고 싶다. ‘나 여기 있소’ 나서지 않으면서도 큰 나무 밑에 조용히 피어나 은은한 향기로 다가오는 상사화처럼 나도 향기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임정훈  authorl@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관련기사 icon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