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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 사건은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된다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 교수 방한 특별 인터뷰 ②
에큐메니안 | 승인 2017.11.05 23:15

최순양 박사가 트랜스페미니즘을 설명하는 내용들은 참석한 기자들을 위해 한국어로 진행되었는데, 켈러 교수가 (영어 통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최 박사가 무엇이라 이야기했든 전부 동의한다고 말해서 참석한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박일준: 켈러 교수님, 당신의 신학을 간략하게 한 두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켈러 교수: 신학은 사랑의 철저한 신비에 대한 명상입니다. 사랑의 철저한 신비는 세 가지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방향성은 개인주의에 반하여 관계성으로 나아갑니다. 이 관계성은 신비의 측면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방향성은 ‘힘’ 혹은 ‘권력’입니다. 이는 때로 ‘권력을 향한 사랑’으로 도착되기도 하는데, 불행히도 우리 미국이 현재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힘이라는 방향성은 신학적으로 ‘사랑의 힘’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을 이런 점에서 매우 명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권력’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성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방향성은 앎 혹은 지식(knowledge)입니다. 오늘 ‘신비’를 말하고 있는데요, 이 신비는 바로 우리의 앎의 한계를 가리킵니다. 사랑은 우리의 지식의 한계에 노출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인데요, 우리의 앎은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켈러 교수의 자신의 신학에 대한 간략한 요약에 이어,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먼저 특별 인터뷰 장소를 제공한 꽃재교회 김성복 목사가 목회적 관점에서 질문을 이어갔다.

▲ 사진 가운데가 캐서린 캘러 교수, 오른쪽 최순양 박사, 그리고 전현식 교수 ⓒ에큐메니안

인간 욕망의 투사가 진리로 탈바꿈할 때 우상숭배가 된다 

김성복(꽃재교회): 목회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때로 신학이 인간학이라는 말에 공감을 하게 되는데요.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참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것들의 투사로 나타날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21세기 우리 세계가 구현한 가장 소중한 가치들 중 하나는 개인적으로 ‘관용’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소중한 가치가 우리 내면의 적나라한 민낯을 드러내는 경우를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일, 이민자들에게 관대하던 프랑스가 적대적인 나라로 돌아선 일 등은 결국 인간이 자기 먹고 사는 일에 위협을 느낄 때, 무척 이기적인 모습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는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향린교회에서 전하신 설교 중에 ‘미국이 병들었다’는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교수님은 설교에서 촛불시위가 희망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이것이 혹시 우리의 상처와 실패의 투사가 아닐런지라는 생각을 한편으로 갖고도 있습니다. 좌절된 희망이 대리적으로 표출되는 사건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인간 내면의 이기심을 전제로 할 때, 켈러 교수님이 말하는 ‘연대’(solidarity)가 가능할 것인지 의아합니다.
그래서 켈러 교수님이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 묻고 싶습니다. 특별히 인간은 자신의 이기심을 통제하기 위해 자기 집단의 도덕을 세우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언제나 타자들을 악마화하는 현상들을 목격하게 될 때, 인간과 더불어 희망을 세워가는 일이 가능할런지요?

켈러 교수: 우리 인간의 모든 언설과 행위들은 물론 투사(projection)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제한된 언어로 표현된 것을 진리 혹은 사실로 확정할 때, 이것은 투사가 아니라 우상숭배(idolatry)가 됩니다. 이렇게 우상화된 언어가 하나님을 표현하기 보다는 언어의 한계에 한정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의 책 『불가능성의 구름』(Cloud of the Impossible, 2015)은 부정신학의 전통을 탐구했는데요, 부정신학의 전통은 매우 오래된 전통으로서, 교부 닛사의 그레고리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신학적 전통은 목사님이 말씀하신 인간의 투사를 심도있게 다루어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의 신비한 측면 즉 언어를 넘어선 측면을 다룬 전통을 인간의 모습을 대할 때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니까요. 인간의 모습에도 우리의 정형화된 언어를 뛰어넘는 측면이 담지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형화된 인간의 이미지, 즉 남자, 여자, 한국인, 미국인 등의 스테로오타입화된 이미지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우리의 얽매임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잘못된 얽매임은 우리 안에 담지된 하나님의 형상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관계성은 무한한 사랑의 신비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점에서 저는 트럼프 대통령조차도 그런 정형화된 틀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고결한 가르침,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 인간됨 즉 인간성의 신비에 근거할 때 가능합니다. 즉 그 원수같은 사람에게도 나의 생각 혹은 내가 갖고 있는 그의 이미지를 뛰어넘는 신비한 측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매우 교묘합니다(tricky). 특별히 그 원수가 나에게 인간됨을 보여주지 않을 때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트럼프 대통령이 갖고 있는 문제입니다.

김성복(꽃재교회): 그렇습니다. 그것이 제가 질문드린 내용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와 부족함을 타인에게 투사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에게도 투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습이 심지어 이기적이고 질투스런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켈러 교수: 맞습니다. 성서의 질투하는 하나님, 복수하시는 하나님, 통제하시고 권력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분명 인간의 부족함이 투사된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투사는 특별히 미국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모든 인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절망스런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 각자를 창조적이 되도록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유하고 그래서 다른 존재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면에서 이기적이 되지 않는다면, 각자 고유한 차이를 담지한 존재가 되기 무척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투사는 인간에게 지속적인 유혹입니다. 아이가 자라나면서, 엄마나 아빠로부터 떨어져서 자신을 실현하고자 할 때처럼 혹은 억압받는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할 때처럼, 이기적이 된다는 것 혹은 ‘자기됨’(self-ish)이 된다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래서 떨쳐낼 수 없는 유혹이 됩니다.

서구 근대는 지난 500년 동안 이 ‘이기적’인 본능에 기반하여 인간 존재를 ‘개인’으로 간주하면서, 개인주의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 분리된 개인이라는 개념이 경제의 자본주의와 연결되어, 개인의 생존과 경쟁과 승자독식을 조장하는 문화가 이어져 왔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근대 개인주의가 실현된 정점을 상징합니다. 물론 트럼프라는 개인이 이 자본주의 시대를 홀로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모순되게도 이 범지구적 자본주의 경쟁의 희생자들이 가장 자본친화적인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했기 때문에 그는 선거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 자본주의적 구조 속에서 이기심이 체계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실현된 모습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입니다.
그래서 저는 종말(apocalypse)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성서의 종말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바빌론의 창녀’에 주목하면서 말입니다. 이 성차별적인 이미지가 가리키는 것은 바로 당시 로마시대에 구현되고 있었던 세계 경제의 탐욕입니다. 당대의 모든 지역경제를 집어 삼키면서, 성장하는 거대 경제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은유입니다. 예측이나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닙니다. 성서의 이 ‘바빌론의 창녀’라는 은유는 2천년 후 지금의 시대를 예고하면서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지구경제의 위기, 직업 상실의 위기 등은 민족주의 혹은 국수주의의 문제를 야기합니다. 이 지구적 위기의 과정에서 백인우월주의가 다시 등장하는 모습을 미국과 유럽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적인 반대운동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1946년 한나 아렌트는 이런 현상을 예고한 듯이, ‘이민자들에 대한 반대운동은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이다’라고 적은바 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백인우월주의에 다름 아닙니다. 저와 친구인 윌리엄 코넬리(William Connelly)가 바로 얼마 전 책을 출판했는데요, 제목이 『야심만만한 파시즘』(Aspirational Facism: The Struggle for Multifaceted Democracy under Trumpism)인데요, 우리 시대 파시스트 혹은 국수주의자들 혹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야망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목사님이 지적하셨듯이, 우리가 다루어야 할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꼼꼼히 성실하게 준비해 주신 목사님의 질문에 중요한 한 가지를 더 답변해 드리자면, 목사님이 촛불시위와 희망 그리고 투사를 언급해 주셨는데, 이점에서 저는 희망을 낙관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적 희망은 예언자적 전통으로부터 도래합니다. 세계의 그 어떤 문화적 종교적 전통도 기독교만큼 희망에 높은 가치를 두지 않았습니다. 이사야와 욥기 그리고 예레미야를 통해 나오는 기독교적 희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깊은 절망과 상처로부터 나오는 희망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나오는 희망입니다. 기대했던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자신들을 구원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오는 절망과 분노 속에서 기독교적 희망은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를 들어, 한 해방신학자는 『희망없음을 품고 살아가기』(Embracing the Hopelessness)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희망이 그저 아편이 될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서는 바로 이 희망없는 절망을 품은 채 희망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애가는 극단적으로 절망적이고 분노스런 상황에서 희망을 말합니다. 즉 성서에서 말하는 희망은 절망에 무척 가까이 놓여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간다의 신학자 카통골레는 저항으로서 탄식을 말하면서, 아프리카를 향한 희망을 말합니다. 콩고, 우간다, 그리고 르완다가 위치한 동아프리카의 상황은 무척이나 절망적입니다. 그 상황은 탄식과 절망과 비탄이 가득 차 있을 텐데, 그는 그 절망의 한복판에서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켈러 교수는 ‘희망’(hope)을 한국어로 무엇인지 물으셨고, ‘희망’이라고 가르쳐드렸다.

교회와 사회라는 실재 속에서 계속되는 성육신

박지은(이화여대): 트랜스페미니즘의 정의가 상당히 폭넓은데, 이것이 어떻게 한국에 적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켈러 교수: 박사님 질문이 저에게 ‘희망’을 주는데요, 미국에서 활동하는 저의 작업과 한국에서 활동하시는 여성신학자들과의 연대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저는 이미 한국계 미국 여성신학자들과의 연대가 있습니다. 저의 신학은 사랑의 신비 혹은 관계성으로 언제나 출발하기 때문에 이는 서구의 분리된 개인의 에고와 이기주의를 거부합니다. 아울러 페미니즘의 이 개인주의적 에고의 모방도 거절합니다.
하지만 여성적 관계성이 담지한 ‘비자아’의 위험성 즉 자기 자신의 존재감 상실의 위험성도 또한 거절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3의 길을 추구하는 셈인데, 분리된 자아도 아니고, 해체된 자아도 아닌 제3의 길 말입니다. 이는 곧 “연결하는 자아”(connecting self)의 길입니다. 이는 페미니즘이 말하는 여성이냐 남성이냐의 이분법적 이해로부터 거리를 둡니다. 즉 ‘얽혀진 형태’의 자아를 저는 주장합니다.
이 연결성이라는 개념이 저를 과정신학자로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저를 또한 생태신학자로 만들어주고 있기도 합니다. 연결성은 단지 인간들 사이의 관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 더 나아가 지구행성과의 연결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제 신학적 감각으로 보기에, 이 관계성 개념이 한국 여성신학과 공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한국여성신학은 백인남성의 에고를 모방하는 것도 아니고, 백인여성중심의 페미니즘을 모방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 생각에, 한국여성신학은 강건한 관계성(strength of relationality) 개념에 기반해 있습니다. 관계는 쉽지 않습니다.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한국여성신학은 그 관계의 부담을 짊어지는 강건함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즉 정(情)을 담지한 관계성입니다. 

전현식(연세대): 연대에서 하셨던 강연 내용과 연관하여, 특별히 한국 정치의 무력함을 경험하면서, 켈러 교수님이 희망을 말할 수 있는 방식에 관하여 말씀을 해주셨는데, 제목이 “지금의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 of now)이었습니다. 거기서 고린도서의 바울이 말하는 “카이로스적 시작(kairotic inception)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셨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다시 한번 여쭙고 싶습니다. 

켈러 교수: 제가 금년 12월까지 집필을 마치려고 하는 책의 제목이 『지구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 of Earth)인데요, 교수님 말씀하신대로 카이로스는 그냥 평범한 여느 순간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순간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카이로스의 순간을 “예외”(exception)의 순간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시작”(inception)으로 보고자 합니다. 저는 모든 순간이 카이로스적 잠재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교회에서도 이 잠재성을 느꼈습니다. 향린교회에서 아름다운 예배를 마치고 미국 대사관 앞으로 가서 전쟁반대 시위에 함께 하면서, 저는 바로 그런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모든 순간이 메시야로 나아가는 문이다’고 했는데요,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능케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도래하시는 메시야’를 매순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카이로스의 순간을 칼 슈미트처럼 ‘예외’의 시간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파시즘으로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미국적 예외주의의 정치는 바로 이런 도착된 이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심지어 국제법으로부터의 예외된 존재로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 미국적 예외주의는 ‘나쁜 신학’(bad theology)에 근거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는 전능성의 개념에 근거한 신학 말입니다. 

전현식: 저의 질문은 바울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카이로스적 순간이 어떻게 도래할 수 있느냐입니다. 그 순간은 분명 바울의 내부로부터 도래한 것이 아닙니다. 즉 이 절망으로 가득 찬 일상의 시간들을 희망의 순간으로 바꾸어가는 근원적 동력이 무엇이냐를 저는 묻고 싶습니다. 

켈러 교수: 저는 단지 기독교적 예외주의가 카이로스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고 주장할 따름입니다. 교수님이 질문하신 근원적 동력은 제가 보기에 교회입니다. 교회는 실재(real)입니다. 오늘 미국 대사관 앞에서 전쟁반대 시위를 했던 교회, 그 교회가 실재입니다. 제가 출석하는 맨하탄의 교회는 교회 바깥에 아주 큰 무지개 걸개를 걸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 저희 교회는 매주 하나님의 나라를 주일날 실현하고 있습니다. 

박일준: 켈러 교수가 incarnation이 아니라 ‘intercarnation’을 제안한 것은 바로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 성육신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카이로스적 순간으로 변혁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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