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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 관리인의 고민농심과 해학으로 듣는 예수의 민담 8
김재현 | 승인 2017.11.11 00:43

지금까지 예수의 민담을 들을 때, 다소 주인(지주)에 초점을 맞추어서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예수 이야기에서 또 다른 문제적 인물인 관리인(청지기)이라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야기에서는 달란트 비유를 제외하면 관리인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부터 살펴볼 이야기에서는 관리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흔히 ‘청지기’로 불리는 이 존재는 사실상 집사, 마름에 다름 아니다. 이들은 예수 민담의 청중인 농민들의 눈에 곱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였으며, 어떤 경우에는 주인 보다 더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관리인을 다루는 민담을 살펴보자. 눅16:1-8이다.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현대 비유 해석의 선구자인 율리허(A. Jülicher)를 비롯해 많은 주석가들이 이 이야기가 매우 어려우며, 난해함에 있어서는 왕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며 해석에 있어서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사실 충분히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불의한 관리인의 사기를 칭찬하는 이야기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4세기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는 이 비유를 근거로 예수의 제자들이 사기꾼이며 도둑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각주 1)

하지만 농심으로 예수의 이야기를 읽게 되면 그렇게 난해하고 당황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도 농민들의 눈으로 보면 관리인 중에는 그런 인간들이 많았을 터이니 크게 당황스럽게나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예수의 청중들인 농민들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 관리인, 빚진 자들이 어떻게 느껴졌을까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 얀 루이켄(1649~1712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칭, 영국, 궁수들의 성경 삽화)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은 역시 지주이다. 그는 이야기에서 “부자”로 묘사된다. “부자”라는 말에서 예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들(창고를 건설하고 자기 죽을지 모르는 부자,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의 지옥에 간 부자, 이 때 탕자의 아버지도 고려되어야 한다)의 이미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는 또한 채권자로 묘사된다. 고대의 이율을 고려할 때 채권자는 일종의 고리대금업자이다. 뵈젠(W. Bösen)은 이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주인이 얼마나 엄청난 부자인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각주 2)

“기름 백말, 이것은 오늘날의 도량 단위로 3,650 리터이며 한 올리브나무 당 평균 25리터의 기름이 나오며, 대략 146그루의 올리브 나무를 전제한다. 나무 한 그루가 한 가족 전체를 먹여살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수가 비로소 얼마나 많은 가를 이해하게 된다. 밀 백섬도 마찬가지로 3,650리터 또는 550파운드이며 42 헥타르의 경작지 소출에 해당된다. 높게 계산하지 않고도 이미 엄청난 소유가 전제되어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예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관리인은 재정 담당자인데, 그가 하는 주된 일은 돈을 빌려주고 채무증서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 관리인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민규는 이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각주 3)

1세기 팔레스타인과 같이 매우 부패하고 비리가 일상적이었던 사회에서 지주의 편에서 소작농들을 착취하던 청기지직은 개끗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청기지는 사회적인 성격상 주인에게 아첨과 아부하기를 좋아하고 소작인들에게 매우 잔인해야만 하는 직업이었다.

채무자들은 기름 100말과 밀 100석을 빚졌다. 갈릴리 경제는 채무의 사슬로 이어져 있었다. 이는 당대의 부채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채무의 규모로 볼 때 주인에게 빚진 자들은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다.(각주 4)

당대의 경제사정을 보면 가난한 자들만 빚을 진 것이 아니라 돈이 많은 사람들도 빚을 졌었다. 빚의 규모 뿐 아니라 관리인과 채무자들이 모두 읽고 쓸 수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각주 5) 이들은 아마도 주인에게 땅을 빌린 사람들이었거나 채무증서를 쏘고 곡물을 받은 도매상인들이었을 것이다.(각주 6)

이야기는 관리인의 위기로부터 출발한다. 주인은 관리인이 돈을 낭비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해고한다. 주인이 관리인을 해고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그의 명예에 손상을 입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리인이 해고당한다는 사실은 그가 단순한 노예가 아니라 지주의 가신임을 말해 준다.(각주 7) 관리인에 대한 소문은 거짓과 중상모략일 수 있다(본문의 소문에 사용된 διαβλήθη[고소당했다]는 그러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각주 8) 이러한 중상모략과 해고는 관리인 노릇이 쉽지만은 않았음을 보여준다.

위로 주인의 압박이 있었고 아래로 소작인들의 불만이 있었으며, 다른 동료 관리인과 주인의 총애를 놓고 경쟁해야 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 든 아니든 그는 이제 인생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관리인은 이미 해고를 통고받은 상황에서 깊은 고민을 한다. 우리는 관리인의 독백을 들을 수 있다. 예수의 이야기에서 독백은 흔히 웃긴 내용이 많다.

관리인은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라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는데, 이는 그가 농부도 거지도 될 수 없음을 뜻한다. 관리인의 말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다.”는 말은 그가 농부가 될 수도, 그리고 “걸인”이 될 수도 없다는 말이다.

아마도 이 독백은 농민들에게는 아주 우습게 들렸을 것이다. 아마 폭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예수 민담을 귀기울여 듣는 사람들은 관리인이 결코 할 수 없다고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이었을 것이다. 깊은 고뇌의 끝에 관리인은 꾀를 낸다. 그가 생각해 낸 꾀는 채무증서를 위조하는 것이었다. 김재성은 관리인의 대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각주 9)

불의한 청지기가 해고 통보를 받은 후에 속으로 하는 말(3-4절)은 그의 속물근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평생 노동일을 해본 적도 없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본 적도 없이 살아온 전형적인 엘리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궁래해낸 것은 이제 바닥까지 내려가서 노동일을 해서라도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어떤 참회가 갱생이 아니었다. 평생 머리 쓰는 일과 남을 부리는 일만을 해온 그가 최후의 순간에 선택한 일 또한 머리를 쓰고 남을 이용하는 것이다.

관리인은 머리를 써 사악한 꾀를 통해 그 위기를 극복한다. 그것은 지주의 명예욕과 채무자들의 처지, 당시의 명예와 수치에 대한 문화적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한 천재적 계략이었다.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불의한 청지기의 명예회복에 대한 여러 시도들은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고 선언한다.(각주 10) 나는 주인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시도들도 틀린 것으로 본다. 예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채권자, 채무자, 관리인 모두 악당이다. 이것이 당대 엘리트들과 그들을 섬기는 가신의 실상이었다.

나는 예수가 이 이야기를 통해 속고 속이는 주인과 관리인의 관계를 풍자하면서 그들을 비웃고 있다고 해석하려 한다. 그들이 하는 짓거리들은 한마디로 가관이다! 이 이야기는 주인과 관리인을 냉소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각주 1) K. E. Bailey,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고대 중동의 삶, 역사, 문화를 통해 본 복음서』, 박규태 역(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516.
(각주 2) W. Böse, 『예수시대의 갈릴래아: 예수의 생활공간과 활동영역으로서의 갈릴래아에 대한 시대사적·신학적 연구』(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8), 320.
(각주 3) 이민규, “불의한 청기기의 비유(눅16:1-8b)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신약논단』 8권 3/4호 합본 (2001): 48.
(각주 4) 오덕호, 『하나님이냐 돈이냐: 누가복음 16장의 문학 역사비평적 연구』(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8), 172-173.
(각주 5) B. B. Scott,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세상 다시 그리기』, 김기석 역 (고양: 한국기독교연구소, 2006), 146.
(각주 6) J. Jeremias, 『예수의 비유』, 허혁 역(왜관: 분도출판사, 2011), 175. 
(각주 7) W. R. Herzog Ⅱ, Paralbe as Subversive Speech: Jesus as Pedagogue of the Oppressed (Louisville, Kentuck: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4), 241.  
(각주 8) J. Nolland, 『누가복음 9:21-18:34』, 김경진 역 (서울: 솔로몬, 2004), 636.
(각주 9) 김재성,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와 이웃과의 의사소통,” 『신학연구』 69 (2016): 69. 
(각주 10) J. Jeremias, 『예수의 비유』, 허혁 역(왜관: 분도출판사, 2011), 176.

김재현  verticalk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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