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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의 정도<마더!>, 요청하오니 저들을 멸하소서 ③
최병학 기자 | 승인 2017.11.13 00:34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 Derrida)의 『환대에 대하여』는 1980년 소위 세계화의 바람과 함께 세계 경제에 불어닥친 신자유주의와 국가 경계가 허물어진 초국가적 자본의 이동으로 인해 발생한 이주민과 난민, 이방인과 타자에 관한 유용한 지침서가 된다. 그리고 영화 <마더!>를 통해 타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데리다는 ‘무조건적인 환대’를 주장하며 나름대로 타자에 관한 우리들의 행동을 제안한다.

사실 책에서도 언급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끊임없는 물음이 되기 위해, 즉 불편한 존재가 되기 위해 이방인을 자처한다. 그리고 이방인은 ‘우리(혹은 주체)’와 다른 것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들은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이방인은 우리의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고, 토박이 집단에 혼돈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방인, 혹은 타자는 동일성 철학의 구조 안에서 극복되어야 하는 이질성으로 이해된다. 동일성을 파괴하는 오염이며 불편하고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 세 나그네를 환대하는 아브라함과 사라 ⓒ러시아 정교회 이콘

이러한 이방인에 관한 환대에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칸트로 대표되는 ‘조건적 환대(초대의 환대, 선별적 환대)’인데, 칸트는 적대시 당하지 않을 권리, 보호를 요청할 권리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전제 위에서 이야기 한다. 가령 주권자는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환대의 권리를 수용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대는 데리다가 보기에는 조건적 환대, 법에 의거한 환대, 곧 관용이라고 할 수 있다.

관용은 데리다에 의하면 권력자의 양보와 자비, 은혜 베풀기에 기댈 수밖에 없는 한, 그것은 ‘힘이 곧 정의’라고 하는 ‘최강자의 논리’편에 서있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데리다는 강자의 자비가 이방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의 원리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이방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의 원리’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여기서 관용을 극복할 윤리적 이념으로 데리다는 ‘환대’(hospitality)라는 용어를 제안한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는 조건적 환대를 넘어 ‘무조건적인 환대(방문의 환대)’를 진정한 환대로 생각한다. 조건 없이 방문자에게 문을 여는 것이며 두려움을 동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손님으로서 주인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더는 손님들에 대해 혐오를 가지기도 하여 위협에 맞서기 위해 그들을 불태워 버린다. 그러나 데리다에 의하면 나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내 구역을, 나의 장소를 내어 놓아야 하는 이런 일이 생길 때, 관용이 환대로 기능하기 위해서 무조건적인 환대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Him)는 그 환대를 이룬다. 아들이 죽기까지 환대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데리다의 환대는 레비나스(E. Levinas)의 타자의 윤리에서 그 출발점을 찾아볼 수 있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관점에서 내가 가질 수 없는 타자의 절대성에 대한 나의 순종적 태도를 이야기한다. 나의 자유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절대성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현실성이 부족하고 피학적인 주체를 말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방인과 타자, 이주민에 대한 탁월한 이해가 된다. 따라서 칸트(I. Kant)의 조건적 환대인 관용을 넘어서는 데리다의 무조건적 환대(방문의 환대)는 지극히 성서적이며(각주 1)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과 만나고, 더 나아가 바디우(A. Badiou) 진리의 윤리학(진리에 대한 충실성)과도 만난다. 데리다가 싫어할 이항대립으로 관용과 환대를 영화의 두 주인공 마더와 그(신)로 구분해보자.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에는 니체가 있다. 니체의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베푸는 덕에 대하여(증여의 덕)’에서 “아낌없이 주는 태양처럼 주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르셀 모스(M. Mauss)의 증여론도 무언가를 상대방에게 증여할 때는 그것이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라도 무가치한 것처럼 넘겨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의 “먼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도 동일한 맥락이다.

“나는 친구가 친구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낯선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내 마당의 나무 열매를 맘껏 따 갔으면 좋겠다.” “제발 그대의 먼 이웃을 사랑하라. 그대가 진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 그대 옆의 사람을 마구잡이로 사랑하면 민족주의가 된다.” “(옆에 있는 존재만을) 가엽게 여기는 연민, 동정, 박애, 적선 따위의 짓 좀 하지 말라.”

니체는 이러한 말로 상투적인 사랑의 관념을 망치로 부숴버린다.(각주 2) 영화에서 마더는 반니체적인 너무나 비환대적인 모성과 가족애에만 가득 찬 존재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마더인 대지가 살 길이고, 생태환경은 이처럼 인간(이방인, 타자들)의 욕망과 대척 지점에 놓여있다. 인간의 본성 때문에!

그러나 아낌없이 주는 것은 환상이다. 따라서 환대는 환상이다. “환대는 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데리다의 고민은 이를 잘 표현한다. 현실적인 환대가 아닌 이념의 환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무한한 윤리성’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데리다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그의 철학이 해체는 하나, 재구성은 독자의 몫으로 맡겨놓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철학이 종교(십자가 희생)로 넘어가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센 것 때문일까? 그래서 데리다는 환대의 문제를 결국 ‘물음’에 관한 문제로 던져버린다. 지금의 ‘나’와 ‘우리’에게, ‘너’와 ‘그들’에게 끊임없이 ‘물음을 던져보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물음은 용서의 한계를 제시할 때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는 불태워 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각주 1) 종교적인 환대는 이렇다. 이방인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굶주림이라는 단 한 가지 사실로 그들을 환대해야 한다. 가령 누가복음 10:25-37(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와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태복음 5:43~46)”,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9:33~34).”를 참조하라.
(각주 2) 그러나 니체는 ‘거지한테는 절대 베풀지 말라’고 한다. 왜? 주는 것은 친구들끼리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주는 것은 뇌물이다. 친구가 아니면 선물을 주기 힘들다. 게다가 거지는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어, 타자에게 뭔가를 얻어내려고 한다. 따라서 거지와는 절대 될 수 없다. 거지는 자신이 얻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자기를 학대하기 때문이다. 

최병학 기자  hak99@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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