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축복인가 저주인가?(창세기 9:20-27)성경이 전하는 저주, 하나님의 부재
이성훈 | 승인 2017.11.21 00:39
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홍수 이후의 노아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에, 그들은 동산 밖에서 많은 자녀를 낳았고, 이 땅 위에 사람은 점점 늘어갔습니다. 사람이 늘어감에 따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도 함께 퍼져나갔으면 좋았겠지만, 그보다는 죄악이 더욱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시고 이 땅에 홍수를 일으키셔서 창조세계를 다시 처음의 상태로 되돌리십니다.

홍수 때에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이 노아와 그의 직계 가족이었습니다. 노아의 가족은 홍수를 피할 수 있었고, 홍수가 지나간 땅에 정착하여 다시금 이 땅을 일구었습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 얼마만큼의 양식을 채워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홍수 이후 노아의 가족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했던 일은 식량을 구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홍수로 인해 땅에 있던 모든 생물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농사를 시작합니다.

노아가 경작하기 시작한 작물은 포도나무였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포도주로 성찬식을 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술에 대한 거부감이 심하기 때문에,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거기에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먼저 지적하곤 합니다. 때때로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 속에서 노아의 선택이 죄의 시작이었다는 해석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근동 지방에서 포도주는 물을 대체할 수 있는 귀한 음료였습니다. 또한 성경은 포도주에 대해서 그다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때로 술에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에는 과음이나 혼합주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해본다면, 맥주로 반주는 괜찮지만, 소맥은 안 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미켈란젤로, <노아의 만취> ⓒ구글이미지

다시 노아의 농사 이야기로 돌아와서, 노아가 방주 안에 포도나무 묘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서 노아는 포도나무에서 자란 포도를 가지고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앞서서 성경은 포도주에 관대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역시나 술이 문제인지,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벌거벗은 채로 잠에 빠집니다.

함의 잘못?

여기에서부터 뭔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노아는 자신의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잠들었습니다. 술 취한 점이 문제라고 말하기에는 노아에게 딱히 큰 잘못은 없어 보입니다. 노아가 한 일이라곤 포도주를 마셔서 몸에 열이 나는데다, 나른해지니까 옷을 벗고 잠에 빠진 것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문제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사건은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벌거벗고 자는 모습을 둘째 아들인 함이 보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벗은 몸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고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도 오래전부터 함이 노아의 하체를 본 일이 잘못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 없이, ‘함이 잘못했구나.’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에서 생각했을 때, 아들이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는 일이 과연 잘못일까요?

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다녔고, 지금은 제 아들과 함께 목욕을 합니다. 아버지의 하체를 보는 일이 잘못이라면 부자지간에 함께 목욕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함이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목사님들이나 학자들은 열심히 해석을 했습니다. 어떤 학자는 함이 단순하게 노아의 하체를 본 것이 아니라, 노아를 성적으로 범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저 ‘라아’, ‘보았다’라고 되어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많은 설교들을 통해서 우리가 들어왔던 이야기는 함이 나가서 형제들에게 이야기한 점이 잘못이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형제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노아는 여전히 벌거벗은 채로 잠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함이 형제들에게 이야기했기에 노아는 더 이상의 추태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함이 노아의 하체를 본 일이 왜 잘못된 일일까요? 그 대답은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행한 일은 자신들의 알몸을 가리는 일이었습니다.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게 된 후, 자신들이 벗고 있는 점이나, 서로의 알몸을 보는 일은 악이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벗었음을 깨달았다는 점을 통해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벗은 몸을 드러내는 일이나, 벗은 몸을 보는 일은 악, 또는 나쁜 일이라는 점입니다.

▲ 샤를 나투아르, <아담과 하와를 꾸짖다> ⓒ구글이미지

그렇기에 셈과 야벳의 행동도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서 뒤돌아 선 채로 아버지에게 옷을 덮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얼굴을 돌이켜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악의 반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선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미 아버지의 벗은 몸, 하체를 본 함은 악을 행하였고, 그것은 함의 죄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저주

술에서 깬 노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됩니다. 함이 자신의 하체를 본 일과 나머지 두 아들이 자신의 하체를 보지 않고 옷을 덮어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노아는 엄청나게 화를 냅니다. 너무 화가 나서 자신의 아들을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노아가 얼마나 화가 나 있었는지, 둘째 아들을 향해 이런 선포를 합니다.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냥 ‘종이 되라’도 아니고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반대로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합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실 셈과 야벳에 대한 축복은 축복이라기보다 함에 대한 저주의 연장선이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주 받는 사람의 이름이 ‘함’이 아니라 함의 아들인 ‘가나안’이라는 점입니다. 그것도 함의 장자도 아닌 넷째 아들인 가나안입니다. 게다가 아들을 향한 이런 저주 역시도 우리의 정서에서는 이해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성경이 가진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나간다고 했을 때, 아주 초반부인 창세기 9장에서 이 저주의 선포를 읽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 가지의 생각을 품게 됩니다. ‘가나안은 저주 받았다.’ 그 인식을 가지고 이후의 이야기들을 읽어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지고 있는 의도입니다. 단순한 개인으로의 함과 가나안이 아니라 우리가 뒤이어 읽어나가면서 만나게 되는 민족으로의 가나안을 의미합니다.

즉 노아의 저주는 함과 가나안 개인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함의 자손이 이루게 될 민족, 특히 가나안의 민족들을 향한 저주였습니다. 그 저주의 연장선에서 가나안은 셈과 야벳을 섬겨야 한다는, 그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확정을 노아가 만들어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들의 자손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런 성경의 의도가 있었기에 이 사건 뒤, 창세기 10장에서는 세 아들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저주받은 민족이 어느 민족인지를 머릿속에 심어 두고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야벳의 족보이고 그 다음은 ‘가장 천한 종’이 되어야 할 함의 족보이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조상인 셈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0장에서 ‘가장 천한 종’ 함의 족보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함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는데, 개역개정 성경에는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으로 되어 있습니다. 새번역과 공동번역개정판은 이 중 두 아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으로 번역해줍니다. ‘미스라임’은 ‘이집트’이고 ‘붓’은 ‘리비아’입니다.

‘붓’의 경우에는 그 자손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지만, 나머지 세 형제의 자손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구스’의 자손은 이름보다는 그들이 정착한 지역을 보시면 어떤 민족인지 바로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들의 정착지는 바벨과 앗수르입니다. ‘미스라임’은 이집트 자체이기 때문에 더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그 자손 중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다고 말합니다. ‘가나안’의 자손들은 우리가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를 통해 끊임없이 보게 될 이름들이기에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이 족보가 재미있는 이유는, 함의 자손들은 훗날 이스라엘 주변에 거대 제국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가장 천한 종’이 되었어야 할 함의 자손들은 오히려 거대 제국을 이루어냅니다. 반면에 축복을 받았던 셈은 우리가 잘 아는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고, 야벳의 자손들은 멀리 멀리 서아시아와 유럽 지역까지 가서야 정착하게 됩니다.

노아의 축복과 저주를 실제의 역사와 연결시켜서 생각해본다면 축복을 받은 자손들은 그저 그런 민족을 이루었고, 저주를 받은 함의 자손들은 역사 속에서 이름을 날린 제국들, 거대 제국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축복과 저주가 뒤바뀐 듯 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훗날 이스라엘은 이집트 포로기를 거쳤고,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합니다.

혹시나 이 내용에 따른 지도를 보시고 싶어서 인터넷이나 성서지도를 찾아보신다면, 그 지도의 내용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성서지도는 대게 서양에서 나온 지도들을 기반으로 번역만 해놓았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전통적으로 해왔던 이야기가 너무 심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셈은 근동의 조상, 야벳은 서아시아의 조상, 함은 아프리카의 조상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부렸던 정당성을 성경에서 찾았고, 지도에도 그 의도가 여실하게 반영된 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성서지도를 찾아보시려면 지도의 지명과 성경에 나타난 이름들을 직접 대조해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 축복인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노아의 축복과 저주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바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적 팩트를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역사를 회상하면서 그 역사를 통하여 현재 그들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책이 성경입니다.

창세기가 어느 시대에 기록되었는가를 여기에서 논할 이유는 없겠지만, 학자들은 창세기가 바벨론 포로기에 완성되었다고 말합니다. 보수 교회가 이야기하듯이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했다고 해도, 사건이 발생한 순간의 기록이 아닌, 후대의 기록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 기록되었는가의 문제는 분명 축복과 저주의 의미를 변화시킬 수도 있겠지만, 오늘의 본문에서 나타난 축복과 저주는 어느 시대에 기록되었건 분명히 동일한 한 가지의 고백을 드러냅니다. 아무리 거대한 제국을 이룬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며, 자신들은 비록 초라하고 처량한 신세일지언정 하나님의 복을 받은 존재라는 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못사는 사람들의 변명처럼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드는 궁색한 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고백이 초라하지 않은 이유는, 그러한 강대국들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거대 제국을 이룬 나라들처럼 살아간다면, 자신들도 제국을 이룰 수 있을지 모릅니다. 선과 악 중에서 악을 선택하고 살아간다면, 자신들도 잘 살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고백은 결코 그 길로 나아가지 않겠다는 당시 사람들의 고백이 처절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악함 위에 제국을 세우느니, 때로는 힘들지 몰라도, 선함 속에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돈을 바라보며 사는 신앙은 맘모니즘이라고 배워왔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맘몬을 숭배하는 풍조라고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께 물질의 풍요를 간구합니다. 부를 쌓아서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준으로 놓고 보았을 때, 목회자는 부를 바라는 성도님을 향해서 노아가 함에게 했던 데로 저주를 해야 옳습니다. 저주를 받았던 함의 자손들이 셈이나 야벳의 자손들보다 더 잘나가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누군가 부를 바란다면 당연히 저주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들으시고 정말로 저주를 바라는 성도님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전하는 저주의 결과는 하나님의 부재입니다. 저주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곳에 세상적인 부와 권력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곳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비록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 쓰신다고 선포하였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의 심판을 위해서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 뿐이지, 하나님께서 바벨론과 함께 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렵지만, 선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요나에서 볼 수 있듯이, 앗수르의 니느웨는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였고, 그랬기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얻게 되는 것은 부와 권력이 아닌 평안, 샬롬입니다.

축복인가 저주인가?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부와 권력이 모든 것인 세상입니다. 마음의 평안보다 세상에서의 즐거움, 부와 권력이 더 필요하시다면 그 길로 나아가셔도 좋습니다. 다만 그 길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으시다면, 악을 멀리하고 선한 길에 서시기 바랍니다. 함과 같이 부지중에라도 악한 일을 행하지 마시고, 삶의 어떤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복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얻게 되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충정로 2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 생명의집 204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2-313-0179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Copyright © 2017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