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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러너 2019, 2049> 포스트휴먼을 향한 리플리컨트적 전회[최병학 목사의 인문학으로 영화 읽기]
최병학 기자 | 승인 2017.11.22 00:58

# 행운

<블레이드러너2049>(이하 속편)에서 한글 ‘행운’은 발견했지만, ‘독수리’는 찾지 못했다. 있었던가? <블레이드러너2019>(이하 전편)에서 한글 ‘수수께끼 사이’도 찾지 못해 ‘블레이드 러너 신도’는 못되지만, 블레이드러너가 제공하는 형이상학, 곧 몸과 마음의 관계, 시간과 공간의 본성, 기계와 인간의 투쟁, 인간 정체성의 확립과 혼란 등 사이버펑크 사상 가장 오락적이며 최고의 형이상학 담론을 갖춘 영화이기에 신도는 아니더라도, 다가올 시대의 고민을 이미지로, 상상력으로 추동시키는 힘은 신도의 길을 가게끔 만든다. ‘행운’을 발견한 것은 그 길에 행운이 깃든다는 암시일는지?

1. “오, 빛이여, 이제 나로 하여금 너를 보지 못하게 하라”

영상과 사유의 행복한 만남을 선사한 전편에 대해 이정우 교수는 이렇게 칭송한다.

“<블레이드 러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는 형이상학적 주제와 미학적 영상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후의 많은 영화들이 이 영화의 벽을 넘어서려고 했지만 아직까지 이 영화의 빼어남을 능가하는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주인과 노예의 투쟁, 테크놀러지의 역운, 기억의 기묘함, 인간의 뼈저린 고독, 혼란스러운 정체성, 죽음의 미소, 무를 받아들이기, 인간과 기계의 본질, 고통을 가져다주는 진실, 어둡고 힘겨운 삶 속에서 섬광처럼 빛나는 사랑 등등의 깊이 있는 주제들, 그리고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인상 깊은 이미지들로 채워진 빼어난 영상이 사이버펑크의 걸작을 만들어낸 것이다(이정우, 44).”

전편에 관한 무수한 담론들이 오늘날 속편을 만든 것 아닐까? 전편은 앤디 워홀이 열어놓은 현실과 시뮬라크르의 착종문제를 중심에 놓을 수 있고(기억 이식의 관점에서), 금기와 거세공포를 둘러싼 외디푸스적 인간 이해도 엿볼 수 있다(이택광, 이진경). 가령 아버지 타이렐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아버지의 눈알을 뺌으로 프로이트의 부친살해와 비슷하게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부정하는 로이가 바로 그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자임이 분명해졌을 때,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르며 이렇게 말한다. “오, 빛이여, 이제 나로 하여금 너를 보지 못하게 하라.” 근본적인 질서를 이탈한 자기의 범죄를, 자신의 표상의 통로를 말살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징벌하는 것이다.

▲ 영화 <블레이드 러너> 포스터

그러나 로이(룻거 하우어 분)는 아버지의 눈을 찌르고 눈알을 뺌으로 아버지를 죽인다. “안티-오이디푸스(들뢰즈/가타리)!” 사실 타이렐사 사장(조 투르켈 분)에게 수명을 연장할 수 없으니, “주어진 삶을 살라.”고 명령했었다. 곧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로이는 주어진 운명은 ‘이미 죽은 가치’로 여기고, 이에 복종하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저 니체의 니힐리즘의 극단에서 끌어 올린다.

또한 전편은 하이데거의 눈으로 불안과 죽음 앞에 선 존재의 이해와 인간(das Man)에서 실존(Existenz)으로의 존재 전환과정을 찾아볼 수도 있다(조광제). 물론 로이의 이야기이나, 데커드(해리슨 포드 분)에게도 해당이 된다. 양적 관점으로는 無(무), 혹은 空(공)에 직면하기라 할 수 있겠다.

재미있는 것은 라틴어 ‘res’라는 말인데, 영어로는 ‘thing’, 한국어로는 ‘있는 (것)’으로, 혹은 ‘존재’, ‘실재’라는 철학적인 개념으로 번역되나, 불어에서는 res가 ‘realité(현실)’와 ‘rien(무)’의 공통 어원이라는 사실이다. 바디우의 존재론에서 ‘공백(void)’ 혹은 ‘순수다수(pure multiple)’가 존재규명의 원리로 되는 것, 나아가 “존재는 일자도 다수도 아닌 공백에 있다.”는 말은 수학적 지평과 더불어, 프랑스 언어의 지평에서도 무의 지평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성환 교수는 ‘사람+기계’의 지평에서 마샬 맥루한을 따라 “기계를 즐기고 사랑하라, 그리고 그 기계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다”는 세련된 과학기술결정론으로 결론을 도출한다(트랜스 휴먼의 지평이라 할 수 있겠다). 

러브스토리로도 읽어낼 수 있다. 로이를 만난 암살자 데커드는 로이가 자신을 구해준 사건을 통해 보편적 사랑을 깨닫고, 레이첼을 제거하지 않고 언제 총탄으로 바뀔지 모를 추적과 감시의 시선을 뒤로하고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다. 사랑의 탈주라는 것이다(황용연 목사). 그리고 이 탈주 이후 태어난 아이와 그 아이를 지키려는 레플리컨트들의 이야기가 속편 <블레이드러너2049>이다. 

2. 예술미와 자연미: 2019를 미학적으로 읽는 방법

필자는 전편을 자연미에 대한 예술미의 우위, 그리고 그것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로 영화를 풀어낸 적이 있다. 따라서 전작의 도입부에 나오는 설명을 패러디하며 이렇게 말했다.

“19세기 초 헤겔은 예술품이라고 알려진 자연미와 거의 동일한 수준의 예술미를 개발한다. 예술미에 이르러서는 예술품들은 그들의 모방의 대상인 자연물보다 그 화려함과 섬세함, 웅장함과 간결함 등 모든 것이 자연미보다 우월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들 예술작품은 마침내 대량생산을 통해서 자연물들을 시장에서 몰아내려 했으나 자연미 그 자체로 인정되는 것은 금지되었고, 발견되면 가짜로 판명되었다. 대량생산된 이 예술품을 판정하는 일을 맡은 감정인은 이를 가리켜 ‘니, 사이비네!’라고 하였다(최병학, 214).”

영화의 도입부는 이렇다.

“21세기 초 타이렐 주식회사는 레플리컨트라고 알려진 인간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NEXUS를 개발한다. NEXUS-6에 이르러서는 복제인간은 그들을 만들어낸 인간보다 힘과 민첩함에는 더 뛰어나면서 지적인 면에서는 적어도 동등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들 레플리컨트가 외계식민지에서 피비린내 나는 반란을 일으킨 뒤, 지구에 들어오는 것은 금지되었고, 발견되면 사살되었다. 레플리컨트를 사살하는 임무를 맡은 블레이드 러너는 이를 가리켜 은퇴시킨다고 하였다.”

헤겔(G.W.F. Hegel)은 그의 미학에서 정신과 관계되는 부분이 적은 저급의 미인 ‘자연미’와 구분하여 정신과 관계되는 부분이 많은 ‘예술미’를 고급의 미라고 한다. 따라서 헤겔은 “예술미는 정신에서 다시 태어난 미”이며 정신에서 태어난 이러한 예술미는 “정신과 정신의 산물이 자연과 자연의 현상들보다 우월”(헤겔, 28)하다는 것이다. 절대 정신(이념)의 철학자 헤겔은 인간정신이 절대 이념을 인식하는 세 영역을 분석하는데, 먼저 예술은 절대이념을 감각으로 직관하고, 종교는 절대이념을 내면으로 표상하며, 철학은 절대이념을 개념으로 사유한다고 본다. 따라서 예술의 목적은 인간의 정신에 관해 진리를 알려주는 것이며 정신의 자유를 감각으로 표현하는 아름다운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에 기반하여 역사에서 나타난 예술의 형식들을 헤겔은 상징예술, 고전예술, 낭만예술로 나누어 설명한다. 상징예술은 질량의 면에서 형식이 정신보다 큰(형식〉정신), 가령 건축과 같은 경우이고, 고전예술은 형식과 정신이 대등한 질량을 가지는(형식=정신) 조각 같은 예술을 뜻한다. 낭만예술에 이르면, 형식은 정신보다 그 질량이 적어지게 되는데(형식〈정신), 이는 회화나 음악, 시와 같은 예술로 대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헤겔에 따르면 자연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의 형식들보다 더 나은 것들을 창조할 수 있는 단계로 가야하는 것이다. 

전편에서 레이첼(숀 영 분)의 피아노 연주는 예술미의 예술미이다. 그러나 기억된 것을 반복하는 것으로, 정신(이념)의 구현이라기 보다 형식에 기초한 상징예술의 성격을 띤다. 예술의 고양으로써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예술품을 만들기 위한 타이렐사의 노력은 예술미의 극치이자, 인간 정신과 이념의 외화이지만 여기서 형식은 정신과 하나가 된다. 고전예술의 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애인 프리스를 죽인 데커드를 살려준 로이의 모습은 형식과 물질성을 뛰어 넘은 이념의 구현인 낭만예술의 단계를 보여준다. 나아가 정신이 형식을 이끌어 주는 단계로까지 확장된다. 데커드를 살려주고 죽어가는 로이는 절대이념을 감각으로 직관하고, 내면으로 표상하며 개념으로 사유한 것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따라서 영화는 자연미에 대한 예술미의 철저한 우위를 보여준다. 가령 영화가 시작되면 거대한 건물들이 어두운 하늘 아래로 펼쳐진다. 이러한 도시의 건축물은 자연을 짓밟고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미를 추구하여 세웠던 건물들이었다. 태양이 비추이는 장면이 단 한 장면에 불과하듯 예술미는 철저히 자연미를 억압하고(미학적 측면에서 조금 과한 표현일 수도 있다) 세워지나, 그 끝은 암흑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욕심인가, 자본주의의 탐욕인가? “오, 빛이여, 이제 너로 하여금 나를 보지 못하게 하라.” 외디푸스의 절망적 외침이 변주된다. 붕괴된 자연미! 그러나 예술미는 자본에 포획되어 미학은 어둠과 침울함만을 영상이미지로 갖는다. 역시나, 헤겔도 “낭만예술이 해체되면 예술은 붕괴된다.”라고 말했다(“Zerfallen der Kunst”). 비록 그 의미는 약간 차이가 있을 지라도.

3. 레플리컨트와 민중, 사건과 주체

영화 <블레이드러너> 전편과 속편에 나오는 레플리컨트는 인조인간이다. 좀 더 정확히는 ‘유기적 안드로이드’이다. 사실 인형(人形)에서 시작된 인간의 자기 모방의 역사는 인류 자체의 역사와 동일한데, 오늘날 인간은 다양한 자기 모방 메커니즘을 창출했다. 로봇, 사이보그(개조인간을 뜻한다. 인간을 개조한 것으로 6백만불의 사나이를 예로 들 수 있다), 안드로이드(인조인간을 뜻한다. 인간형 로봇으로 유기적, 무기적 두 종류가 있는데, 각각 단백질과 금속을 그 재료로 한다. 따라서 레플리컨트는 ‘유기적 안드로이드’이다), 복제인간(영화 <아일랜드>의 두 주인공을 보라)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레플리컨트는 민중신학의 민중으로 연결이 가능한데, 그 연결지점에 철학자 바디우의 도움이 필요하다(이하 허석헌, 2017 참조). 진리, 주체와 같은 메타담론들이 그 힘을 잃어가는 포스트모던 차이의 시대에, 동시에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거대 이데올로기가 은밀한 방식으로 착취적인 경제를 가속화시키는 시대에 자신의 진리철학을 전개한 바디우는 자본주의의 체제 안에서 인간의 보편적 해방의 길은 진리를 추구하는 주체의 사건에 대한 충실성과 또한 그 실천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들려주고자 했다. 사실 바디우가 말하는 이러한 주체가 낯설지 않은 것은 우리 역사 안에서 변화발전의 주체로 호명되었던 80년대 ‘민중’이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은 살아온 그 역사와 민중신학이 그러하듯 주류가 되지 못한다.

사실 1990년대, 시대의 변화에 맞게 민중을 체계화시키고, 사회학 논리 안으로 편입시키려고 했을 때 민중은 쉽게 규정당하지 않았다. 2000년대 시대의 변화 안에서 민중은 더 이상 설자리를 잃었으며 퇴색된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등한시 될 때에도 그렇게 쉽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밟아도 뿌리뻗는 잔디풀처럼 역사의 주류는 아니나, 그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온 것이다. 물론 우리는 민중을 바디우처럼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해명해 낸 적은 없었지만, 민중은 쉽게 정의될 수도 없고 정의하려고 시도한다면 실패할 것을 알았다.

게다가 민중이 실체로 드러나는 것은 주어진 사건이 자신과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스스로 결단함으로서 드러나고, 역사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촛불혁명을 통해서, 더 나아가 3.1운동, 4.19, 5.18. 6월 항쟁이라는 혹독한 역사를 통해서도 관찰 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바디우의 주체철학은 변혁의 변곡점마다 실패를 거듭해온 역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는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 2019와 2049는 우리의 역사와 달리 이제 변혁의 변곡점이 어떻게 그 지향점을 실천할 것인가를 의문으로 던져주고 있다.

바디우에게, 보편적인 진리사건이라는 것은 정의가 승리하고 불의가 패배하는 객관적인 결과로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진리사건이 드러나는 것은 사건에 충실성을 가지고 달려드는 주체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질서의 구체적인 변화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 즉 ‘주체화의 과정이 한 사회 안에서 진실성 있게 발현되고 신뢰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것이다(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촛불혁명은 놀라운 기적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공산주의 혁명’이든, ‘민주주의 혁명’이든, 또는 ‘기독교적인 진리의 변화(가령 바울)’이든, 결국 잠재적인 진리사건을 실재화 시키는 힘은 주체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의미는 혁명이 성공했는가의 여부에 있지 않다. 속편의 주인공 K(라이언 고슬링 분)의 혁명은 이제 시작이다. 어쩌면 실패할 수도 있는. 따라서 손바닥으로 눈을 맞으며 죽어가는 K를 통해서 우리는 잠재적인 진리사건을 실재화 시키는 주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K는 사건(레플리컨트의 운명에 대한 자각)을 통해 주체로 조직되었는가?, K는 그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경험으로 전개될 앞으로의 사건에 대한 높은 수준의 결단과 실천을 제시해 주었는가?, K는 공고하게 보이는 체제에 맞서 보이지 않는 공백의 힘으로서 주체를 신뢰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확실한 태도와 입장을 확립하는 것이 변혁의 승패를 좌우하는 관건임을 바디우는 말하고 있기에 지금 지구촌 최강국인 미국의 미치광이 트럼프와 아베가 지구촌 최약체국 북한을 윽박지르며 한반도에 전쟁 분위기를 만드는 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져야할 분명한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K도 레플리컨트들의 그러한 희망, 2049년의 민중들의 소망, 그리고 그 기억을 품었다.

4. <블레이드러너2049>, 레플리컨트적 전회

철학의 역사는 새로운 규범 창조의 역사이다. 플라톤(Platon)의 ‘수학적 전회’,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의 ‘언어적 전회’, 레비나스(I. Levinas)의 ‘윤리적 전회’, 그리고 <블레이드러너 2049>의 ‘레플리컨트적 전회’! 따라서 K를 통한 ‘레플리컨트적 전회’는 알랭 바디우(A. Badiou)의 생각을 기초로 5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사실 레플리컨트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다. 이것은 전편은 물론 속편에서도, 그리고 속편 프리퀄에서도 발견된다. 둘째, ‘다른 가능성, 다른 세상 모색!’, 사실 바디우에 의하면 철학은 위험한 실천이다. 비난과 조롱, 왜곡과 탄압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K는 그 길에 주체의 충실성으로 걸어간다. 셋째, ‘자기 자신의 삶을 살라!’, 지배적 질서에 개입하고, 새로운 규범을 창조하는 K, 질서의 역전을 제기하는 K. 바디우식 주체의 탄생이다. 넷째, ‘진리(바디우식으로 말하자면 지엽적이고 국지적인 진리이긴 하나)를 확신하는 주체의 삶!’,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K의 최후는 바로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주체의 삶이자 죽음이다. 다섯째, ‘같음’으로 향하는 ‘사건적 진리’에의 충실성! 이것은 K의 오해이긴 하나, 자신을 레플리컨트들의 메시아로 이해하여(같음) 사건적 진리에 충실하고자 했다. 오해도 의미있는 충실성의 도구가 된다.

최근 논의 되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은 기술과 인간의 융합이다. 기술 자체를 인간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술과 인간이 구별될 수 없는 지점, ‘인간 구성=기술적 구성’이라는 주장으로 휴머니즘과 인간중심 개념을 비판한다. 플라톤의 수학적 전회가 인간의 세상 인식론에 대한 인간중심주의였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적 전회가 인간의 세상 인식론에 플라톤과 달리 인간의 언어에 중심을 인간중심주의였다면, 레비나스의 윤리적 전회가 철저히 ‘인간-너’를 위한 타자의 휴머니즘이었다면 이제 <블레이드러너 2049>의 ‘레플리컨트적 전회’는 인간중심주의와 트랜스휴머니즘(인간 개조)을 넘어서는 진정한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 곧 인간을 넘어서는 다른 종의 개막이다.

따라서 포스트휴머니즘은 21세기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숨 가쁘게 변화하고 있는 우리들 삶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와 신체를 이해할 새로운 관점이 된다. 이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 생태환경을 위해 심사숙고해야 될 사건인 것이다. 영화 <블레이드러너 2049>는 그 답을 이렇게 21세기 중반의 민중인 레플리컨트적 전회로 제시하고 있다.

5. K, 집중함으로 영혼을 소유하다

인문(人文)을 ‘인간의 무늬(人紋)’로 새겨왔던 철학자 김영민은 최신작 『집중과 영혼』 (글항아리, 2017)에서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는 것으로 ‘집중’에 주목한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약속과 계약을 포함하는 일련의 사회적 실행의 계기들이, 현재와 미래를 한 궤선으로 잇고 주체의 일관된 의지로 이 궤선을 완결시키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집중’이라는 태도를 배양하며 이와 더불어 인간의 정신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안내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영혼의 상태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시몬 베유(S. Veil)가 말했듯이, 집중은 정신적 에너지의 밑절미가 되기에 그 방향에 따라 의미와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죽 쒀서 개주어서’는 안 되고, ‘공들여 오른 산’이 엉뚱한 곳이어서는 곤란하며, ‘호의가 지옥’으로 안내하는 길라잡이 노릇을 해서는 파국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념해서 일군 재능과 성취가 폭력과 죽임의 매체로 전락하는 것도 비극이다.

그러므로 집중하는 사람은 집중을 통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의 집중이 얹힌 생활양식은 어떤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지, 그리고 그 집중이 이웃과 세상을 어떻게 대접하는지 하는 문제가 다시 ‘문제’가 된다고 한다. 이런 뜻에서 집중은 문제의 해결이 아닌, 가장 중요한 문제를 발굴한 것인 셈이다. 그러므로 집중은 구체적인 여건과 매체의 조건에 얹혀 점진적으로 개량되는 극히 인간적인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김영민이 강조하는 집중은 정신의 강도, 지속성, 방향성이 중요하다. ‘예리하고 섬세한 정신의 지속성’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집중이라는 행위는 ‘완전히 순수한 집중’, 즉 강도가 중요하다. 엄벙덤벙, 데면데면하다면 그것은 이미 집중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주의의 상혼이 인문적 집중과 버성길 수밖에 없는 변덕과 자의의 시대에 제 나름의 형식과 강밀도를 지닌 집중의 생활을 유지하는 일은 어렵고 또 그만큼 중요한 생활정치의 노력일 것이다. 요약하자면, 집중은 강도―지속성―방향이 핵심이다.” 따라서 열중과 다르다. 동물도 본능적으로 짧은 순간 먹이를 위해 열중한다. 그러나 집중은 사욕을 비워내는 차분하고 지속적인 과정으로 ‘존재론적 겸허’를 갖춘 태도이다. 곧 그것은 ‘에고’와의 투쟁인 것이다. K는 열중을 넘어 집중한다.

동시에 K는 김영민의 영혼관에 의하면 영혼을 소유한다.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에 관한 이야기’로서 영혼은 김영민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은 지속적인 집중에 의해 스스로 변화하면서 얻어가는 ‘깊이’ 속에서야 비로써 ‘영혼’이라 부를 수 있는 자태가 드러난다.” K는 사건에 직면하여 그 사건에 집중하며 주체의 충실성을 통해 인간의 영혼보다 더 인간적인 영혼을 소유했다.

뱀꼬리. 몽타주와 내러티브

키노-프라우다(kino-pravda, 영화-진실)를 실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베르토프가 사용한 것은 몽타주이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에서 그가 보여 주었던 스냅(snap, 변화하는 장면을 인위적으로 연출하지 않고 재빨리 촬영하여 기록한 사진)들의 연결은 ‘서사적 내러티브’의 구성에 익숙한 시선들에는 낯설고 충격적이었다. 부동의 사물들을 감각적인 속도로 이어 붙이는 형식 실험을 통해 그는 부르주아적인 퇴폐와 건강한 사회주의적 생산을 끊임없이 대비시킨다. 그러나 베르토프가 몽타주를 포기하고 거대 서사의 내러티브 속으로 들어갔을 때, 이념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그의 영화에서는 소비에트적인 것과 파시즘적인 것, 나아가 제국주의적인 것으로 변질되었다.

블레이드 러너 후속작을 기대하지 않는 이유는 “한 아이가 태어나, 성장하여, 민족을 이끌고 출-인간한다.”라는 성서의 이념에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깨달은 영리한 속편의 감독 드니 빌뇌브(D. Villeneuve)는 시종일관 속편을 이미지로 승부를 했다. 그리고 전작의 모호성을 그대로 이어갔다. 아무튼 <블레이드 러너>를 만나고 해석한다는 것은 동시대의 큰 ‘행운’이었다.

<참고문헌>

김영민, 『집중과 영혼』 (글항아리, 2017)
이정우, ‘제작된 인간의 운명’, 『기술과 운명: 사이버펑크에서 철학으로』 (한길사, 2001).
이진경, ‘블레이드 러너: 복제인간과 안티-오이디푸스’, 『필로시네마』 (그린비, 2008).
최병학,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자연미에 대한 예술미의 우위?’, 『영상시대의 종교와 윤리: 타락을 통한 구원받기』 (인간사랑, 2002).
허석헌, ‘알랭 바디우와 민중사건’, 웹진 <제3시대> 2017.1.11.
헤겔, 두행숙 역, 『헤겔미학Ⅰ』 (나남, 1996).

최병학 기자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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