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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요한복음 3:3-5)다짐과 유지
이성훈 | 승인 2017.12.11 01:05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신앙 사상과 형태의 변화

오늘은 우리가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 ‘거듭남’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신약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복음서나 서신이 기록된 시기에 따라서 신앙 사상이나 형태가 변해가는 모습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신적인 위상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면,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로마서 1장 3절과 4절에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육체적 권위와 신적 권위 모두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적인 부활을 통해, 능력을 드러내셨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여지를 줍니다.

마가복음의 경우에는 예수님 출생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신으로 태어나셨는지 사람으로 태어나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귀신들과 이방인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하고 있고, 결국 종장에 이르러서는 이 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마가복음의 서술 방식을 ‘마가의 비밀 주제’라고 부릅니다.

마태와 누가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신적으로 태어나셨음을 탄생설화를 통해 암시하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도 마태는 예수님이 ‘다윗의 계보’라는 점을 강조하고, 누가는 거기에 세례 요한 탄생설화를 추가하면서 어머니 쪽으로는 ‘제사장 계보’라는 점까지 더합니다. 즉 신적으로 태어나셨지만, 인간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완전한 권위를 가졌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서 늦게 기록되었다는 요한복음의 경우는 시작부터 예수님이 그냥 신이라고 말합니다. 태초에 계셨던 그 말씀이 육신을 입어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육신은, 그저 신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해서 입으신 껍데기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리고 요한복음보다 더 후대에 기록된 서신들에서 예수님은 이미 신적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초대 교부들의 글이나 외경들까지 참고한다면 더 많은 흐름을 읽을 수 있겠지만, 신약성경 안에서도 이러한 인식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이러한 인식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명쾌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는 신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인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말은 유대교 랍비들도 종종 하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친아들이라는 말인지 비유적인 의미인지 애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예수님은 인간인가 신인가를 놓고 고민했고, 결국 하나님의 ‘친아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또 다시 예수님은 인간이냐 신이냐의 논쟁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이미 예수님은 신이시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것이 우리 신앙의 전통으로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신앙은 사상이나 행위가 변화되고 발전되어 간다는 생각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꼭 예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씀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까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기억은 변할 수 있습니다. 또 교회가 이미 당연하게 받아들인 사상에 대해서는 당연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록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의 대화나 하루 중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동영상으로 찍어놓고 다음날 그 대화나 사건에 대해서 그대로 적어본다면, 우리가 기록한 내용이 동영상의 내용과 100% 동일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대화 내용이나 사건의 큰 흐름만 동일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던 신앙 사상의 발전에 따라 예배의 형태도 변화되고, 기록하는 내용도 변화되어 갑니다. 이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고, 신앙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도 아닙니다. 입에서 입으로, 또한 사람에서 사람에게 전달되는 종교에 있어서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교회가 어떤 식으로 발전되어 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 이런 사상이나 행위의 변화 가운데에서도 본질적인 점,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점은 결코 변하지 않았음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한 인식의 변화, 신앙 사상의 변화를 말씀드렸다면, 이후에서는 요한복음 3장의 이야기를 살펴본 후에 신앙 행위의 변화와 그 변화 속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본질적인 점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요한복음 3장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유대인 지도자 중의 한 명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사실 실제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당시에 유대인 랍비가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 일은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공관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또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예수님께 다가오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이야기가 무수히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기록될 시기에는 기독교와 유대교가 완전히 분리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AD 70년경 참혹했던 유대-로마 전쟁으로 인해서 유대교는 바리새파를 제외한 모든 교파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바리새파는 유대교를 재건해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헨리 오싸와 타너,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1899년, 개인소장).

그런데 바리새파가 중심이 된 유대교를 재건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존재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르는 집단’이었습니다. 바리새파가 보기에 이들은 유대교인 듯 유대교 아닌 모습이었고, 자신들과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었고,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시기에 유대인 랍비가 기독교인을 만나러 오는 일은 흔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니고데모는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만나러 옵니다.

예수님 앞에 온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까지는 아니지만, 2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예언자 또는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한 것이며 예수님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를 향해 약간은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딱히 여쭤본 이야기도 아니고 니고데모는 그저 예수님을 높여드린 말을 했을 뿐인데, 예수님께서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사람이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가 됩니다. 명제에 대한 역은 항상 참은 아니기 때문에, 명제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대우 명제로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가 됩니다. 복잡하고 쓸데없는 논리적 풀이지만, 여기에서 핵심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바꿔 봐도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것이 니고데모의 고백에 대한 답변이라면,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올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복잡한 이야기를 드렸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람이 거듭난다면 누구라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이후로 요한복음 3장의 내용은 전부 하나님께 속한 사람에 대한 내용이며, 니고데모가 처음 예수님을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거듭남

앞선 이야기에서 핵심이 된 단어는 ‘거듭남’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다보니까 ‘거듭남’이라는 말이 그저 ‘새롭게 된다.’는 의미로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사실은 ‘거듭’과 ‘태어남’을 합쳐서 ‘거듭남’이라고 만든 합성 명사입니다. 요즘 사용하는 단어들로 바꾸자면 ‘다시 태어남’을 뜻합니다.

헬라어로 ‘겐네테 아노텐’은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헬라어 ‘겐나오’는 ‘자식을 갖다’라는 의미로, 성경에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할 때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수동태인 ‘겐네테’로 쓰여서 부모로부터 다시 나아짐, 즉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요한복음 시대에는 ‘거듭난다’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다시 나아진다’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나중에 베드로전서에 보면 ‘다시 나아진다’가 ‘아나겐나오’라는 하나의 단어로 사용됩니다. 교회의 교리가 발전해 가면서 하나의 단어가 생겨났다고 생각해도 될 듯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시 태어남’은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표현이었을 것이고, 생소했기 때문에 니고데모는 이를 비유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람이 나이를 먹고 어떻게 다시 모태에 들어갑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난다고 말씀하신 것은 다시 어머니 배 속에 들어간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식의 뜻이었다면 불교의 윤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설명해주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라는 말씀까지 덧붙이십니다. 이 말씀에는 약간 논쟁이 있습니다.

‘물’은 육체적 탄생을 말하고 ‘성령’은 영적 탄생을 말한다고 해석해서, 성령으로 인한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런 해석은 우리가 처음에 보았던 바울의 생각과도 연결될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물’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뜻하고 ‘성령’은 예수님의 세례를 뜻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에 비해 후대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안에는 이미 발전되어진 교회의 교리가 어느 정도 담겨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교회의 발전과 함께 자신들에게는 이미 익숙하게 받아들여진 신앙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물과 성령은 분명 교회의 어떠한 행위, 즉 세례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의 세례는 세례요한의 세례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했던 이유는 죄를 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사람들의 죄를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그들이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선포하였고 그들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그러한 죄에서 벗어나도록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물의 세례는 이 땅에 태어나서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고 있었던 죄의 씻음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베푸시는 세례는 영을 씻는 세례입니다. 영을 씻는다는 말을 너무 고차원적인 이야기라던가 영혼에 새겨진 원죄로 생각하실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죄를 씻는다고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마태복음 5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으로 짓는 죄도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세례는 마음의 깨끗해짐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 행위의 발전, 예전의 발전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행했던 물의 세례는 당시 유대교의 제사 제도가 가진 한계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제사 한 번에 죄가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분명 죄를 범하는 일에 두려움이 없을 것이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지속적으로 죄에서 벗어난 삶을 살자는 다짐의 의식을 행하였고 그것이 물의 세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물의 세례를 인정하셨습니다. 하지만 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 역시도 죄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하셨습니다. 그것이 성령에 의한 세례, 마음을 씻는 세례입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성령에 의한 세례라는 개념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로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개념 정도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공관복음서에는 성령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시기에는 이것이 체계화 되어서 성령에 의한 세례를 받는다는 개념으로 발전하였고, 물과 성령의 세례를 모두 받아야 거듭날 수 있다는 교회의 교리이자 신앙행위가 확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물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받고 거듭난 사람, 육신의 죄와 마음의 죄를 모두 씻고 거듭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 하나님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 행위나 예수님의 말씀들을 생각해보았을 때, 거듭남은 단지 일회적인 이벤트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의 세례뿐만 아니라 성령의 세례까지 말씀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바꿔 말해서, 거듭남의 순간은 내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며 이 다짐을 유지해나갈 때에 거듭나게 됩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죄가 씻어지는 것이지, 세례를 받았으니까, 예수님께서 용서해주셨으니까 죄가 씻어지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이 거듭남입니다.

저희들이 교회에서 많이 들어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특히나 남성분들의 간증에서 많이 듣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다니고 예수님 믿고 나서 술 담배 끊었다고, 거듭났다고 말씀들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술 담배 끊었으면 분명히 새로워진 것 맞고 어느 면에서는 거듭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술 담배가 죄냐’ 하는 문제를 말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해서 변했고 다시 그것을 하지 않는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변화를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개인에게만 속하는 죄보다는 남을 향한 죄, 관계 속에서의 죄를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술 담배는 끊었지만, 남들에게 더 악랄하게 행동한다면, 차라리 술 담배 하면서 착하게 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단순하게 술 담배를 안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진정한 거듭남이 될 수 없습니다. 거듭남은 그 이상의 변화를 말합니다. 술만 마시면 가정폭력을 행하던 분이 술을 끊고 가족을 때리지 않게 되었다면 그것은 분명 거듭남입니다. 담배에 대해서도 자신이 피는 담배로 인해 누군가에게 간접흡연을 하게 되고, 이는 잘못이라는 점을 생각해서 담배를 끊었다면 그것은 분명 거듭남입니다.

반면에 내 건강을 생각해서 술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간혹 이런 말씀을 드리면, 고린도전서 3장의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성전을 더럽히면 안된다’는 말씀이나 6장의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고린도전서 3장은 교회 내에서 다툼을 일으키지 말고 참된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라는 말씀이고, 6장은 앞서 말씀드린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우리의 건강을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은 우리의 건강을 위해 술 담배를 끊으라고 말하는 의사 선생님도 아니고 퍼스널 트레이너도 아닙니다.

빛을 사랑하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사실 마음이 씻겨 졌다는 것,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불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으로 더 이상 악한 일을 생각하지 않는 일이 가능하기나 하겠습니까?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다시 여쭙니다.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부터 이어진 말씀이 여러분께서 너무나 잘 아시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입니다.

우리가 절대 이 말씀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 말씀을 마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다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사용해왔는데,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19-21절 말씀에서 보면, 행위가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빛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빛을 미워하고 어둠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악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 이미 빛을 사랑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악한 행위에 빠져있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바꿔서 생각해보자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 빛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을 사랑하는 일이 세상의 악을 멀리하는 일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이 악으로 빠지지 않게 붙들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에 따라야하며 그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아들을, 빛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면 끝이 아닙니다. 마음을 예수님을 향하게 하고, 그로 인해서 마음에 악이 생기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며 선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거듭난 삶입니다.

나가는 말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생각들이 발전해왔고, 그곳에서 어떠한 결론을 내리면서 마무리 지었듯이, 신앙의 행위 또한 발전하며 완성되어 왔습니다. 신앙행위, 바꿔 말해 예전은 지금 이 시대에도 조금씩 변하면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제사의 한계를 보았고, 그렇기에 세례 요한이 행했던 물의 세례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물의 세례 역시도 한계가 있음을 깨달으셨고, 영적인 변화, 마음의 변화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이를 성령에 의한 세례라는 형태로 완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로부터 지금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물에 의한 세례와 성령의 세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예배 의식이자 행위입니다.

이 두 가지 세례를 통해 우리는 거듭난 사람이 됩니다. 이때의 거듭남, 다시 태어남은 육신의 죄를 벗고, 마음의 죄도 벗는 의식입니다. 지금까지의 죄를 뉘우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일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이며, 이를 위한 노력입니다.

이 노력의 일환으로 우리는, 평생에 악한 일들을 행하지 않아야 하며, 우리 앞에 빛으로 나타나시는 예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의 빛이 비추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다시 악으로 도망치지 않고 그 빛에 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빛에 속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나는 사람이 되시길 바라며 온전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시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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