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하는 일은 딱 정해져 있다.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져 진행되는 재활치료와 때마다 따박따박 등장하는 밥 먹는 것. 그 외에는 침대에서 널부러져 자는 게 일인데, 재활치료라는 것이 그간 안 쓰던 근육을 써야 하는 운동이 대부분이니 마치고 나면 뭐에 두들겨 맞은양 몸살이 날 지경이다. 그렇게 잠들지 않으면 노트북 켜놓고 새로운 책이 뭐가 나왔나 하고 웹서핑 하는 게 그나마 제일 생산적인 일이다.

3일 전인가 침대 위에 쓰러져 잠들지 않고 신간 구경을 하던 중, 그 이름도 찬란한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가 번역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또 광분했다. 브로델이 누구던가, 프랑스 아날학파의 아버지이자 구조주의 역사학의 대부 아니던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아래로부터 파헤쳐 세계 역사학의 교황이라 칭송되던 학자 아니던가.

▲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의 박사학위 논문이자 그를 일약 역사학의 교황으로 격상시킨 역작 『지중해』가 번역되었다. ⓒ까치출판사

이런저런 명성이야 대단하지만 책을 읽자면 욕부터 나오는 게 사실이다. 어렵지 않은 문체이지만 양으로 압도하는 그의 저술들은 쉽게 넘어설 수 없는 난맥이기도 하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만 해도 6권이다. 권수가 많으면 쪽수라도 적든가, 한 권만 해도, 어느 책은 900쪽에 달한다.

누구나 칭찬하지만 누구도 읽지 않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어쨌든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1902년 프랑스 북동부 뫼즈 지방에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르본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1932년까지는 알제리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마이크로필름으로 자료를 제작한 최초의 역사가이다. 브로델이 애초에 염두에 두었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펠리페 2세의 지중해 정책”이었지만, 지중해 세계에서의 고문서 작업을 통해 그의 관심은 서서히 펠리페 2세라는 한 개인에서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로 옮겨 갔다. 

지중해 세계를 세 가지 분야에서 연구

▲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구조주의 역사학의 대부이기도 했다.

그는 1935년에서 1937년까지는 브라질의 상파울루 대학에서 강의를 담당했는데, 이 기간은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마이크로필름을 해독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브로델은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주로 기억에 의존하여 학위 논문을 작성해 나갔다. 일상적인 사건들에 대한 거부, 운명은 심층적인 곳에 쓰여져 있다는 확신은 그가 비극적인 시간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준 힘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학위 논문을 제출했고, 2년 뒤 1949년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는 세상에 나왔다.

박사학위 논문으로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3분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제1부는 ‘환경의 몫’에 할애되어 있다:

“제1부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 즉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주위 환경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의 역사를 다룬다. 서서히 흘러가고 서서히 자신을 변화시키며, 자주 완강히 되돌아가기를 고집하는가 하면,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주기들로 이루어진 역사이다. 나는 거의 시간 바깥에 위치하며 생명이 없는 사물들과 접하고 있는 이러한 역사를 도외시하고 싶지 않았다...”

『지중해』의 역사가는 바다의 비유를 즐겨 사용하는데, 맨 아래의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 위에는 완만한 리듬을 가진 역사가 있고, 맨 위에는 표면의 출렁거림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제1부는 반도, 산, 평원, 섬, 바다, 기후, 교통로, 도시 등과 같은 자연지리, 인문지리, 그리고 그 속에서 반복적인 삶을 영위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제2부 ‘집단적 운명과 전체의 움직임’은 시대의 척도인 인구, 경제, 가격, 수송, 국민국가와 제국, 사회, 문명, 전쟁의 형태 등을 다루고 있고, 제3부‘사건들, 정치, 사람들’은 16세기 후반 지중해 세계에서 벌어진 전쟁을 단계별로 서술하고 있다.

브로델의 역사학은 구조적이다

그러면 역사학사적으로 볼 때, 이 책을 새로운 역사의 모델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우선, 브로델의 역사학은 구조적이다. 맨 아래의 역사는 구조의 역사이며, 그 위의 역사는 국면변동의 역사이고 맨 위의 역사는 사건의 역사이다.

사건의 역사는 국면변동의 역사와 구조의 역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면변동과 구조부터 이해해야 한다. 『지중해』의 3분 구조에서 구조가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역사 인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구조사는“정치, 위인, 연대”라는 우상을 숭배하던 사건사를 주변적인 역사로 격하시켜 버렸다.

구조란 건축학 용어이다. 그것은 건물의 뼈대를 말한다. 건물 내부의 배치는 인간의 의지에 따라 쉽게 바뀌지만 건물의 뼈대는 잘 바뀌지 않는다. 여기에서 나온 구조의 의미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원하면, 구조사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이다. 그것은 시간의 마모를 잘 견뎌내는 역사, 오래 지속되는 역사이다. 따라서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역사가는 매우 긴 시간대를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브로델의 장기지속의 역사가 탄생했다.

구조의 개념은 역사의 장애물이기도 하다

모든 구조는 역사의 받침대이자 동시에 장애물이다. 장애물로서의 구조는 인간 및 인간의 경험이 거의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이룬다. 예컨대, 어떤 지리적 틀이라든가 생물학적 사실, 생산성의 한계, 심지어 여러 가지 정신적 제약 등을 깨뜨리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구조는 감옥이라는 이미지는 브로델 역사학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역사가 자신이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듯이, 인간은 구조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수인(囚人)”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역사 속에서 인간은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하는 철학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브로델의 역사 세계에서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전통적인 역사학의 위인들처럼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브로델의 구조사에서 인간의 몫이 줄어든 것은 분명하다. 인간의 몫 외에도 환경의 몫과 사회의 몫이 함께 역사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브로델의 역사는 구조사이면서 동시에 구조-국면변동-사건 모두를 포괄하는 전체사이다. 역사학의 틀이 시공간적으로 확대되었으며, 인간의 총체적인 삶이 조명된다.

파편화된 브로델의 역사

브로델은 ‘역사학의 교황’이라는 절대적인 권위를 누렸지만, 그러나 그의 역사학 역시,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시간의 마모를 견뎌지 못했다. 20세기 후반에 불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담론을 해체하였고, 미시사, 문화사, 일상사 등이 브로델 식의 거대한 역사, 물질적인 역사, 구조적인 역사를 대신하여 새로운 역사의 자리를 요구했다. 브로델의 전체사는 해체되고, 파편화 되었다. 아직도 유행하고 있는 소위 “...의 역사”는 바로 이 같은 변화를 잘 보여준다.

나아가 브로델의 역사학에는 감옥만 있을 뿐 정작 인간은 없다는 식의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이해가 아니다. 브로델의 구조사는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주위 환경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브로델의 역사에서 인간의 역할이 축소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브로델은 이야기체 역사에 맞서 과학적인 역사를 지향했다. 그러나 과학이 인간을 배격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앞의 인용문에 나오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의 거의는 아무 의미 없이 붙어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물화된 역사, 움직이지 않는 역사, 법칙화 되고 기계화된 역사, 다시 말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거부하는 그러한 역사는 브로델의 역사가 아니었다.

이정훈 기자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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