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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소주 한병 주이소”화해와 평화가 가득한 했던 아름다운 순간
박철 | 승인 2018.01.05 23:35

30년 전 가을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는 청량리에서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좌석표를 예매하지 못해 서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창 밖 풍경은 산마다 단풍으로 붉게 물들었고 가을햇살이 눈부셨습니다. 정선으로 가는 열차를 갈아타기 위해 증산역에서 내렸습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 시장하기도 해서 가락국수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웠습니다.

30분 족히 기다리자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증산에서 구절리행 비둘기호 열차가 막 선로위에 들어섰습니다. 열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차에 올랐습니다. 낯익은 얼굴들도 중간 중간 끼어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기적소리를 내며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열차 안은 이내 조용해졌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단한 하루의 삶을 의자에 뉘어 창안으로 들어오는 가을햇살 맞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 (사진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비둘기를 애용하는 아낙네들은 한결같이 짐보퉁이가 크고 많다. 그 많은 짐에 비해 비둘기호는 한마디 잔소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둘기를 타면 우리는 누구나가 다같은 한국적인 '서민'이 됐었다. 그 안에 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없다. 그저 익숙한 친밀함과 포근함이 있을 뿐이다. 시골아낙들은 매번 기차 안에서 자주 마주치던 얼굴이다. 각자가 장을 본 것을 서로 비교해보기도 한다. 할머니가 고단하신지 의자에 누워 잠을 주무신다. 우리의 어머니가 거기에 계시다. 남루한 열차이지만 우리에겐 '자유' 와 '평화' 의 창공을 나르던 한 마리의 비둘기와도 같은 존재였다. ⓒ 이진홍

그런데 별안간 어디선가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졸던 사람들이 깜작 놀라 눈을 크게 뜨고 큰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이 모아졌습니다. 내가 앉아있던 자리 맞은편에 앉아있던 50대 중 늙은이 두 사람이 서로 험한 표정을 하고 듣기 거북한 욕을 퍼부으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중 한사람도 자기 목소리가 작으면 싸움에서 밀린다고 생각했던지 더 큰소리를 지르며 곧 주먹이라도 날아갈 듯이 싸움의 공방이 치열하게 전개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열차 안의 사람들 중 이들의 싸움에 끼어들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들의 요란한 싸움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심하던 차에 이들의 싸움을 재밌게 구경하는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과연 이들 싸움의 승부는 어떻게 날 것인가?’

그렇게 십오 분여 동안 격렬하게 말싸움을 하던 두 사람도 구경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던지 이내 싸움의 승부가 가려지지 않고 싱겁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서먹서먹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다시 열차 안은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열차에서 음료수나 과자 따위를 파는 홍익회 직원이 작은 손수레를 밀면서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좀 전에 싸웠던 한 사람이

‘이봐요. 여기 소주 한 병 주이소!’

그러더니 술을 한가득 컵에 따라 좀 전까지 격렬하게 싸웠던 옆 사람에게 잔을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소주병은 금방 빈 병이 되고 말았습니다. 술병의 술이 다 떨어지자 두 사람은 갑자기 말이 많아지더니 아무 일이 없다는 듯 다정하게 보였습니다. 다시 손수레가 되돌아오자 또 한 사람이 소주를 한 병을 더 시키더니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나눠먹는데 나는 그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야, 이 사람아! 아까는 내가 잘못 했네. 내가 성질머리가 못돼먹어서!”
“아냐. 내가 속이 좁아터져서 대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 괜히 큰소릴 냈구만. 내가 미안하네!”

내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눈물이 너무 쏟아져서 누가 볼까봐 안경을 벗고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좋은 영화를 보고 나올 때처럼 내 마음이 훈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내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박철  pakchol@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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