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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 미남자 “기타나이” 더러운 신학자 서남동내가 만난 서남동 목사 ①
서광선 | 승인 2018.01.07 22:37

서광선(이화여대 명예교수. 제2대 민중신학회 회장, 초대 서남동 목사 기념사업회 이사장)

세브란스 병실에서의 마지막 인사

서남동 목사님은 1918년 생, 올해 살아 계시면 100수이시다. 그러니까 1931생인 나에게는 새카만 선배 어른이시고 나보다 13년 앞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셨다. 그런데 내가 올해 우리 나이로 미수(米壽) 88이라고 하는 데, 서남동 목사님은 1984년 66세의 젊은 연세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서남동 목사님에 대한 회고를 할 때 마다 몇 번이고 한 말이지만, 목사님이 1984년 봄 미국 각지를 순방하면서 한국의 민중신학을 강의하고 박정희 밑에서 해직교수 하던 일,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광주 학살한 이야기, 그리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검거됐던 일, 우리 한국의 70년대와 80년대, 쓰리고 아픈 시대를 이야기하시다 일본을 거쳐 귀국하시면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셨다.

▲ 서남동 교수의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 시절 ⓒ죽재 서남동목사 탄생 100년 기념사업회 제공

우리 해직교수들은 1984년 가을 학기에는 대학 강의실로 돌아가게 된다는 학교의 통보를 받고 있던 터였다. 나는 세브란스 병원 입원실로 달려갔다. 목사님의 병은 중태라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내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환자 손이 왜 이리 힘셀까, 속으로 반가웠지만, 솟아 나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목사님은 그 맑은 눈으로 나를 뚜렷이 쳐다보시면서 하시는 말씀: “서 박사, 우리 민중신학 잘 부탁해요...” 나는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목사님의 두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서남동 박사님...”하고 말을 이으려고 하는데, 서남동 박사님은 그냥 웃기만 하셨다. 서 목사님은 이번 북 미주 순방 길에 모교인 캐나다 토론토 녹스 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고 오신 것이었다. 나의 진정한 축하의 뜻을 그렇게 밖에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내일 아침, 미국에 갈 일이 생겼어요. 지난 몇 년 동안 해 오던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에서 한국 목사님들 D.Min 공부하는 것 도와 드리려고 갔다가 대학 복직하는 가을 학기에 돌아 올 겁니다. 그때 까지 힘내시고 퇴원하시고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하세요.” 목사님은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다시 치밀어 올라오는 눈물을 참으며 병실을 나왔다.

그 만남이 이 생의 마지막 만남이었고 영원한 작별이 되리라고는 차마 생각을 못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서남동 박사 이후의 한국 민중신학

지금 2018년 서남동 목사님이 100살이 되시는 해에 목사님이 살아 게셨다면, 목사님도 젊은이들 한데 “진보꼰대”라는 “존칭”을 받을까? 왜 요새 젊은 신학자들은 “개념”도 없고 신학이 무언지도 모르고 할 줄도 모르고, 그저 권력이나 돈이면 무슨 짓이든 하려고 하고...신학대학 총장은 왜 그렇게들 욕심을 내는지 몰라...“그러실까?

나는 1969년 가을 학기부터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봉직하면서 같은 학과의 선배교수인 현영학 교수님을 따라 종로 YMCA 호텔 방에서 하는 신학 연구 모임에 가서 처음으로 서남동 목사님에게 인사드린 기억이 있다. 그날부터 목사님이 돌아가실 때 까지 목사님의 최측근이라고 생각했고, 목사님의 후배 민중신학자로 행세했고, 목사님의 공개 신학 강좌는 거의 빠지지 않고 따라 다녔다. 목사님은 강연하실 때나 세미나에서는 항상 준비가 잘 된 말씀 만 하신 걸로 기억한다. 빈 틈 없는 논리 정연한 논문을 쓰시고 발표하셨다. 청중의 질문에 대해서는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답변하셨다. 음성을 높여서 화를 내거나 논쟁을 하실 때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멸시하거나 화내게 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목사님이 돌아가신 다음인가, “민중은 한(恨)의 사제”라는 논문을 내가 영어로 번역한 것을 미국에 사는 대만 신학자 CS Song (宋昌盛) 박사가 “왜 사제(priest)냐?” 민중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예언자이고 사회 비판자이다. 라고 항변한 일이 있었다. 서남동 목사님이 답변하시기에는 이미 늦은 때였다. 나는 민중이 예언자 역할을 할 때도 있지만, 역시 한을 치유하고 한을 다스리는 제사장의 사역도 할 수 있고 할 때도 있는 거 아니냐고 토론한 적이 있다. 

“기따나이” 서남동 목사

목사님의 외모는 항상 단정했고, 목사님의 얼굴은 미소가 가득해 보이는 온화한 얼굴에 단아함이 있었다. 모든 면에서 깨끗한 어른이었다. 오늘 살아 계신다 해도, 결코 “진보 꼰대”라는 젊은이들의 볼멘소리를 듣지 않을 것이다. 목사님은 “보수 꼰대” 목사들의 비난이나 비판에 대해서 격렬한 논쟁을 조리 있게 하시고 때로는 분노하셨지만, 대화를 거절하거나 거부한 일은 없었다. 목사님은 후배 신학자나 학생들에 대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칭찬하거나 야단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목사님이 나를 좋아 하나, 미워하나, 귀찮아하시나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현영학 교수님에게 살짝 여쭈어 보면, “어, 서 목사님은 그렇게 함부로 좋다 나쁘다. 좋아 한다. 싫어 한다는 말씀 안 하시는 분이다. 철저한 일본 교육을 받은 학자이고 신사니까...” 하긴 한국 유학생으로 윤동주 애국 시인이 다닌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신학부 출신 아니었던가.  

그런데 목사님의 성함이 서.남.동. 한자로 西. 南. 東 이라고 쓰면, 서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은 있는데 북쪽이 없다는 것이다. “북(北(북)이 없다”는 말을 일본 말로 하면 “北(기따) 나이”가 된다. “기따나이”라는 일본 말은 “더럽다.”라는 말이다. 아니 우리 미남자 서남동 목사님이 더럽다니... 소리 내서 웃으면서 서 목사님을 놀리면, 목사님은 조용히 웃어넘기곤 했던 기억이 난다. 이 일본말을 제일 즐기고 되풀이 하신 분이 바로 안병무 박사였다. 자기는 일본말은 모르기도 하지만 절대 입에 올리기도 싫다고 하던 항일 인사였는데도 말이다.

특히 서남동 목사님이 통일교 “신학”을 옹호하고 “한국의 유일한 토착 신학”이라고 평가하고 나섰을 때 온 한국 신학계가 들고 일어나 반발할 때였다, 안병무 박사는 서남동 목사님을 놀리면서 역시 “기따나이” 목사가 “더럽게 걸렸구나” 하시면서 쾌활하게 웃어넘기던 기억이 새롭다. 우리는 그렇게 민중신학을 했다.***

서광선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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