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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보이지 않지만” - 衆妙之門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01
이병일 | 승인 2018.01.08 22:32

내가 말하는 도는 道라고 말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항상 따르고 실천하는 일상적인 道는 도가 아니고, 이름은 이름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그 이름은 사람들이 항상 부르는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無는 천지의 시작이라 부르고, 有는 만물의 어미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도는 항상 하고자 하는 욕심이 없으니 이로써 그 오묘함을 꿰뚫어 보고, 항상 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으니 이로써 그 돌아감을 꿰뚫어 본다. 이 둘(無와 有)은 같은 데(道)서 나왔지만 이름을 달리 한다. 도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쉽게 보이지 않고 알 수도 없으니, 모든 오묘함의 문이다. <도덕경(道德經) 제1장>

道可道也, 非恒道也. 名可名也, 非恒名也. 無名, 萬物之始也. 有名, 萬物之母也. 故恒無欲也, 以觀其妙. 恒有欲也, 以觀其所徼. 兩者同出異名, 同胃玄之又玄, 衆妙之門.

노자의 시대는 주나라 말기로서 나라의 법인 周禮(주례)가 일상적인 실천규범이었습니다. 따라서 常道(상도), 즉 ‘사람들이 항상 따르는 도’는 아버지와 아들, 임금과 신하, 어른과 어린 사람이 실천해야 하는 전통적인 예를 뜻한다고 불 수 있습니다. 常名(상명), 즉 사람들이 항상 부르는 이름은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어른과 젊은이 등의 이름입니다.

노자는 자신이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도는 당시 사람들이 항상 따르며 실천하는 예법과 같은 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이름은 예절을 따질 때 항상 입에 올리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어른과 젊은이 등과 같은 이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 道(도)의 고대 한자 ⓒ위키 커먼스

노자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요구합니다. 자연계의 현실에서 만물은 생명이 다하면 모두 소멸하여 기운(有)으로 돌아가고, 다시 유는 무로 전환됩니다. 그러나 도가 움직이기 때문에 거꾸로 무에서 유로, 유에서 다시 만물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노자가 말하는 도는 무와 유를 통해 만물을 낳는 현실이 자연의 도입니다. 노자가 말하는 시작이나 어미 등의 이름은 자연계에서 실제 활동하는 무와 유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도는 만물을 낳지만 모두 無로 돌아가게 합니다. 무로 돌아가는 도에는 어떤 욕심도 볼 수 없습니다. 도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지만 천지 사이에서 온갖 만물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도는 일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는 만물의 시작이고 유는 만물의 어미라고 하는 것은 모두 도가 그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그 속에 있는 것은 같은 도입니다. 그러나 도는 자신의 형체를 드러내지 않아서 보기 어렵기 때문에 노자는 ‘검고 또 검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검은 도(玄道)가 곧 헤아리기 어려운 모든 미묘함의 문입니다. 

세상에 길은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 길이 옳고, 어느 길이 그른지 헤아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길을 찾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찾는 일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가는 길이 옳다고, 그 길만이 정답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기도 합니다.

그 길에 현혹 되는 사람도 있고, 그 길을 강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 지 교묘하게 숨기면서 따라오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길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길이 평탄하기 때문에, 그 길이 더 재미있고 편안하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그저 따라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 않는다고 틀린 길은 아닙니다. 좁은 길이라고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 있으니 길을 가야 합니다. 어떤 길을 가는 지는 우리가 선택할 뿐입니다. 공간으로 이어지는 길은 시간으로 엮여집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면서 살펴보고 그 길의 끝이 어딘지를 알고, 가야할 길이라면 길을 만들면서라도 가야겠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한.

잃어버렸습니다. /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다 /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 길은 돌담을 끼고 돌아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 길 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 담 저쪽에 내가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 잃은 길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의 시 “길”>

▲ Anton Raphael Mengs(안톤 라파엘 멩스), “광야에서 설교하는 성 세례 요한”(St. John the Baptist Preaching in the Wilderness), 1760년대 작 ⓒGoogle Art Project

 

길을 찾기 위해서는 때때로 자기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믿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때가 무르익어서 바뀔 때가 되면 지금 자기를 자기 되게 했던 존재의 근거, 자기의 정체성을 내려놓고 혁명적으로 의식과 행동을 전환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죄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는 혁명적인 의식의 전환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의 대상을 온 유대인에게 확대시킴으로써 혈통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혈통에 의해서 권력과 권위를 유지하는 전통을 깨뜨렸습니다. 또한 물로 씻기만 하면 죄의 용서가 가능할 수 있게 한 것은 제사장과 성전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민중들의 죄의식으로 움츠러든 존재를 해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은 역사를 변화시켰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회개는 자기 마음이나 목적을 바꾸는 것이고, 나쁜 길에 빠진 후에 되돌아온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으로 돌아오는 것, 사고와 행동의 전환, 돌아섬입니다. 회개는 곧 ‘하느님의 방향’으로 우리의 의식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돌아섬은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며, 하느님과 일치하는 가운데 인류 안에서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일이 실행됨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회개는 궁극적으로 현실로의 돌아섬, 가난한 이들에게로의 돌아섬, 굶주린 이들에게로의 돌아섬에서 가능합니다. 그 돌아섬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의식의 전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미친 예수(이병일, 도서출판 밥북, 2017) “복음과 회개의 세례”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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