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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젊은이들이 왜 교회를 떠나는가(2)
박철 | 승인 2006.09.14 00:00

요즘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 들이 새가 둥지를 떠난 모습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왜 교회가 젊은이들에게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는지? 함께 얘기해 봅시다.


-토론 내용-
1.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2. 교회의 이상적인 모델은 어떤 모습일까?
3. 떠나간 젊은이들을 다시 교회로 되돌아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런 내용을 담아 자연스럽고 격의 없는 토론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긴 글은 Reply를 해주시고 가급적 코멘트를 달아 토론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간은 일주일입니다. 마지막으로 박철목사가 정리하여 신문지상에 발표하겠습니다.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박철 : 오늘부터는 젊은이들이 비교적 많이 모이는 교회의 성공사례와 떠나간 젊은이들을 다시 교회로 되돌아오게 할 수 있는 대안은 없는가에 대해 토론하겠습니다. 소그룹공동체가 잘되는 교회, 젊은이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생기 있는 교회, 젊은이들을 위한 전담부서와 부담임목사가 있는 교회, 젊은이들이 대사회적인 봉사활동을 앞장서서 하는 교회, 젊은이들을 위한 적극적으로 투자를 하는 교회, 젊은층과 장년층이 격의 없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교회 등을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체적인 경험과 대안을 모색해 주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실패한 경험도 듣고 싶습니다. 여러 가지 시도를 했는데도 왜 안 되는 것인지? 실패담도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도시교회들의 경험사례를 들어 보도록 전화를 걸어 토론 참여를 부탁하겠습니다. 처음으로 시도하는 인터넷 주제토론은 작은 시도이지만 이 땅에 토론문화를 정착시키는 일에 일조하기를 바랍니다.

   
김해옥
: 교회의 전반적인 교회분위기가 청년 위주로 전환을 모색하고, 청년들의 발언권을 높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청년들이 교회의 모든 공식적인 회의 참여하여 발언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제도적인 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광주에서 : '느릿느릿이야기'에서 이런 좋은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방금 감리교 사이트에서 왔습니다. 이런 토론이 감리교 사이트에서 왜 안 이루어지는지 모르겠어요. 조금만 머리를 쓰면 되는 것을. 서로 입장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도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조율하는 것이 토론 아니겠어요. 저는 박철목사님이 누구신지 뵌 적이 없지만, 뉴스앤조이에서 글로만 만납니다. 이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되길 바라고, 저도 나름대로 정리했다 주일낮예배 마치고 참여하겠습니다.

김광진 : 저는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이라 요즘 청소년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부득이 20년이 더 지난 저의 젊은 시절 이야기 밖에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부흥회 이후 전도 바람이 불었더랬습니다. 고등부에 학생들 자발적으로 전도 특공대가 창설되었습니다. 교회의 공식기구는 아니지만 교회가 인정하고, 일정부분 교회가 지원도 해주는…. 한 해 동안에 고등부가 거의 배로 늘었습니다. 고등학생들이 새신자 양육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전도 해오면 기존의 고등부 조직에 그냥 흡수되는 것 외엔 아무런 다른 기능이 없었는데 순전히 특공적인 전도 열기에 의해 한해에 무려 45명을 전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바로 접니다).

대학시절, 다른 신앙적 대안을 찾아 방황을 계속하던 시절, 조그만 소문이 귓가에 들렸습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그 교회는 대략의 위치를 설명 듣고 찾아가서도 정말 찾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2층의 코딱지만한 교회에서의 예배가 끝난 후, 옥상에서 차를 마시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저는 그냥 묵묵히 주변의 이야기들만 듣고 있었습니다.

학생회장 "어제는 왜 그렇게 화력이 약했어요?"
회원 "심지가 좋지 않았나 봐요"
전도사님 "바보들아 휘발유와 신나의 비율이 틀렸어"

세상에는 여러 유형의 교회가 있습니다. 세상의 다양해진 기호만큼 청소년도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또한 다양한 모습으로 청년 신도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셨을 것입니다. 일괄적으로 무엇이 옳은 것이냐를 말할 순 업습니다. 깊은 바다로 고기가 있는 곳에 큰 그물을 내릴 수도 있고, 얕은 여울에 특정한 고기가 모이는 곳에서 생명을 낚을 수도 있습니다. 일견 종교에 무심해 보이고, 일견 세속화되어 보이는 그들의 마음은 갈급하게 무언가를 찾아서 방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도 전반적인 교회의 다운사이징을 원합니다. 큰 교회는 교인들의 가려운 부분을 알기 힘들고 다중이 가는 길에 맞추어 오라고 이야기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광야에서 거대한 무리를 모아놓고 외치는 포효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거대 교회의 막강한 능력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상의 게릴라성 운동이 주효할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시도와 다양한 모색이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도의 수가 아니라 생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운동이 진정으로 벌어진다면, 목마른 사람들은 많이 있지 않을까요. 한편으로 풍요로우면서도, 참 갈증이 많은 시대입니다.

하얀모래 : 교회 내에는 시어머니 역할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상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끌어주는 사람보다 하는 일에 사사건건 간섭을 하는 사람은 어찌 그런 많은지 모릅니다. 청년들의 모습을 수용하려고 하기 보다는 제동을 거는 편이 많습니다. 청년부는 보통 젊은 교역자를 담당하는데 교역자와 청년들 간의 문제 보다는 청년들의 활동에 교회의 담임목사나 장로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제동을 거는 경우가 무척 많습니다. 교회 내에서 담당교역자의 힘은 청년부회장의 힘보다 더 미약합니다. 사실 청년들의 경제력 또한 자체적인 회비로 여러 가지 행사를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청년부에 대한 교회의 예산지원은 초등부나 중고등부 등에 비하여 적습니다. 청년에 교회에 떠나지 않게 하는데 대해 세 가지 정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1)청년들의 자율적으로 활동을 하도록 많은 배려를 해주어야 합니다.(청년들이 교회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행사도 주관 할 수 있도록 교회에서 많은 기회를 주어야 됨)
2) 교회예산도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어야 합니다.(찬양단의 활동, 대외적인 청년프로그램참석, 해외선교지 방문 활동 등)
3) 신앙의 체계를 바로 세울 수 있도록 담당교역자에게 많은 권한을 주어서 교육을 시켜야만 합니다.(일시적인 열정으로 그치지 않고 신앙의 바탕의 확립해 꾸준히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청년의 때가 지나면 교회 떠나는 사람이 많음)

빚진자 : 청년부에 대해 이렇게 해봤는데 실패했다 혹은 성공했다고 말하면 각각의 고유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빠지기 때문에 매우 위험합니다. 저도 나름대로 실패와 성공을 경험했지만, 방법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김동호님은 별다른 소릴 안했지만, 전병욱님의 경우 실수를 했죠. 물론 기도를 촉발하며 뜨거운 열정을 불어넣었다는 것은 단순하지만 긍정적인 내용이므로 큰 실수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장점이 그냥 단점으로 치닫도록 열뜨게 할뿐 근본적인 해결점과는 거리가 있다는 느낌에서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이상적인 교회는 주어진 상황의 다양성에 따라 귀납적으로 고유한 모습을 형성해나가는 교회라고 봅니다. 21세기 교회는 그런 다양성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기 이식형 교회는 선교적 초기 요구에 따른 천편일률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즉, 누군가 지도하고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주고받는 유교적 관계의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한국에 잘 맞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이제는 그런 방식으로는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며, 기왕의 공동체조차도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한 아비의 한 가족로서 상부상조하는 진정한 형제 관계가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관계의 모양과 방식은 참여되는 형제들의 특성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능력과 상황에 무관하게 분명한 평등관계를 유지하는데 힘써 지켜야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상으로는 낮은 자가 오히려 높임을 받는 초보적인 원칙이 고수되어야할 것입니다. 교회가 품은 천국의 복음과 진리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회에서 형제관계의 회복에서 청년에 대한 고정관념의 극복은 매우 중요하게 구별되는 부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청년들은 경제력, 지적 사회적 능력, 안정성, 신앙적 성숙 등 모든 면에서 연장자들과는 상대적으로 차별화될 가능성을 가진 계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별화는 사회에서도 제법 만연되어 있지만, 오히려 최근에는 교회만큼 심하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일반 사회보다 청년들에 대한 평등한 형제관계(Brethrenship)를 분명하게 보장해줘야 합니다. 교회 안에 뿌리박은 장유유서․연공서열적이거나, 연조에 의존하는 잘못된 유교적 구조나, 경제적 사회적 능력에 비례하여 발언권을 갖는 맘몬주의, 자본 민주주의가 타파되지 않고는 청년들에게 어떤 관심도 얻기 어렵습니다.

청년들은 생각이나 말이 많고 시행착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자들을 직접 교화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청년들을 품기 위해서는 그들의 시행착오를 긍정적으로 수용해 줘야 합니다. 그런 폭을 일반사회보다도 수용하지 못해서는 교회가 외면당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룻강아지조차도 자기를 돌보는 자와 때리는 자를 잘 알아보는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청년에 대하여 겉으로 표시나지 않으면서도 적극적이고 의도적인 포용이 필요합니다. 공동체적 발언권의 존중, 의사결정의 지분제공, 목회적 역할의 분담 이런 것들이 내밀하게 보정되어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포용에 대해 겉으로 표나지 않아야함도 매우 중요해 보입니다. 약자들이 보이는 공통점은 자신의 약점에 대해서 매우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과도하게 자기 권리에 대해 과시적이거나 그러면서도 반대로 자기피해적인 박탈감에 빠질 위험도 있습니다. 이렇듯이 청년들의 연약함을 위해 헌신된 교회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청년에 대한 교회의 헌신은 모든 교회에 대한 필요조건이라기보다는 다양성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청년에 대하여 "헌신의 천국"을 누가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선택하여 주시는 능력이 아니고는 감당할 수 없음을 직시하고, 막연한 생각이나 일시적인 의욕만으로 함부로 청년들을 향해 달려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많은 교회가 청년들에 대하여 자신이 아무런 능력이나 비전이 없음을 정확히 발견하고 포기하기를 바랍니다.

청년에 대한 비전을 막연히 백화점식 "구색갖추기"로 채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감당치도 못할 일을 미숙한 믿음의 이름으로 대책 없는 쇼를 벌이는 교회들에 대해서 그 부작용들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느낍니다. 우리가 가진 죄의 본성이 낳는 것은 결국은 사망일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고는 청년들에 대해서 잘못된 행동들을 벌이는 일은 그러한 사망의 인과율을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김광진 : 대학 초년시절 제가 본격적으로 방황하게 된 계기중 하나가 바로 청년회 활동에 대한 장로님의 간섭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지금이나 그때나 많이 튀는 편입니다. 당시 제가 대학부 주보를 맡으면서 사설란을 만들었습니다. 이런저런 좋은 소리도 싫고, 가끔 쉰 소리도 싫었습니다. 시선이 곱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학생회에선 인기가 제법 괜찮았습니다. 근데 교회에 전자오르간을 들이는 것(20년전)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지요.

종탑아래 채송화가 피어있는 조그만 시골교회의 지붕이 갑바로 씌어있었어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행복했었고, 지금도 교회 부근의 빈민촌에선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습니다. 이런 논조…. 그리고 당시 연재 기사 중, 한국 교회사에서 대동강에서 불판 셔먼호에 타고 있던 선교사님이 권총으로 자신을 향해 덤벼들던 미개인 무리를 향해 총을 쏘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뭐 이런 얘기, 기독교사에 나오는 얘긴데…. 그 뒤 장로님 댁에 불려갔는데 불러 놓고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데요. 그래서 다음날 열 받아서 그만뒀습니다. 편집부원들이 눈물바다가 됐지만, 제가 줏대가 없긴 없나 봅니다. 그 뒤 자유롭게 여러 종파, 여러 교회를 순항할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진홍 : 느릿느릿 토론인지 알고 잠시 태만하였더니 어느새 글 올릴 기회가 사라졌습니다. 전번 토론 제목이 한국교회의 문제점으로 하였으면 저도 올라온 글들과 대체적으로 의견을 같이 하였을 터인데, 제목에 충실하여 의견을 드리다 분위기를 썰렁하게 하여 죄송합니다. 저는 교회도 비교적 오래 다니고 저희 교회에서 직분도 과분합니다만, 굳건한 신앙을 갖지 못하여 괴로울 때가 많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여 저를 버리시냐고"고 물으시는 장면에서 눈물이 나지만 저는 힘을 얻습니다. 그 위대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부인한데서도 위로를 얻습니다. 하물며 하찮은 제가 방황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요.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중의 한분께서 "목회자의 경우에도 신앙의 up down이 없다고 아니할 수 없다"는 솔직한 이야기를 해 주셔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주제와 빗나간 듯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한 것은, 많은 교우들이 신앙적으로 갈등하고 무겁게 가라앉았을 때가 종종 있을 터인데, 그 때 교회가 의무감 만으로만 가는 곳이 아니라 가서 반가운 사람들 보고 즐거운 친교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장소라면, 신앙적으로 위기를 맞거나 저조한 때가 오더라도, 그 때를 버티고 넘기에 많은 도움을 준다는 것을 제 경험으로 알 수 있었고 이 점에서 제 교회와 교우들에게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고리타분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신앙의 틀을 거부하기 쉬운 젊은이들은 신앙적인 갈등과 위기를 겪을 기회도 많을 터인데, 교회가 이들로 하여금 즐거운 곳, 가고 싶은 곳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젊은이들의 친교가 경우에 따라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신 분 눈에 차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러한 자유로운 분위기를 허용하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적인 모델로서 가져야 할 교회의 극히 지엽적인 한 단면만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박철 : 어제 오늘 토론 참가숫자는 적지만 토론의 질은 대단히 높군요. 김광진님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얀모래님은 실질적인 대안을 빚진자는 교회의 민주의식의 고양 등 대단히 심도 있는 토대를 또 이진홍님은 교회가 보다 친교(Koinonia)의 장을 확대해야 한다 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복사를 해서 원고의 양을 보았더니 그동안 30여분의 발언과 53회의 리플을 기록했고 원고지로 토론만 100장을 했습니다. 상당한 양입니다. 나중에 이걸 정리하려면 굉장히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시간을 갖고 기다리면서 계속적으로 토론을 전개하겠습니다.

구본선 : 저는 인천에서 3년간 부목사로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맡은 부서는 교육부였고 청년부는 직접 맡아서 지도했습니다. 당시 교회 청년부는 1, 2부로 나뉘어 예배를 드렸는데 나이 어린 청년부는 전도사님이, 나이 많은(25세 이상) 청년은 제가 가르쳤습니다. 우리 교회는 외형적으로는 전도사와 목사가 직접 청년부를 맡고 있기 때문에 겉으론 괜찮아 보였지만, 속 알맹이까지 좋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제가 2개 교구(약 300가정)를 맡고 있었고 그 외에도 교육부 전체를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년부에만 전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외에 새벽설교, 철야예배, 기타 사무까지 처리하다보면 청년부에 시간을 내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기분 좋은 추억이 있다면 청년부 예배 후 성경공부를 할 때 서로 서로 열심히 주장하고 토론하면서 말씀을 나누었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성경공부하면 목회자의 일방적인 전달로 끝나는데 우리 청년부 분위기는 상당히 자유로웠습니다.

제가 청년부를 지도하면서 느낀 점은 청년 전담 사역자는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청년 사역자라면 기도 열심히 하는 건 물론이고 어디가도 빠지지 않을 정도의 지적 교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청년들과 열심히 토론할 수 있습니다. 사실 청년들은 교회와도 있을 곳이 없고 얘기할 상대가 없습니다. 친구들끼리의 얘기는 그냥 서로의 사정을 나누는 것이고, 사역자들과의 만남은 어느 정도의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면 함께 커피마시며 애기할 상대가 없으니 무슨 재미로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그리고 교회엔 청년들이 쉴 공간이 없습니다. 수십억짜리 교회를 지으면서도 청년들을 배려해서 만든 공간이 없습니다. 청년들이 교회에 와서 즐거움을 느끼는 시간은 1년에 한 번 수련회갈 때 뿐이지요. 교회는 쉴 수 있고 얘기 할 수 있는 아주 편안한 곳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청년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불미스러운 사건들은 안 그래도 비판적인 청년들로 하여금 교회에 정 떨어지게 만듭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있을 때 상동교회 청년부가 폐지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건 교회 어른들(특히 선교사들)이 청년들의 순수한 애국심을 폭력배 정도로 무시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의식있는 청년들이 교회를 뛰쳐나갔고 결국엔 사회주의자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가 있던 당시에도 한국교회는 100만 구령 운동이나 벌이고 있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부터 한국 교회는 사회주의자들의 모진 비판과 극심한 이농 현상으로 인해서 급격한 숫적 감소를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매 년 30만면의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엄청 많은 안티 기독교 운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는 영적인 마인드와 분명한 사회, 역사의식으로 무장한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청년들이 발붙일 곳 없고, 본받을 것 없는 교회로 계속 남는다면 세상의 맛없는 소금덩어리가 되어 버림받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성인경 : 청년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신앙과 교육의 최선의 길입니다. 바쁜 공부와 일손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신앙의 가장 간절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들을 만나서 교제하고 성경적 인격을 배우는 것은 교육의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날이 갈수록 교회가 예배의 경건성(敬處性)은 잃어버리고 그 자리에 경직성과 경박성으로 대체되고 있는 현상입니다.

꽉 짜인 순서, 습관적 반복행위, 형식적 고백과 틀에 박힌 기도, 맥빠진 찬양, 전형적인 웅변적 설교 등이 경직성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아예 대화의 기회마저 단절되어 있는 행정상의 경직성은 여기서 차라리 언급을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시끄러운 음악, 무질서한 박수, 지루한 헌금 순서, 어울리지 않은 유머 등은 경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특히 청년들은 개교회의 경직성과 경박성을 참는데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근본 이유겠지만, 우선 분위기가 밝고 영적으로 충만하며 경건합니다. 경직되지 않으면서도 경박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설교가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고 재미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진리를 변질시키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설교합니다. 청년들이 자꾸 떠나는 교회의 설교는 청년들의 고민을 풀어줄만큼 지성적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슴이 찡하도록 감동적 이지도 못한 것이 특징입니다.

청소년들을 위해서라도 예배의 갱신은 시급합니다. 아름다운 전통은 계승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산만한 예배 순서, 장황한 헌금 시간, 무리한 성경 해석과 무미건조한 설교 등은 빨리 시정해야 할 것들입니다. 이에 대한여러 가지 대안도 많습니다. 어떤 교회는 한동안 인기 있었던 경배와 찬양, 찬양 예배, 선교 예배 등을 도입하여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는 요즈음 말썽이 되고 있는 빈야드 교회나 토론토 축복과 같이 치유와 방언, 웃음 등으로 예배에 생동감을 불어 넣으려고 애씁니다.

서구 교회에서는 간단한 드라마나 연주회를 설교의 주제에 맞게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또한 토크쇼와 같은 방법으로 메시지를 부담없이 전하기도 합니다.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둘러앉는 가족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예배 시간과 설교를 짧게 줄이기도 하고 아예 청년들만 모이는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모두가 일장일단이 있기 때문에 교회의 실정에 맞게 적용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현대 문화 속에 사는 청년들일수록 예배만큼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영적 분위기를 원합니다. 개신교를 떠나는 청년들이 천주교나 정교회의 장엄한 종교적 분위기에 호감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분위기 때문에 영적 실체가 살아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복잡한 현대 세상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의 영적 공허감과 갈증을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청년들의 문화적 혜택 욕구까지 충족시켜 주려고 무척 애쓰고 있는 것도 주시해야할 사항입니다.

서울에서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의 특징도 문화적 혜택이 다른 교회 청년들은 예수만 믿기에는 세상이 너희에 비해 많다는 것입니다. 시설이 편안하다든지 프로그램이 다양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구성원들 간의 교제와 소속감이 주는 사회적 이미지가 좋다는 것입니다.

빚진자 : 근본적으로 신앙의 전수가 안 되었다는 성인경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근본적으로 신앙전수를 위해서 모범과 공감이 필요하고 또 그것을 위해 예배 방식 등 여러 가지가 재고되어야 하겠죠. 저는 청년들에게는 다양성이 핵심이므로 일정하게 좋은 교회의 전형이 없어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박철목사님의 질문을 특정한 전형을 위한 질문으로 보지는 않고, 다양한 성공사례를 나누고 싶습니다.

제 경우에는 교회의 청년들에게 가능한 아무런 일도 시키지 않으려는 접근이 성공적인 경우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뜻에 따라 일하는 곳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은 모든 사람에게 항상 정당하지 않습니다. 특히, 청년들에 대해서 교회가 신앙의 전수를 도외시하고 그들의 젊음에 의지한 종교 노동력(?)으로 활용하게 되는 모습이 빈번합니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었고, 신앙의 전수를 위해서 일정한 조건이 만족될 때까지는 교회 안에서의 사역을 권고하지 않고 오히려 말리는 방식으로 도전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는 청년이 아닌 다른 계층의 구도자들에게도 동일한 의미를 가질 것이지만, 특히 청년들의 경우에 그런 오해가 심각하다고 보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면, 사역을 통해 배우도록 강권하는 방식은 신앙전수라는 교회의 본질을 그르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에게서는 특별히 충분한 신앙전수 혹은 제자화가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가 발전 할 때 까지는 종교적 사역에 나서도록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아직도 만연하고 있는 조급한 성장주의적 선교관이 교회의 질적인 저하를 야기합니다. 값싼 복음을 흘릴 것이 아니라, 교회가 신자를 받아들이는 일에 대한 엄격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불신자를 엄격히 규제하라는 뜻이 아니라, 한 형제를 받아들이는 일에 교회 공동체가 더 심각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한 아이를 입양하는 가족의 심정으로 중대한 결단을 갖지 않고는 함부로 형제를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우리 자녀들이 아버지의 뜻에 대한 바른 이해와 준비를 의미하므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현대 교회 안에 많은 구도자를 두고서도 오히려 함부로 기뻐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기뻐하시는지 잘 살펴봐야할 것입니다. 감당치 못할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붙잡아 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버둥거리거나,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리저리 '경영' 혹은 '선동'하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청년 한 명 한 명에 대해 천하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한 영혼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로 입양보다 더 신중해야 합니다. 때로는 어떤 청년에 대해서는 다른 교회로 안내하고, 더 적합한 다른 곳에서 잘 적응하도록 잘 달래고 교회들끼리도 서로 도와야할 것입니다.

잘못된 동기에서 여기저기 함부로 옮겨가는 청년들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냥 받아들이는 교회는 가출하려는 마음을 가진 아이들에게 한껏 가출을 조장해주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청년들뿐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교회가 정확한 이명과정을 취하는 노력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교회가 찾아온 청년들을 일하는 종교 노동력으로 보지 않고 자립하도록 그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양육하며 섬기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또한, 찾아온 청년들을 때로 잘 살펴본 후 혹은 처음부터 달래어 처음의 교회로 되돌려 보내든지, 적절한 다른 교회로 제대로 인도하되 자기 자식을 맡기는 심정을 가진 선한 목자들을 기대해 봅니다.

교회에 대하여 이런 말을 쏟아 놓는 마음이 아픕니다. 실은 제게 그런 면에서 깊은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픈 사람에게 의사와 병원이 필요하듯이 영혼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청년들이 많아지는 까닭으로 청년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경향이 심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교회가 그것까지도 책임져야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지 가족의 사랑이나 사회의 관심에서 외면당하고 있다고(주관적으로) 느끼고 있는 청년들에게는, 최소한 그들에게는 교회가 최후의 소망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광진 : 토론에 오르는 글들을 읽으며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참 세상을 진지하게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으시군요. 좀 더 성숙하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신산철 : 요즘 젊은이들에게 나타나는 공동화(空洞化) 현상 가운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있다면, 함께 부를 노래가 없고, 함께 흔들 수 있는 깃발이 없고, 함께 행동하고 펼칠만한 이념이 없고, 믿고 따를 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잃은 것을 또 하나 지적한다면, 삶을 나누는 방법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입시위주의 교육과 사지선다형의 문제풀이 방식 속에서 나온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감정이 전달될 수 없는 하이테크 문명이 가져다 준 문제라고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일종의 나르시즘적인 현상들은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개인의 편익을 중시하는 개인주의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삶을 나누며 살아가야 합니다. 진솔한 삶을 나눌 수 있는 열린 장이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 속에서 자기의 편익을 뒤로한 채 진솔한 삶들을 마음 열고 나눌 수 있는 장이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필요합니다.

진솔한 장은 여러 가지 형태로 꾸며질 수 있을 것인데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공동체의식에 있어서 자기 교회 중심으로만 펼쳐져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은사를 묻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공동체와는 분명하게 구별돼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맺어진 공동체로서의 특징을 충분히 살려야 하고 이를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은사를 발견케 하고, 발견된 은사들을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지역교회 주변의 필요한 곳에 따라 사역할 수 있는 장을 펼쳐 하나님나라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그 안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도록 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에 대한 거의 유일한 대안은 교회가 이들에게 얼마나 사랑과 관심을 쏟느냐 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시설의 확충이나 프로그램의 변화도 필요한 부분이지만, 무엇보다도 이 분야의 전문 사역자들을 길러내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현재 대부분의 교회에서 청년·대학부 지도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청년 대학부사역자의 전임 사역은 소수교회에 불과하고, 젊은이 사역의 전문사역 자도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부목사가 장년 사역과 혹은 행정 사역과 함께 병행하거나, 파트타임으로 교육전도사들이 교회의 다른 업무와 병행하며 담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둘째, 신학의 문제입니다. 지금의 신학교 교육은 일반 목회를 준비하는 과정으로 대부분의 교과 과목이 일반목회 중심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일반 목회를 젊은이의 사역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 목회와 젊은이 사역은 적지 않은 차이점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젊은이 사역을 위해서는 젊은이들과 호흡할 수 있는 사역의 내용이 있어야 하고 사역의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셋째, 젊은이 사역의 기간이 매우 짧다는 것입니다. 3년의 기간을 한 파트에서 사역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현실이고, 1년에서 2년의 사역기간으로 젊은이 파트의 사역을 마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역자가 자주 바뀌는 문제는 젊은이들에게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전심으로 사역자를 믿고 따르는 것을 약하게 하고, 공동체의 통일성도 약화시킵니다. 사역자들도 사역의 방향을 잡기 위해서 이곳저곳에서 행해지는 프로그램에 따라다니며 사역의 방향성을 잡아가지만, 방향성을 나름대로 잡고 사역을 시작하는 시기에는 젊은이 사역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넷째, 젊은이 파트를 사역하는 사역자들과 담임 목사와의 시각 차이를 들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문제는 교회의 재정, 장소적인 여건과 관계가 있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건널목이 있는 철길에서 가끔 사고가 나자 주민들이 철도청에 안전장치를 설치해 줄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철도청은 예산 부족으로 할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후 건널목에서 큰 사고가 있었습니다. 격분한 피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피해보상신청을 했습니다. 법원의 판결은 안전시설을 회피한 철도청에게 안전시설을 설치하는 자금보다 몇 십 배의 보상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실례는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우리의 속담을 기억하게 합니다. 지금 교회는 이 속담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은 교회 젊은이들을 위한 지도력의 투자와 교육의 투자가 과감하게 이루어져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투자가 있을 때, 요즘 젊은이들에게 나타나는 공동화 현상을 교회가 채워 줄 수 있을 것이고, 공동화 현상을 교회가 채워 줄 때 젊은이들은 교회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며, 떠난 젊은이들이 교회로 돌아 올 것입니다.

최인용 : 젊은이들과 기성세대가 한국교회가 신뢰를 주지 못하는 것은 설교의 위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왜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의 중심에 설교가 들어 있습니까? 그 핵심적인 이유는 사회는 급속도로 변천하고 발전해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지식의 양이 폭발적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는데 반해 교회의 설교는 매우 느리게 발전해 이에 심각하게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첨단을 걷는 엘리트 두뇌집단에 의해 움직여지고,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상과 문화가 지배하면서 원시적인 사상과 문화와 과학, 가치관은 철저히 도태되고 있는데, 교회의 설교는 첨단을 걷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설교가 되어 사회의 두꺼운 벽을 쪼개고 새롭게 하지 못한 채, 구습과 구태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젊은 세대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무능한 설교를 갱신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설교자들의 피눈물 나는 공부와 기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날 청년들의 방황은 어디에서 오는가? 교회의 설교자들은 청년들의 정신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사회, 정치적인 위기에 대응하는 설교를 할 때에는 사회 정치적인 배경을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하고, 사회를 계도할만한 바른 역사관을 무게 있게 가르쳐야 합니다. 시사주간지나 월간지 한두 권 읽지 않고 사회, 정치적인 위기에 대응하는 설교를 한다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가정 문제에 대한 설교를 할 때에는 가정문제에 대한 전문적인 논문이나 저서들을 철저하게 연구한 후에 설교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된 사람들의 사귐입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점차 형식화되고 제도화되면서 형제 공동체로서의 본질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교회의 문제는 점차 잘난 사람들의 배타적인 공동체로 변모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행정은 목사와 장로 전유물이 되었고 일반 평신도들, 청년들과 여성들은 근본적으로 소외되어 있습니다.

청년들의 의식은 교회의 행정과 방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교회는 장로로 대변되는 50대 후반에서 70대 세대의 정신, 그것도 잘사는 계층의 보수적 정신을 반영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전체 성도들을 향해 열려있지 못합니다. 이 폐쇄성은 많은 젊은 성도의 참여를 박탈하기 때문에 결국 젊은 계층의 이탈과 쇠퇴를 필연적으로 가져옵니다.

한국 교회는 모든 세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향해 열려있는 '열린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지역 사회 사람들을 향해서도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참된 친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참된 친교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하고, 작은모임의 활성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위기 중심에는 교회 학교의 위기가 존재합니다. 거의 모든 교회에 학생 수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왜 그럴까?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는 인구 감소가 원인이라고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의 경우와 중·고등부와 대학부의 경우는 무엇으로 설명 할 수 있을까요? 교회의 지도자들은 세상이 주는 고급문화와 교회 안에 존재하는 전근대적인 열등한 문화 사이의 심각한 격차에 유념해야 합니다. TV의 쇼프로그램이나 연예인이 중심이 된 야외 집회, 외국의 가수 초청 집회에서 광란에 가깝도록 열광하는 청소년들의 정서를 교회 지도자들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선교 초기의 문화와 정신에서 사회에 앞서가던 교회의 모습을 거의 상실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앞서가는 고급문화 속에서 살던 청소년들은 교회에 오면 교회의 전근대적인 문화 속에서 지루함과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것은 꼭 청소년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즐거움과 의미로 가득 찬 기독교 문화 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이 문화 형성의 모체로서의 기능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기독교적인 음악과 문학 등 예술을 발전시키고, 복음적인 예술로 청소년들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설교나 공과공부도 딱딱한 가르침만으로 일관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위기는 운명적이거나 필연적인 위기가 아닙니다. 한국 교회가 교회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무를 잘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닥친 위기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바른 교회관을 시급히 확립하고, 열린 교회, 참된 친교가 있는 교회, 세상과 역사에 대해 책임지는 교회, 설교가 살아 있는 교회, 기독교 문화가 왕성하게 자라나는 교회를 향해 부단히 전진해야 합니다.

박철 : 고맙습니다. 토론이 서로 얼굴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코멘트하는 형식으로 하다보니 전체적으로 맥이 이어지지 않는 느낌이 있습니다. 모두 깊이 있는 토론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낙화암 : 성인경님의 글을 거듭하여 읽었습니다. 특히 성인경님의 글 중에 "청년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신앙과 교육의 최선의 길입니다. 바쁜 공부와 일손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신앙의 가장 간절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들을 만나서 교제하고 성경적 인격을 배우는 것은 교육의 가장 좋은 기회"라는 글 읽으며 큰 아이를 어떻게 꼬드겨서 교회로 보낼까 생각중입니다. 큰아이가 지금 고3인지라 대입시 공부 때문에 몇 달 동안 나가지 못하고 있거든요. 튼튼히 뿌리내리지 못한 제 허약한 신앙 모범을 보이지 못한 제 책임이 큽니다. 좋은 토론의 장을 만들어주신 목사님과 귀한 글로 저를 깨우쳐주신 성인경님, 그리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하얀모래 : 최인영님의 글을 읽고 무척 공감했습니다. 비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하여 기독교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여론조사에서 첫번째가 "기독교인은 말은 좋으나 행동은 그렇지 못하다"였다고 합니다. 설교자의 설교 내용은 좋아도 설교자의 인격과 삶이 자신의 설교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설교자를 인간적으로 대해보지 않고 그의 삶의 모습을 모르고 설교를 들을 때는 정말 존경스런 마음을 가지고 설교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돌이켜보면서 말씀대로 살아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기간동안 설교자를 모습을 대하면서 설교자의 인격과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것을 알았 을때는 강단에서 부르짖는 설교가 얼마나 허황되게 들리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설교를 자신에게는 적용시키지 않고 듣는 성도들만 적용하라고 하는 설교는 그냥 좋은 말일 뿐입니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는 전문가를 인정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목사와 장로 등 신앙의 연조를 기준으로 합니다. 신앙의 연륜이 오래된 사람이 최고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을 보면 다양한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일을 하는데 그 사람이 그 일에 가장 전문가로서 적임자일지라도 그 사람이 신앙의 연륜이 낮다면 그 사람을 참가시키지 않습니다. 설령 참가시켰다 하드라도 그 사람에 큰 역할을 맡기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 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신앙의 경력이 적을지라도 그 사람이 쌓아온 경력과 실력을 인정해주고 존중해서 교회 내에서 그 사람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학교의 교육도 천편일률적입니다. 부교역자가 인도하는 예배, 그리고 교사를 통한 공과공부 등입니다. 주일날 교회학교는 교회당내에서만 교육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교육도 다양성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당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으로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주일날 교회당이 아닌 곳에서 행사를 가지는 것을 용납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전교인이 주일날 운동장에서 예배를 드리고 체육행사를 하는 것과 자연에서 야외예배를 드리는 것은 주일성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일날에는 교회당에서 하는 모든 것 외에는 옳지 못하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교회모임이 어디에 가서 현지에서 예배를 드리고 모임을 가지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저는 꼭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는 경직된 자세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봅니다.

빚진자 : 한 가지 저로서는 약간의 실험을 진행 중입니다. 아이들에게 신앙을 전한다는 핑계로, 아이들의 신앙적인 선택에 과도하게 개입한 권위적인 잘못은 없었는가를 반성하는 중입니다. 사춘기는 정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고 스스로의 책임 하에 고민하도록 허용해야하는 시기인데, 한국은 유교적인 분위기가 아직도 그런 것을 압제하는 형편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20세가 되기 전에 진정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기회가 줄어들거나 외면, 무시당하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상당수의 청년들이 그런 기본적인 고민에서 소외 혹은 외면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진지하게 신을 찾아볼 기회 자체가 적고 멀어진 것입니다. 일찍 고민하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교회가 진정으로 신앙고백을 가진 형제로서의 청년들을 기대한다면, 유년중고등부에 대한 보다 전향적인 자유와 존중을 제공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보다는 미리 제때 인생에 대해서 정상적으로 고민하게하자는 것입니다. 욕심 부리며 기성세대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기만을 바라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도 고민할 기회를 누려야하고, 방황하거나 실패할 기회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더욱 전향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로서는 진정한 교회가 구축되기 위해서는 과거와 같은 그런 청년부의 융성을 되살리고 싶지 않습니다. 거품이 많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정상적인 복음으로 생명과 진리를 유지하는 것으로 충분한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과연, 이제는 "청년부를 포기하자"는 것입니다.

청년들을 위해서 복음을 변질시키거나 과도히 세상적인 방법에 관심을 두는 것은 주객을 전도시킨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복음의 진리로 하여금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우리를 회복하게 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청년부가 없는 교회가 나올는지는 모르겠으나, 청년부의 회복을 위해서 진리를 변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아비집에서 둘째아들이 스스로 나가는 것을 아비는 억지로 막지 않았습니다.

텅빈 둘째아들의 자리가 가슴 아픈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억지로 불러들이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아들이 집을 나갔다고 쓸데없이 허둥거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둘째아들이 허랑방탕하여 비로소 아비집이 생각나서 돌아올 때까지 있던 자리를 정확히 준비하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만큼 현대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므로 과도히 환원적인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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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토론은 박철 목사가 운영하는 느릿느릿이야기(slowslow.org)에서 2003년 7월 5일부터 12일까지 온라인상에 있었던 것입니다. 정리를 해서 발표하려고 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토론회중 보내주신 자료와 함께 두 차례 더 실을 예정입니다.

박철  pakchol@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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