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친애하는 하성해 선교사님, 그간 안녕하시지요? 소식이 늦어졌습니다. 염려 덕분에 건강은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지난 주에 흉부외과에서 진찰을 했습니다. 폐에 공기도 다 빠지고, 골절된 갈비뼈들도 잘 붙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군요. 이제 목발에 의지하여 조금씩 외출을 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선교사님은 만사를 제쳐놓고 저에게 달려오셔서 통역을 비롯한 여러 당면문제들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제 아내와 함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기도와 성금(誠金)으로 제가 당한 고난에 동참해주신 오야마 레이지 목사님를 비롯한 일본복음교회협의회(JEA) 소속 목사님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드립니다. 금번 일본 자전거 여행을 하는 동안, 국경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대(solidarity)를 보여주신 일본교회와 신도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여행기간 동안 제가 경험했던 바를 간단하게나마 글로 보답해 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되어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몸의 통증이 계속되어 감사의 글을 쓸 수 없었습니다. 이제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통증도 완화되었습니다. 늦었지만 직접간접으로 성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2)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국가 외교적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할 많은 갈등과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어르신들의 문제를 비롯하여 독도 영유권(領有權) 분쟁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국과 일본이 갈등과 대결 국면이 아니라, 상호 협력과 연대(連帶)의 차원에서 당면 문제들을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해야 하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데서 두 나라는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일본과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975년 10월 19일 새벽, 저는 당시 중앙정보부원(KCIA)에 의해 구금 영장(令狀) 없이 불법으로 납치되었습니다. 서울 남산에 위치한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가 온갖 신체적 고문을 당하며 취조를 받았습니다. 한 달 동안 계속된 고문 후유증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되었고, 평생 허리 통증으로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1972년은 유신독재정권 시절이었습니다. 대학생 시절 나라의 복음화(Evangelization)와 민주화(democratization) 사이에서 어느 인생길을 택할 것인가 고민하던 중, 저는 복음화와 민주화는 결코 둘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선택한 것이 당시 민주화에 앞장섰던 한국신학대학이었습니다.

1974년 대학원 시절이었어요. 재일동포 학생이 유학을 왔어요. 같은 기숙사에 있으면서, 그로부터 간간히 재일동포들의 실상(實狀)을 듣게 되었는데요.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정체성(正體性) 혼란을 겪으며 일종의 경계인(境界人)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재일동포들의 어려운 처지에 대해  공감했습니다. 일본 강점기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던 동포들과 그 후손들의 불행한 인생에 대하여, 나도 같은 민족의 한 사람으로써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가 낯선 고국생활에 잘 적응하고 한국인으로써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도록 힘이 닿는데 까지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1975년 11월 중앙정보부는 소위 “재일동포유학생 학원간첩단 사건”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대학들에 와서 공부하고 있던 재일동포 유학생 20여명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침투된 간첩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반정부 학생시위를 배후조종하여 한국사회의 공산화를 획책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중앙정보부(KCIA)는 저를 이 사건에 연루시켰어요. 한신대학에 침투된 재일동포 북괴공작원에 포섭되어 당시 반정부 학생시위를 배후조종했다는 혐의였습니다. 1심 재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았지요. 대전과 대구교도소에서 복역(服役)하다가, 1540일 만에 석방되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어 재판을 다시 받았기 때문이었지요. 석방된 후에도 나는 정보기관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어요. 평생 동안 국가정보기관의 감시 속에서 창살 없는 감방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학창시절 재일동포 유학생에게 베풀었던 선의(善意)가 나에게 재앙이 되어 평생 동안 내 삶을 짓밟았던 것입니다. 나 개인의 인생은 말할 것도 없고요, 단란했던 우리 가족은 간첩가족으로 몰려 한 순간에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지요. 친척, 친지, 사회, 심지어 교회공동체로부터 우리가족은 백안시당했던 것입니다.

지난 해(2016년) 저는 당시에 부당한 판결을 내렸던 국가를 상대로 재심(再審)을 신청했습니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국가권력기관에 의해 희생당한 저와 같은 국민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불의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2017년 3월 30일, 대법원은 저에게 무죄(無罪)판결을 내렸습니다. 사전(事前) 영장 없이 불법적으로 구금된 상태에서 꾸며진 조서(調書)는 법적 효력이 없다고 했어요. 제가 간첩누명을 벗게 된 것은 실로 40년 만이었습니다. 체포 당시 26살의 청년이었는데요, 지금은 71살의 백발노인이 되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살아있는 분단사회에서 간첩누명을 쓰고 평생을 살아야 했던 40년 인고(忍苦)의 세월에 대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3)

저에게는 또 한 가지 일본과의 인연이 있습니다. 부산 경성(慶星)대학교 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할 때였습니다. 2009년도 안식년을 맞이하여 후쿠오카의 서남학원대학(西南學院大學)에 교환교수로 갔던 적이 있는데요. 한국 문화와 신학을 강의하면서, 일본의 지성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어요.

비록 지리적으로는 이웃해있지만, 마음으로는 멀게 느껴진 것이 일본이었습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유럽의 사상과 학문을 습득하는데 오랜 시간을 투자했지요. 허나 인접해 있는 일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습니다. 일본 강점기(1905-1945)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었습니다.

A.D. 7세기 한반도 역사를 다시 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요. A,D,663년 왜(倭)는 4만2천명의 원군(援軍)을 백제에 파송하는데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백촌강(지금의 금강 하류인 군산 앞바다)전투에서, 백제-왜 연합군은 신라-당 연합군에 의해 패하고 말지요.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있을 수 없지만, 만약 백촌강 전투에서 백제-왜 연합군이 승리하고 백제에 의해서 한반도가 통일되었다면, 한반도 정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한일 관계는 지금과 현저히 다른 양태를 보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패전 후, 대규모 백제 유민(流民)들이 왜(倭)로 건너갔습니다. 그들은 국권회복의 꿈을 버리지 않았지요. 후쿠오카 체류 시에 저는 몇 차례에 걸쳐 큐슈의 다자이후를 답사(踏査)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쌓은 백제 성(城)터가 남아있지요.

(4)

2016년, 한 해만해도 현해탄을 넘나든 두 나라 국민 숫자가 8백만명이 넘습니다. 매 해에 수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도쿄 돔을 찾아 열광하고, 일본에서의 한류 붐과 <겨울연가>의 촬영지 남이섬을 찾는 일본 여성들의 숫자가 해마다 줄을 잇고 있습니다. 한국에게 일본은 중국, 미국에 이어 세 번째 무역상대국이기도 하지요.

이게 한일관계의 현재 모습인데요. 여전히 과거 역사에 발목이 잡혀 갈등이 계속된다면, 두 나라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합리적인 차원에서 해결책을 모색하고 과거를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야 합니다.

한일 간의 새로운 미래는 보편적 휴머니즘 가치를 우선시하는 시민사회운동 차원에서 모색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특히 용서와 화해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하는데요.

(5)

기독교는 역사적 실존인물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출발합니다. 허나, 현금(現今) 기독교는 복음의 본질을 십자가에 한정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울의 책임이 큰데요.

“...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고전2:2)
“... 육에 따른(kata sarka) 그리스도는 더 이상 알지 않겠습니다.”(고후5:16)
“...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과 ...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과”(고전15:3-4)

바울에게는 복음과 구원의 잣대는 십자가입니다. 3년에 걸친 예수의 공적(公的)인 삶과 가르침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어요. 루터의 칭의론(稱義論)을 신앙 유산으로 삼고 있는 한국 개신교의 선교 내용도 마찬가지였어요. 십자가 구원이지요. 루터와 한국교회는 십자가의 의미를 단지 “우리 죄를 위한(hyper ton hamartion hemon)” 대속(代贖)사건에서 찾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역사적 뿌리를 잘라낸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3년 동안 펼친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야말로 십자가의 역사적 뿌리에 해당하지요. 예수 운동이 식민통치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였기에, 로마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것이지요.

(6)

기독교 경전에는 구약과 신약이 있는데요. 우리가 구약성경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어 성경은 원래 랍비유대교의 경전입니다. 배타적인 유대민족주의 색채가 짙게 배어있지요. 유대 선민의식이 대표적입니다. 보편적 인류애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기록한 책입니다. 예수는 비록 유대인이었지만, 유대 민족주의 경계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복음의 핵심으로 설파했지요.

신약성경은 4개의 복음서와 23개 서신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복음서가 예수의 공적(公的) 삶과 말씀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면, 서신은 제자들의 선교 역사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바울 이름으로 쓰여 진 편지가 13편인데요, 초기기독교 세계에서 바울의 비중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주고 있지요.

복음서는 공관복음서(the synoptic Gospel)와 제4복음서(the fourth Gospel)로 분류되는데요. 마태, 마가, 루가복음은 예수의 공적(公的)인 삶과 가르침을 소개하는 방식이 엇비슷한데요, 그래서 부쳐진 이름이지요.

공관복음서를 읽다보면, 중복(重複)되는 예수말씀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요.  왜 그런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복음서 기록자들이 사전(事前)에 예수말씀에 관한 공통자료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말씀을 일컬어 큐(Q)라고 부릅니다. 예수말씀의 원천(Quelle)이라는 독일어에서 유래한 개념이지요. 큐(Q) 그대로 예수 육성(肉聲)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가장 근접한 것임에는 틀림없지요.

큐(Q)는 대략 50년경에 완결된 것으로 보입니다. 큐(Q)와 마가복음(A.D. 70년)을 뼈대로, 1세기 말에 마태복음과 루가복음이 쓰여 집니다. 큐(Q)는 현재 독립된 문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분실된 복음서(the lost Gospel)입니다. 마태복음과 루가복음에 있는 중복된 예수말씀들을 추출하여 큐(Q)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는데요. 대략 200절 가량 됩니다. 마가복음의 1/3 분량이지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를 산상설교라고 부르지요. 예수께서 산위에서 무리를 모아놓고 설법(說法)하신 내용인데요. 대부분이 큐(Q)의 예수말씀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주기도문이 대표적입니다.(마6:9-13Q)

주기도문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땅 위에 하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늘 뜻을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이 무엇인가요? 나눔과 용서입니다. 하루 끼니가 없는 가난한 이웃과 나눔을 통해서, 그리고 갈등을 빚고 있는 이웃을 용서함으로써 둘이 하나가 되어 하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눔으로써 빈곤에서 해방되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는 다는 것이 큐(Q)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용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시에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자리이타적(自利利他的) 행위이지요. 용서를 통해 미움과 증오로부터 해방될 때, 우리는 구원의 궁극상태인 하나님의 용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큐(Q)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용서는 희생자들에게 주어진 신적(神的) 특권이요, 예수를 따르는 길(道)이지요. 왜 그런가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희생자들과 더불어 사셨고, 희생자의 한 사람으로 죽으셨기 때문이지요.

큐(Q)의 예수는 하느님 모심(敬天)과 이웃사랑(愛人)을 모든 인간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될 최상(最上)의 계명으로 선언했어요.(마22:34-40Q; 참조 막12:28-31)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나눔과 용서 없이 사랑을 논할 수 없지요. 나눔을 통해서 가난한 이웃과 하나가 되고, 용서를 통하여 갈등을 빚고 있는 이웃과 하나 되지요.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은 경천애인(敬天愛人)에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마5:44)는 큐(Q) 예수의 말씀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김명수  kmsi12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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