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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닌데?(누가복음 11:45-49)나를 돌아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 되기
이성훈 | 승인 2018.02.04 23:45

오늘 예수님 당시 유대교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전체적인 내용, 11장 37-54절의 말씀은 마태복음 23장 1-36절의 말씀과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두 본문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하면,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과 무리들을 향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판하는 말씀을 하고 계시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그와 그 자리에 함께한 율법교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45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렇기에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에서와 같이 율법교사가 반문하는 장면도 나타납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반문하였기 때문에 이야기의 전반부가 바리새인에 대한 질타였다면, 후반부는 율법교사에 대한 질타로 바뀌게 됩니다. 마태와 누가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 기록되었고, 각자의 삶의 자리가 달랐기 때문에 약간의 차이점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집중하고 있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교파

먼저 어느 정도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예수님 당시에 존재했던 유대교 파벌, 혹은 교파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우리가 잘 아는 집단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입니다. 여기에 엣세네파라고 광야 공동체도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엣세네파에 대한 이름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간단하게 셋을 구분하자면, 사두개인, 사두개파는 성전을 가장 중요시하는 집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고 그렇기에 성전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렇기에 AD70년 경, 유대-로마 전쟁이라고 불리는, 로마에 의한 유대 침공이 있었을 때, 사두개인들은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웠고 결국 모두 전멸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보다 사두개인들의 비중이 약한 이유는,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 이미 사두개인은 사라졌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성전보다는 율법을 중요시하는 집단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두 번이나 붕괴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세웠던 제1성전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붕괴되었고, 페르시아 포로 이후 스룹바벨이 세운 제2성전은 로마에 의해 붕괴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존재했던 성전은 헤롯이 세운 제3성전입니다. 이렇게 성전의 붕괴를 체험하다보니 당연한 수순으로 성전의 중요성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되었고, 성전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율법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긴 파벌이 생겨난 것입니다. 거기에 지리적으로 성전에 가깝지 않은 곳에서는 당연히 성전보다 율법을 중요시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을 전하는 역할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교세를 생각해 봤을 때, 바리새인은 전국에 퍼져있는 회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사두개인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바리새파의 교세가 당연히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서에 사두개인보다는 바리새인에 대한 질타가 더 많이 나타나는 이유 중에 이러한 이유도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엣세네파는 광야에 은둔하면서 정결한 삶을 살려고 했던 사람들인데, 학자들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엣세네파에서 율법을 배웠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곳을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엣세네파는 개인 구원에 집중했기 때문에 자신 이외의 남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웠던 불교로 빗대어 이야기하자면, 자신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소승불교가 엣세네파이고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은 대중의 깨달음이 중요하다고 여기고 이곳을 뛰쳐나와 대승불교식으로 가르침을 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 교파가 있고, 거기에 젤롯당, 혹은 열심당이 있습니다. 젤롯당은 하나의 교파는 아니고 앞서 이야기한 세 교파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전쟁에 찬성하는 사람들,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젤롯당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과거 자료를 보면, 바리새인 중에서도 절반은 젤롯당이고 절반은 아니라고 되어 있는 걸 보면, 젤롯당이라는 것은 사실 실체가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름 붙여진 교파라고 보아도 무관할 듯합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생각해 보자면, 한동안 사드 배치 문제에 대해서 각 정당이 취한 입장은 정당별로 달랐지만, 그렇다고 당내에서 모든 의원들이 동일한 주장을 한 것도 아닙니다. 이 중에 어떤 정당이냐를 떠나서 ‘전쟁에 대비해서 우리도 안보력을 강화해야 한다.’ 라는 입장을 취한 사람들을 젤롯당이라고 볼 수 있고, ‘전쟁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젤롯당이 아니라고 보시면 됩니다.

바리새인

이 중에서 바리새인은 율법을 중시하고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유대교에는 경전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이라고 부르는 토라, 그리고 복음서에서는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부르는 책으로, 법의 해석을 담고 있는 ‘미쉬나’, 이러한 법을 현실적 상황에 맞게 풀어주고 있는 ‘탈무드’가 있습니다.

▲ 제임스 티소의 작품. ‘함께 음모를 꾸미는 바리새인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이는 사형에 처한다.’는 율법을 목숨처럼 모시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예수는 이단이었다.

우리는 탈무드가 유대인의 이야기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탈무드는 유대인의 경전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후대로 오면서 이 세 가지에 주석을 달아놓은 ‘미드라쉬’도 있고 한데,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경전은 과거에 완성되고 고정된 책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1세기까지 자신들의 고정된 경전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 현재의 상황에 맞게 다시 해석한 것들도 모두 경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보면 계속해서 성경을 써내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바리새인들 중에서 조금 구분을 하자면, 복음서에 종종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서기관도 있고 율법교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냥 싸잡아서 바리새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바리새인들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서기관은 이름만 봐도 뭔가를 쓰는 사람들 같은데, 입으로 전해지는 율법을 기록하는 사람들입니다. 요즘도 교회에서 종종 성경 필사하는 일을 하지만, 당시에도 성경은 끊임없이 필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던 사람들이 서기관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필사하는 서기관들이 등급이 올라가면 율법교사가 되는 것인데, 이들은 단순하게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연구하고 이에 대해서 토론하고 현재적으로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지를 판단해서 새로운 경전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상당한 엘리트들이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고, 실상 이스라엘 사회를 움직여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도 무관할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법에 대해서 내려놓은 해석이 현재의 법 해석이 되는 것이고 그것에 따라서 모든 판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법을 만들어내는 입법부인 국회와 법을 집행하는 사법부인 법원이 하나로 합쳐져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도 정확하게 사법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 국회보다 조금 더 힘이 쎈 입법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율법교사라는 사람들은 결국 우리나라 국회의원 급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교사들의 이의 제기

그런 율법교사들이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질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겉은 깨끗한 척 하지만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구제를 상당히 많이 강조하기 때문에 그들을 향해 구제를 하라고 명하십니다.

또 바리새인을 향해 물질적 십일조는 드리지만 공의와 사랑은 없다고 훈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훈계를 하시자 율법교사들이 발끈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즉 “바리새인들을 그런 식으로 싸잡아서 질책하시면, 우리도 바리새인에 속해있는데, 우리도 그렇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런 등급이 낮은 바리새인들과는 다릅니다.“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예수님께 던진 반박의 말은 “우리도 바리새인들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난 아닌데요?”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너도 그런데?’ 가 아니라 “너희에게는 오히려 더욱 큰 잘못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해석했다고 내놓은 것들은 결국 과거 선지자들을 한 번 더 죽게 만드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을 율법이라는 테두리 속에, 수없이 무겁기 만한 율법의 테두리 속에 가둬놓고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질책하십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천국을 향한 지식의 열쇠를 갖고 있지만 자신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서있다고 질책하십니다. 율법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린 그 죄를 율법교사들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우습게도 과거 카톨릭은 이러한 율법교사들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지금도 어떤 교회들은 성도님들 모두를 죄인으로 만들어놓고 죄를 벗기 위해서 면죄부를 사라며 면죄부 장사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이들과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는 이 말씀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무거운 율법의 짐으로부터 모든 이들을 가볍게 해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서 ‘회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수많은 율법 조항들에 비해 매우 가벼운 짐으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다시 본론의 말씀으로 돌아와서, 당시 권세가 높았던, 대단한 위치에 있었던 율법교사들은 예수님의 훈계를 들으면서 ‘난 아닌데’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난 저거 다 제대로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문제군’ 하며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난 정말 다 올바르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또, 나는 그렇지 않다는 판단은 자기 스스로가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 자신에게 상당히 혹독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만은 관대하게 대합니다. 남이 이 행동을 했을 때는 못된 사람, 나쁜 사람 취급하지만, 막상 내가 그 행동을 했을 때는 꼭 이유가 있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요즘에 많이 쓰이는 말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로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요즘 제가 아이를 키우면서 초등학생이 된 아이를 많이 야단치고 있습니다. 애를 때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심하게 혼내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주변 분들은 다들 애 좀 야단치지 말라고, 사랑으로 보듬어주고 좋은 이야기로 설득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막상 애를 키우다보면,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너무 까부니까 혼낼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저 역시도 아이를 혼내는 일에 대해서 부정적인 면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야단치는 일이 그다지 좋은 훈육 방법이 아니라는 학자들의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또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 때문에 아이를 혼내고 야단치게 됩니다. 만약에 제가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면, 저는 남들이 자기 아이를 혼내는 것을 보면, 그것에 대해서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 동네에서 애들 혼내고 있는 아줌마나 아저씨들을 보면, ‘저 집은 아주 애를 잡는구만.’ 이런 생각이 먼저 들게 됩니다. 나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난 아닌데’ 하는 생각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 모든 과정을 무너뜨리는 생각입니다. 성경을 읽으시며 우리는 ‘난 이렇지 않은데,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참 못된 사람들이네’라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오히려 나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을까 되돌아보고, 또 있다면 반성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질타를 넘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음성, 변화되어 구원받고 복의 길로 들어오길 원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나는 아닌데 남들이 잘못되었다는 신앙은 버리시고, 겸손히 주님 앞에 나와서 내 잘못을 들여다보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때에 여러분의 참된 마음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여러분의 무거운 짐들 모두 가볍게 해주시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줄 믿고 그렇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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