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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oo와 #BibleToo(호 2:14-20; 고후 3:1-6; 막 2:13-22)성서에 나타난 여성폭력과 남성우월
조헌정 | 승인 2018.02.06 22:50

여러분이 모두 잘 알다시피 지금 남한 사회는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사건 폭로 이후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 사회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현역 여성 국회의원 또한 젊은 시절 로펌 대표로부터 당해야 했던 성추행, 전 성균관대 여성 강사에 대한 교수의 추행 고발 심지어는 아시아나 항공사 사장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스튜어디스들의 고발에 이르기까지 예전 같으면 피해자들이 고발을 해도 언론에서 다루지 않을 일들이 계속 폭로가 되고 있습니다. 이 미투 파장이 얼마만큼 더 넓게 그리고 더 깊게 퍼져나갈지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 이런 일들을 바라보면서 진보 인사들 가운데 한 두 분이 페북에 이와 관련해서 자신의 소회(素懷)를 담은 회개형의 짧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저 또한 목사 신분이 아닌 한 남성으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을 돌이켜 볼 때, 누군가가 나를 #MeToo로 고발할 일은 없다고 생각되지만, 예수의 말씀처럼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간음을 저지른 것이다.”라는 잣대로 본다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차별/성추행/성폭행은 너무나도 만연된 일이며 이는 인류 역사의 너무나 뿌리 깊게 박혀온 적폐 중의 적폐라고 하겠습니다.

지금 인류문명의 위기를 개인적 차원에서 접근할 때는 ‘돈집착’과 ‘성도착’이 문제라고 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인간 행동의 기반을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로 보았는데, 현대에 이르러 그의 이론이 많은 비판을 받긴 했지만, 계속 커져가는 성범죄현상들을 보면 타당한 일면이 많습니다.

남한사회의 타락

소위 말하는 선진국은 양성평등 법조항에 있어서는 그 차별이 많이 깨어져나갔지만, 지금도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의 일부다처제, 여성할례가 시행되고 있고, 심지어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운전 금지가 풀린 게 불과 몇 달 전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더 웃기는 일은 그러면 여성이 운전면허 시험을 위해 공공기관에 가야 하는데, 이때 여성 혼자서 가는 것은 법으로 금지가 되어 있어서 나이든 엄마가 열 살 정도의 아들을 데리고 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직도 이런 사회가 존재한다는 게 우습긴 합니다만, 이게 성평등 현실입니다. 그리고 성폭행 관련 법조항이 있다 하더라도 실제 피해자가 고소고발을 해도 처벌을 당하는 경우는 절반정도에 불과하고 그것도 피해자가 원하는 정도에는 심히 미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제가 보기에 가장 큰 원인은 남성판사들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아미엥 대성당의 부조, <아내 호멜을 되사오는 호세아>

2주 전 미국에서 획기적인 재판이 있었습니다. 54세의 미국 체조 대표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가 삼십년에 걸쳐 의료행위라는 미명하에 어린 체조소녀들에게 성폭행과 성추행을 하여 왔는데, 로즈마리 아킬리나 여성판사는 그에게 이례적으로 징역 175년형을 선고하였고 이 판결 장면을 장시간동안 미국의 주요 TV가 생중계를 했습니다. 그에 관한 고소는 이미 오래 전에 있었는데, 최근에서 그에 관한 조사가 시작되었고 이례적인 판결이 이루어진 것은 작년부터 일기 시작한 미투의 영향이 크다고 보겠습니다.

저도 지난 30년 동안 담임목사로서 교인간의 성추행 사건에 몇 번 관련한 적이 있습니다. 본래 알고 지내던 사람끼리의 성추행/폭행 사건은 법적/윤리적 판단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만, 판결이 보다 엄하게 내려져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를 합니다.

여성에 비하면 남성들끼리의 성관련 판단의 잣대는 굉장히 낮습니다. 예를 들면 70년대 박정희독재를 비판할 때에도 야당 남성정치인들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허리 아래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정치인의 도리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젊은 여성들과 연예인들을 술자리/잠자리에 끌어들여 개인의 삶은 물론 이로 인해 가정 파괴도 여러 건 일어났습니다. 박정희는 이런 일을 전담하는 공직까지 두었던 거지요. 완전히 미친놈이었는데, 이 사실을 알면서도 당시 남성들은 여기에 관련해서는 뒷얘기만 했지 공개적인 비난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도 당시에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 동조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회개합니다.

서지현 검사가 단 둘이 있을 때 성추행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장례식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태근 검사에게서 추행을 당했는데, 그 자리에는 법무부 장관뿐만이 아니라 여러 검사들이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제재를 하지 않았던 것은 모두가 그를 조폭의 두목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고, 이후 그는 승승장구하여 검찰국장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후 돈봉투사건으로 물러나긴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검찰총창 내지는 법무부장관 그리고 나중에는 로펌 회장의 지위까지 보장받았을 사람입니다.

이는 이 남한 사회가 얼마나 썩어문드러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건입니다. 인간 삶의 가장 성스러운 장례식장의 자리에서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이는 그의 됨됨이가 인간 이하의 동물적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런 인간을 우리나라 많은 목사들이 모범교회로 쫓아가고 있는 온누리교회에서 세례를 주고 간증을 하도록 하고 이를 동영상으로 만들어 회개의 모범으로 삼았던 것인데, 이게 또 바로 오늘의 남한교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는 그의 성추행 사실을 몰랐다고 항의하지만, 여러 세례자 중 그를 택한 것은 결국 권력의 정상에 있었던 사람을 이용하여 종교권력을 키워나가겠다는 속셈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영상을 보고 서지현 검사가 더 분노를 느껴 오늘에 이르렀을 뿐더러 현재 서지현 검사가 근무하는 창녕지원의 부장판사가 이 인터뷰를 보고 자신의 딸을 생각하면서 이제는 나부터 이런 추행을 보게 되면 ‘당신 그게 무슨 짓입니까?’ 하고 비난을 하겠다고 하는 #MeFirst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늦긴 했지만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는 우선 우리나라 술 접대 문화가 바꿔져야 한다고 봅니다. 여성이 접대하는 은밀한 술집 소위 말하는 방석집을 근절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게 우리나라 대부분의 권력과 재벌의 비리가 거래되는 현장입니다. 처음에는 명함 건너면서 서로 젊잖게 호칭을 하다가, 술 한 잔 들어가면서 나이 따져 형님 동생으로 부르다가 이어 혈연/지연/학연 따져 ‘우리가 남인가’ 하면서 생사를 함께 하는 조폭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혈연 하나만 갖고도 사돈팔촌 따져 연관이 없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요? 우리도 한번 따져볼까요? 그리고 그 이후 몰려가는 노래방도 문제입니다. 노래부르기를 통해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동의하지만, 이게 또 성추행이 일어나는 또 하나의 은밀한 장소입니다. 이참에 남성방과 여성방을 따로 만드는 시행법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 외 러브호텔은 시골 구석구석까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도 전자시스템으로 운영하는 무인용으로 말입니다.

#MeToo 운동의 역사와 그 전개

작년 2017년 10월 15일 영화제작자 와인스타인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여성들의 얘기가 터져 나오자 알리사 밀라노라는 여배우가 #MeToo 운동을 제안했는데, 본래는 2006년 Tarana Burke라는 사회운동가에 의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가 이런 운동을 전개한 이유는 이름을 드러내기 어려운 어린 여성들을 포함한 약자들의 성폭행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가 이를 제안한 이후 #MeToo를 단 여성들이 약 천칠백만명에 달하고 있다고 하고 위키피디아에 보면 이와 관련한 여러나라의 사례가 적시되어 있는데, 남한은 ‘2018년 1월 30일에 시작되었다’라고 한 줄 기록만 있습니다. 이는 서지현 검사의 JTBC에서의 29일 인터뷰 시간이 미국에서는 30일 아침이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영화제작자 와인스타인이 30년 넘게 영화계를 좌지우지 하다 퇴출을 당했으며 이외에도 방송계, 연예계, 언론계, 정치계에 이 운동이 번지면서 많은 유명인사들이 자신의 하던 일로부터 퇴출을 당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제일 기분이 좋았던 것은 미국공화당 보수의 아성인 미시시피주 상원의원 보궐선거에서 이 #MeToo 고발 여파로 인해 가장 깨끗한 기독교인 척 하였던 법관 출신의 로이무어 공화당 후보가 떨어지고 근소한 차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일입니다.

그런데 트럼프에 대한 성추행 폭행 사건은 적어도 열 명 이상의 여성들이 계속 고발을 하여왔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법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있다는 게 너무나 슬픈 현실입니다. 재작년 후보 시절 저도 그가 오래 전에 방송인터뷰에서 직접 말하는 걸 들었는데, 두 명의 여성과 한 침대에서 놀았다는 얘기를 자랑스럽게 방송에서 하는 얘기를 듣고 이 친구는 ‘성도착 중증환자’이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설마하니 미국사람이 이런 친구를 대통령으로 뽑지는 않겠지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제가 깨닫는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돈집착’과 ‘성도착’ 환자로 가득 찬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을 #MeToo 그리고 #BibleToo로 한 것은 성서 안의 여성들의 한 맺힌 소리를 들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남성으로서 하는 것이기에 제한된 면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Inclusive Language(성평등용어)

저는 35년 전 뉴욕 유니온신학교 목회학석사과정에 입학을 하였는데, 그때 글을 쓸 때,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inclusive language(성평등용어) 였습니다. 한글에는 ‘그’라는 중성형 단어가 있습니다만, 영어에서 중성형 단어 ‘it’은 사람에게 쓸 수가 없는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남녀를 통칭하는 인칭대명사는 항상 남성형 ‘he’ 였습니다. 또 영어 단어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을 뜻하는 단어가 hu‘man’ being입니다. 역사라는 단어 또한 ‘hi’story입니다. 남성이 인류를 대표하고 남성들의 얘기가 역사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제가 글을 쓸 때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는 ‘he/she’라고 썼고, 특히 ‘God’을 ‘He’라고 표현하는 것은 피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을 표현하는 단어가 ‘handicap’ 혹은 ‘disable’이라는 단어인데, 이때에도 ‘otherly-abled person’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지금도 진보 목사님들 대부분이 아무 생각 없이 기도하거나 설교할 때, ‘하나님 아버지’ 그럽니다. 저는 그때 이후로 이 단어를 쓰지 않고 있지만, 제일 문제가 되는 부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로 시작하는 주기도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인도할 때는 ‘하느님 어버이’라고 부를 수가 있지만, 제가 직접 인도할 때는 이를 대놓고 한지는 향린교회 부임 이후입니다.

물론 논란의 소지는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아버지’라고 불렀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께서 사용하신 아람어 ‘abba’는 우리말로 하면 ‘아빠!’입니다. 이는 당시 제사장들이 야훼 하느님을 너무 신성시하여 하늘 저 멀리 계신 분으로 만들어 자기들을 통해야만 하느님과의 대화가 가능하다고 하는 ‘독점’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의미에서 ‘abba’라고 부른 것이지요. 이는 신의 ‘남성성’을 말하는 단어가 아니라 ‘친밀성’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인간이 하느님과 너무 친밀해서 문제인데, 지금 교회에서 ‘하느님 아버지’라는 호칭이 남성성으로 악용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주기도문 원문에는 ‘당신의 나라, 당신의 뜻’ 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전 번역에는 당신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뭐하니까 이 단어를 빼고 그냥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라고 했는데, 새번역성서를 출판하면서 원문에도 없는 아버지를 넣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룬 것 같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그런데 이건 하늘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물론 지금은 보수교단을 빼놓고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습니다만, 이는 성서학자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대형교회 목사들의 압력 때문입니다. 이게 성서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바꾸지 못한다고 소리치는 교계의 현실입니다.

하느님은 그냥 하느님이라고 해야지 이를 ‘하느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이게 무의식중에 작용을 해서 남성우월의식이 작동을 하고 그래서 ‘여성은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여성은 장로가 될 수 없다. 여성은 설교단에 오를 수 없다’는 등등의 잘못된 주장으로 변질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성서학에서 볼 때, 주기도문의 더 큰 문제는 주기도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양쪽에 다 있는데, 왜 마태복음 것만 사용하냐는 것입니다. 길이는 물론 내용상 차이가 있고, 마태가 ‘죄’라고 말하는 단어를 ‘빚’으로 말하는 등 본질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해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을, 다음 한해는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을 번갈아가며 사용하는 것이 공평한 방식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보수적인 교회이고 문자 그대로를 주장하는 목사라 하더라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한바 “여자들은 교회 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을 하지 마십시오. 율법에도 있듯이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 돌아가서 남편들에게 물어 보도록 하십시오, 여자가 교회 집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수치가 됩니다.”라는 이 구절을 그대로 주장하는 목사는 거의 없습니다.

여기에 근거해서 어떤 권사님이 공동의회에서 발언할 때 제지하는 목사는 없습니다. 더구나 디모데전서 2장에서는 여자는 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가르치는 것을 금했습니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만약에 여성들을 교회학교 선생에서 제외시킨다면 대부분의 교회학교들이 문을 닫아야 할 것입니다.

동성애를 반대할 때에도 흔히 제1성서(구약) 성서의 레위기에 있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면 같은 레위기에 있는 새김질하지 못하는 돼지고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가르쳐야 하고,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는 못 먹게 되어 있으니 갈치/오징어/낚지/문어/미꾸라지 먹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출산한 여성들에게는 남아를 출산하면 33일동안 그리고 여아를 출산하면 66일동안 교회에 출석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가르치면 별 이상한 교회 다 있네 하면서 교회를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성서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일점일획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하는 목사들 따지고 보면 자신에게 유리한 구절만 골라서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자기에게 유리한 구절만 선별해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방식이며 그렇게 하는 순간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BibleToo

그래서 저는 먼저 오늘의 #MeToo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BibleToo 운동을 생각하면서 성서에서부터 여성차별 시각을 벗겨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에 관련한 성서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고린도후서의 본문 말씀과 같이 문자적 의미를 벗어나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빛 아래에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하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을 때, 하와가 먼저 따먹고 이를 아담에게 주었다는 창세기의 구절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서 바울은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하와가 속아서 죄에 빠졌다.” 그러면서 모든 책임을 하와에게 돌리고 있는데, 부부간에 먹었으면 같이 먹은 것이지 그게 무슨 순서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아내가 무슨 행동을 했으면 무언중에 남편의 동의가 있었던 것이고, 더구나 하느님이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길 때, 혼자 결정했겠습니까? 바울이 결혼을 안 해봐서 ‘베게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갈> 아브라함의 두 번째 부인입니다. 첫 번째 부인 사라에게 아기가 없자 아기를 낳아주기 위해 결혼합니다. 물론 당시 여성들은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되었으니까 거부할 선택권도 없었겠지만.... 그리곤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기적적으로 아들 이삭을 낳습니다. 그래 장자권을 빼앗길 수 있기에 사라의 시기를 받아 집에서 쫓겨나 물도 없는 광야로 내몰립니다. 이 하갈을 하느님께서 보호하셨고, 이들은 오늘날 모슬렘신자들의 시조가 됩니다. 물론 꾸란에서는 달리 얘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삭이야 말로 정실의 자식이라고 하여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해서는 추호의 동정심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미국의 군사패권에 의해서 강도 만나 거리에서 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은 이슬람 국가들 특히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라조차도 없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문제입니다.

<드릴라> 삼손의 아내 블레셋 여인 드릴라 우리에게는 팝송 딜라일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삼손은 자신의 힘의 원천이 머리카락에 있다는 걸 간청에 못 이겨 말해주자 드릴라는 이를 블레셋 형제들에게 알려줌으로 힘을 잃게 되는데, 여기에서도 드릴라에게 책임을 씌웁니다. 비밀을 발설한 책임은 삼손에게 있는 것입니다. 블레셋 여인 드릴라에 대한 일방적 비난은 민족차별과 함께 여성혐오에 근거합니다.

<이세벨> 요한계시록에서도 악의 화신, 악녀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그런데 그녀는 본래 두로 왕의 딸로 다른 민족간의 평화협정의 희생물로 이스라엘 왕 아합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후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후 그가 섬겼던 바알과 아세라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김으로 인해 그 힘을 믿고 야훼의 선지자들을 박해하였고, 이후 엘리야와의 대결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결혼할 당시부터 남편 아합이 “당신네 신은 당신만 믿고 백성들에게는 전파하지 말라”고 한마디 했으면 끝났던 일인데, 남성 아합이 동의를 했고, 가장인 남성들이 앞장서서 이를 믿음으로 문제가 된 것입니다. 야훼 유일신 사상을 지키는 것과 한 이방 여성을 악마화 시킴으로 남성들이 저지른 잘못을 모두 전가하는 성서 이해는 잘못입니다.

<고멜> 오늘 호세야 본문에 나오는 예언자 호세아의 아내가 된 사람입니다만, 방탕한 여인의 대명사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그가 남편 호세아를 만나고 나서 방탕하게 된 것이 아니라 본래 바람기가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신을 따라가는 종교적인 음란죄를 저지르는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신적 사랑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하느님은 일부러 바람기 많은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도록 명령하고 아내가 다른 남성을 쫓아 집을 나갈 때마다 다시 데려오고 사랑하도록 합니다. 예언자는 자기가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명령에 따라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고, 그리고 다른 남자를 쫓아 집을 나간 후에도 다시 데려와야 한다는 점에서 저는 예언자가 되기는 애당초 그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음란’ 혹은 ‘음탕’ 그러면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단어는 ‘여인’ 혹은 ‘여성’일까요? 왜 성서는 여자만을 음란하고 방탕한 모델로 제시하는 것일까요? 실제는 남자가 더 방탕하고 음란한 짓은 더 하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있었던 여성교우 5명이 고소한 삼일교회의 전병욱 목사가 있습니다. 몇 년간의 재판 끝에 결국 지난해 대법원에서 성추행으로 확정 판결이 났는데, 이 친구가 삼일교회를 떠나 홍대새교회를 개척하여 지금 교회가 제법 커졌다고 하는데, 얼마 전 설교 중에 고멜을 언급하면서 하느님은 고멜도 용서하고 사랑했다. 그러니 자기도 용서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을 하였는데, 이 친구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용서를 구한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 얘기를 고멜이 들으면 그럴 겁니다. “야, 너 같은 인간이 왜 내 이름을 들먹거리느냐? 난 애당초 그런 사람이라 감출 것도 없지만, 너는 거룩한 목사라고 떠들고 다니고 그리고 십년 넘게 이를 감추고 부인하지 않았느냐? 내가 흠이 많기로 서니 너 같은 쓰레기 같은 인간이 나와 비교하다니 참을 수가 없다.”

요한복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간음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끌고 옵니다. 율법에 돌로 쳐 죽이라고 되어 있는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외치는 예수에게 ‘이제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것이지요? 만약 그냥 용서하고 풀어주라는 얘기를 하면 율법에 어긋났다고 하여 예수마저 돌로 쳐 죽이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께서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모두를 부끄럽게 만들었고, 이 여인에게도 다시는 죄짓지 말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얘기를 읽을 때마다 “함께 간음하던 남자 얘기는 왜 없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이 성서 해석을 하면서 남자 얘기를 끄집어내는 경우를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현장에서 도망을 친 건지 아니면 남자는 그런 짓을 해도 괜찮은 권력을 지닌 사람이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만, 왜 남자 얘기는 없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이 여인과 함께 한 남자는 어디에 갔는가?’ 하고 물었는데, 복음서 기자가 실수로 혹은 의도적으로 뺀 것일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복음서 저자는 같은 간음죄를 저질러도 애초부터 남자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있습니다.

<오천 명 급식기적 이야기> 이 오천 명 속에는 여성과 아이들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4배를 곱해서 2만명 급식기적 얘기라고 명명하는 것이 옳은 방식이 아닐까요?

<열두 제자 이야기> 예수에게 12제자가 있었다는 얘기는 복음서 곳곳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열두 제자가 정확히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고, 예수께서는 어떤 기준에서 이들을 선택했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여간 12제자 가운데 복음서는 베드로와 형제 안드레,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장면과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얘기되는 알패오의 아들 세리 레위를 부르신 장면의 얘기만 나옵니다. 이 다섯 제자를 부르시는 얘기는 모두 그들이 예수가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부르시자마자 평생 직업을 그 즉시로 그만 두고 예수를 따랐다는 즉각적인 응답과 과감한 결단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직업을 바꾸는 일에 있어서도 가족들과 논의를 하는 것인데, 아예 그만 둠으로 수입이 끊기는 상황 속에서 가족을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지도자로서의 자격 상실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베드로는 결혼까지 한 사람이었기에 아내를 버리기로 마음먹지 않는 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의 세리 레위 이야기는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가 마태와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누가복음에서는 레위라 부르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람을 마태라고 달리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마가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부르는 반면, 마태와 누가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라고 부릅니다. 심지어는 마가마저 2장에서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얘기를 해놓고는 3장에서 12제자의 이름을 쭉 열거하면서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알패오가 동명이인일수도 있고 레위가 야고보로 개명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라는 이름은 네 복음서 모두 12 제자 명단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서가 기록된 시점이 실제 사건이 일어났던 시간보다 최소한 4,50년이 흐르다보니 제자들의 이름과 그들에 관련한 얘기들이 서로 뒤섞여 있었다는 것이고 12제자라는 의미도 그 숫자에 있다고 보기보다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상응하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70인 제자라는 단어도 등장합니다. 제1성서의 70인 장로에 대한 대응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에 대해 근원적으로 접근하면 제자는 단순히 스승이 선정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승의 뜻을 가장 깊게 이해하고 스승의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 곧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까지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남성제자는 모두 도망을 갔고 여성 제자 몇 명만 남아 있었으니 참 제자는 열두 명의 남성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예수 무덤을 찾아감으로 예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이를 전달한 사람들 또한 여성제자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예수님의 참 제자들은 여성들이었다고 말하겠습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린다면 성서는 가부장적 권위사회에서 남성들이 썼기 때문에 대부분이 남성들의 시각에서 기록되어졌고 자연히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 목사로서 우리 교회가 오늘의 #MeToo 행동을 보다 심도 있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BibleToo 운동이 먼저 진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이런 일들은 여성목회자들과 여성신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전개되어 왔던 일이고 저는 이를 보조하는 의미에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번 미투운동이 계속 전개됨으로 우리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여성 개인의 아픔이 치유될 뿐만이 아니라 사회와 세계사에 있어 그가 남성들이 주도해온 대립과 갈등의 전쟁 역사가 여성들이 주도하는 사랑과 포용의 평화 역사로 바꿔지기를 기도합니다. 

#MeToo, #BibleToo, #MeFirst, #미투운동, #나도당했다, #성서도당했다, #inclusive language, #성평등용어, #열두제자

조헌정  choshalo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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