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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한국 읽기?오구라 기조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이정배 | 승인 2018.02.07 22:44

이 책의 부제는 ‘理氣로 해석한 한국사회’이다. 한 마디로 유교라는 내재적 원리를 갖고서 한국을 분석해 보겠다는 것이다. 어떤 서구논리를 갖고서 한국을 이해하는 것보다 이를 통해 한국사회를 옳게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서 말이다. 자신의 작업보다 더 잘된 한국이해는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제목이 적시하듯 저자는 한국을 무질서와 혼동이 아니라 ‘철학’의 나라로 보았다. 이 땅을 유교적 시각, 곧 주자학적인 리(理)의 구조 하에서 본 것이다. 유교적 문화 잔류 량을 가장 많이 지닌 나라가 한국이란 말을 이 책이 여실히 증명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긍/부정의 양면이 있다. 일체의 도덕성, 정당성, 정통성이 리(理)에 있기에 이를 얻고자 하는 역동적 과정은 좋으나 갈등과 투쟁이란 부작용을 낳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理’환원주의는 한국을 ‘하나’의 ‘철학’으로 보는 근거가 된다. 여기서 ‘철학(理)’은 긍정적으로, ‘하나(환원주의)’는 부정적인 뜻이다. 이런 특징을 일본에 견줘 한국적 보편성으로 이해하며 글을 전개했다.

1.

이처럼 저자는 한국사회을 ‘理’, 곧 도덕적 신앙체계로 보고 사람들의 의식, 생활공간, 문화체계, 사회구조 그리고 정치, 역사적 맥락을 ‘理’ 지향성 차원에서 설명하였다. 동시에 이렇듯 ‘하나’의 철학성을 지닌 한국의 미래를 염려하며 일본과의 관계를 위해 풀어야 할 숙제도 제시했다. 상당부분 동의할 내용이 많았으나 더러는 억지춘양도 있었고 무엇보다 교포 4세로서 일본 화된 저자의 내면이 읽혀져 불편했다.

또한 신간이긴 하나 벌써 10여 년 전에 탈고된 글이었기에 촛불혁명같은 최근 한국적 상황을 다루지 못한 것도 큰 결점이다. 이에 대한 답변 역시 ‘理’로 설명할 것이기에 저자의 답을 예측할 수 있다. 저자의 혜안에 동의를 표하면서도 필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떨칠 수 없었다.

▲ 오구라 기조, 『한국의 하나의 철학이다: 리와 기로 해석한 한국사회』

첫째는 과연 한국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가 理 이외에는 없는 것인가? ‘하늘경험’과 ‘힘 지향성’을 한국 사상의 원형으로 보는 이들도 있는 탓이다. 삼수분화의 세계관도 한국을 이해할 수 있는 독특한 틀로서 기능할 수 있겠다. 둘째는 한국인의 의식세계를 도덕체계로 환원시키는 것은 一理 있겠으나 全理는 아닌 듯싶다. 조선조 이후의 영향이 짙은 결과이겠으나 이전의 민족적 정황은 다를 수 있다. 예컨대 흥(興)이 최근 한류(Korean wave)의 빛에서 고유한 가치로 재평가되고 있다. 이는 ‘理’ 지향성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셋째로 저자는 ‘理氣’ 철학을 종종 보편(본질)과 특수(현상)의 문제로 풀어내는데, 이는 세계 보편적인 것으로서 한국만의 것으로 여길 이유는 없을 것이다. 본질과 현상의 괴리 속에서 본질을 추구하는 마음이, 명분과 실리 싸움에서 명분을 좆는 마음이 지금도 우리에게 살아있는 지도 모르겠다. 넷째로 저자는 ‘理’의 세분화란 말을 갖고서 달라진 현실 속에서도 ‘理’ 철학의 항상성, ‘理’ 환원성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 과연 理 지향성만으로 격변하는 한국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분수 ‘理’에서 배운 ‘세분화’ 개념을 통해 오로지 한국을 ‘理’ 하나만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오히려 한국에 대한 숨겨진 강박관념의 표출은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한국을 ‘하나’로 설명하려는 그의 획일화된 논리자체를 문제 삼고 싶다. 마지막으로는 종종 식민지 근대성을 옹호하는 저자의 발언을 보며 본 책을 쓴 근본 의도가 궁금했다. 독도에 대한 한일 양국의 의식 차를 당연시 여기는 저자에게서 역사(사실)에 대한 엄밀성이 결여된 듯 여겨져 읽고 난 뒷맛이 씁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공헌이 적지 않다. 본 저서로부터 배운 바를 비판적 시각에서 적시 해 볼 것이다.

2.

저자는 일본인들의 현실주의적 경향에 반해 한국을 이상주의 나라라 여겼다. 한국의 경우, 도덕지향성이 강한 까닭이다.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주체성 쟁탈전’이 몰(沒)도덕저인 일본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원인을 주자학을 국가철학으로 삼은 이 땅의 오랜 역사에서 찾았다.

주지하듯 주자학은 도덕지향적인 ‘理’의 철학이었다. ‘理’는 진리이자, 규범이고 보편인 까닭에 이를 얻는(체현하는) 자가 힘을 갖는다. 이렇듯 ‘理’의 획득만을 관심한 탓에 조선 성리학이 중국에 비해 덜 독창적이라 했다. 심지어 물질적 부도 ‘理’의 획득과 무관치 않았다. 도덕을 얻는 자가 힘과 부도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 구조에서 사적 욕망이 곧잘 공적 도덕으로 은폐되곤 했다. 이런 도덕적 지향성을 기독교적 서구와 이슬람 문화와 견준 저자의 시각은 옳다. 오늘의 문명충돌을 이들 간의 도덕 쟁탈전 양상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철학으로서 한국적 특성 또한 저자 생각과는 달리 보편적 현상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저자는 ‘理’ 쟁탈전을 오로지- 특별히 일본과 견줘서- 한국적 특성인 것을 강조했다. 性卽理의 주자학이 心卽理 철학을 철저하게 부정했던 것을 그 한 예로 제시하였다. 저자는 이를 ‘理’-신앙이란 말로 표현했다. 하지만 ‘理에 대한 과도한 집착 원인을 저자는 한국의 지정학적 원인에서 찾았다. 강대국 틈새에서 작은 나라의 존재이유를 도덕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역사상 줄곧 위태로운 정황에서 도덕으로 힘과 맞서 이기고자 했다고 보았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충족한 설명이 될까? 한국을 이해하는 사상적 구조를 밝히려했으나 자기논지를 강요한 결과를 낳았다.

3.

저자는 한국을 철학의 나라라 일컫는 이유를 ‘상승을 향한 열망’ 때문이라 했다. 한마디로 현실적이지 않고 이상주의적 나라란 것이다. 정말 그럴까?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함석헌은 위화도 회군으로 결과 된 조선의 시작을 현실주의에 의한 이상주의의 패배로 풀었다. 누가 옳을 지는 더욱 탐색할 일이다. 그래서 저자의 명제에 쉽게 설득되지 않는다.

주지하듯 理氣철학의 본질은 성선설이며, 사회 역시 성선설적으로 구조화 되었다. 理氣論에서 善惡은 각기 실체가 아니라 과불급 차원에서 이해된다. 그렇기에 善을 향한 극기(克己)가 더없이 요구되었다. 善의 확보여하에 따라 이 사회(우리)는 ‘님’과 ‘놈’으로 구별되고 그 중심에 있는 ‘나’는 ‘님’을 향한 상승욕구를 지닌다. 善에 대한 열망이 없는 ‘놈’은 ‘남’으로서 배재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 공동체는 선으로 구조화된 사회적 체계(禮)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선(理)을 국가적 차원에로 확대시키는 것이 유교의 과제라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님’이 되려는 상승적 열망(동경)’이다. 이것이 좌절되면 한(恨)이 된다. 여기서 다시 물음이 생긴다. 한국에서 말하는 限이 이런 차원으로만 풀어질 수 있겠는가? 저자는 일본적 원한과의 비교에 치중한 탓에 이 땅에서 생기된 恨의 원초적 경험에 많이 무지했다. 자신을 삭히는 恨의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상승적 열망이 좌절되는 것을 限으로 여길 경우 이를 굳이 한국적이라 부를 이유가 없다. 저자도 어렴풋이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민중들의 恨도 언급했던 것이다. 저자는 理 진영(양반)의 한과 氣 진영(상놈)의 한을 대별했다. 그러나 어느 계층이든지 ‘상승을 향한 열망’으로 한풀이가 대세였다. 상놈이 양민 되고, 양민이 양반 되는 계층상승을 한풀이의 요체라 여겼던 것이다. 이런 식의 限으로는 한국적 恨을 온전히 들어낼 수 없다.

4.

그럼에도 ‘理 지향성’이 강한 한국은 그 자체로 피곤한 사회라는 저자의 의견에는 공감한다. 여하튼 상승을 위한 경쟁이 심한 탓이다. 이런 피로감을 치유하는 것을 저자는 ‘氣 활동성’이라 본다. 인간 간의 정(情)이 바로 氣 활동인 것이다. 情 때문에 경쟁을 포기하는 삶이 가능할 수 있다. 그렇기에 理 지향성 사회일수록 情을 낳는 氣의 작용도 활발해 진다. 그래야 사회 내에 숨 쉴 공간(그늘)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도덕적 理에 지친 이들의 해방구가 되는 셈이다.

理氣간 상호성이 한국처럼 활발한 공간이 세계 내 어디에도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理氣가 나뉜 것도 붙어있는 것도 아닌 바, 그 실상을 바로 한국 사회에서 본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실상이 어디 한국뿐이겠는가? 일본 역시도 상수도 문화(지역)와 하수구 문화(지역)가 있음을 알고 있다. 이 두 영역과 두 문화가 공존하면서 섞이지 않는 것은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일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한국 사회를 자신속의 리(理), 즉 분수리(分殊理)를 들어내기 위해 혈안이 된 공간으로 규정했다. 명함을 내보이며 자신을 홍보하고 상대의 理를 감지하느라 눈치가 발달한 사람들이 한국인이란 것이다.

▲ 이정배 전 감신대 교수

하지만 이런 설명 또한 내게 설득력이 없다. 한국인들이 거친 손을 부끄러워하는 것도 정신적 理를 숭상하는 욕망 때문이라 여겼으니 기이하다. 저자 오구라 기조는 한국 사람을 민족을 ‘理’차원으로 숭상하는 국수주의자로 여겼다. 한국을 폄하한 발언은 아니겠으나 민족적 배타성을 큰 문제라 보았다. 민족적 理를 숭상하도록 교육 받은 결과라는 것이다. 민족이란 본래 역사적으로 구성된 상상의 공동체란 서구 논리를 차용하면서 말이다. 이 땅의 민족주의가 일제침략으로 야기된 저항(배타)적 차원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東學의 정신이나 3.1 독립선언서가 말하듯 세계와 소통하는 문화적 차원도 지녔다. 한국을 배타성을 오로지 理-지향성으로 푼 것은 이 땅의 근현대사를 가볍게 여긴 결과일 것이다. 저자는 理의 세분화란 조어(造語)를 갖고서 한국을 거듭 ‘하나의 철학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몰아갔다. 금번 촛불집회에서 보듯 (본 책은 촛불에 대한 언급이 없다) 특정 보수권력이 규정한 ’理‘에 반해 다른 ’理‘를 주장하는 집단이 생겨났다. 자신을 ’하나의 理‘로 새롭게 재규정한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저자는 이런 한국을 일컬어 자신이 유일한 ’理‘임을 주장하는 각축장이라 했다.

그렇다면 지금 행해지는 적폐청산도 ’하나의 理(一個性)‘들 간의 투쟁에 불과한 것이겠다. 정말 그런가? 오히려 퇴계의 理 철학은 각축을 넘어 ’절대 善‘을 강조하는 측면을 지니지 않았을까? 저자는 남북한이 통일되지 않는 것도 이런 理의 각축 때문이라 여겼다. 이런 한국을 좋게 말하면 역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결핍된 사회라 했다.

5.

본 책 4장에서 저자는 한국의 문화구조를 理氣로 설명한다. 무엇보다 한국을 질서의 나라라 불렀다. 여기서 질서는 의당 ‘理’이다. 혼돈처럼 보이지만 질서 지향적 나라란 것이다. 오히려 질서를 지향하는 민족정신이 주자학의 理를 숭상토록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옳은 말일까? 흥(興)을 민족정신의 원형이라 보는 시각과 공존키 어렵다. 물론 興이라 해서 무질서는 아닐 것이지만. 興과 理, 어느 것이 우선일까? 興을 ‘氣’ 감응적 인식체계로 보는 시각도 있기에 토론이 필요하다. 나아가 질서는 오히려 일본(인)에게 더 적합한 말이겠다. 일본인들의 질서의식에 경탄한 적이 많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저자는 한국인의 ‘말(논리)’ 과 ‘몸(균형)’, ‘풍수’, 불교, 심지어 한글 속에서도 理 지향성을 보았다. 예술, 스포츠 분야에서 천재가 태어나는 것도 理的 능력 탓이라 했다. 천재를 理와 합일된 경지로 본 것이다. 이 경우 理는 그의 도덕성과 무슨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인을 일컬어 理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존재라 했으나 저자야 말로 아주 두터운 ‘理’의 안경을 쓴 것이 아닐까?

5장에서 저자는 사회 구조마저 理氣로 설명했다. 유교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양반, 사대부, 선비들이 있다. 양반은 도덕과 권력과 부를 움켜쥔 존재이고 사대부는 도덕과 권력을 지녔으며 선비는 오로지 도덕적인 사람을 일컫는다. 이 세 집단이 투쟁하고 갈등했으나 조선사회는 선비를 최고로 여겼다. 저자는 뭇 당쟁 역시 누가 理를 얻는가의 싸움이라 보았다. 부계적 孝를 중시하여 족보에 집착하는 사회현실 역시 理 지향성과 무관치 않고. 피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을 저자는 孝이자 理로 보았다.

6.

저자는 이어서 한국의 정치, 경제 그리고 역사 또한 理氣의 틀로 분석했다. 우선 경제를 ‘理’와 ‘利’의 각축이라 보았다. 주자학자일지라도 ‘利’를 부정할 수 없었기에 양자 간의 긴장은 필연적이었다. 그럴수록 양반에게 집중된 부, 권력, 도덕의 불합리함 탓에 利의 도덕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일 수 없었고 오히려 ‘利’로써 ‘理’(도덕)를 얻는 일이 다반사였다. 재벌(대기업)에 ‘利’를 부여한 군사정권, 합법적 금융외의 경제활동(지하경제) 등을 그 최근의 모습들이라 했다. 정치 영역에서 ‘理’는 항시 타도해야할 외부(적)와 공존했다. 그런 방식으로 理의 보편성이 강조되었다. 포섭되지 않으면 배제되는 양자택일의 장치 그것이 바로 한국 정치란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理’가 강한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보았다. 그럴수록 僞理, 곧 거짓된 理가 성행했음을 적시했다. 자주 僞理를 갖고서 자신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지키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왕조차도 理를 벗어나면 타도 대상일 수밖에 없다. 理를 흐릿하게 만드는 일을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역사 역시 理와 僞理 간의 싸움의 장이었다. 한국의 역사란 놈(僞理)이 님(理)으로 바뀌는 역사인 탓이다. 현실역사는 언제든 僞理이나 이상(理想)은 의당 ‘理’이다. 그렇기에 법, 심지어 국가협약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자기 역사의 정당성(理)이다. (불가역적인 위안부 합의일지라도 역사의 정당성을 위배하기에 수용할 수 없는 한국을 저자는 부정적으로 여길 것이다.) 주자학이 쇠퇴일로에 있던 구한말에도 理 지향성은 지속적으로 작용했다. 東道西器란 말로서 중국, 일본보다 강력하게 理 우위성을 견지했었다. 동학의 ‘之氣’(론)마저도 理로 해석했다. 개화파들 역시 일본을 새로운 ‘理’로 받든 한 시도라 했다. 이로써 ‘놈’의 일본이 ‘님’되었으나 이를 僞理로 여기는 시도 역시 강력했다. 저항적 민족주의를 理로 여긴 탓이다. 지금은 미국이 ‘님’되었으나 이를 부정하는 새로운 ‘理’역시 활발하게 작동되었다.

특별히 저자는 1990년 대 이후 한국 사회의 변동을 ‘理의 세분화’라 말로서 풀어냈다. 후기 자본주의로 접어들면서 민족주의(국민통합)의 ‘理가 각 개인(집단)을 강조하여 理를 세분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주체의 다양성을 강조한 포스트모던 사회에로의 진입을 일컫는 말이겠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한국은 정보화를 통해 여럿의 理를 재통합시켜 세계화의 주체로 우뚝 섰다고 저자는 보았다. 하지만 세계화, 정보화, 후기산업사회, 포스트모던의 시대상을 온전히 理개념 하나로 수렴, 환원시켜 해석하는 일이 옳을지 모르겠다.

여하튼 저자의 생각을 조금 더 따라가 본다. 군부독재를 지나 민주정부의 탄생을 저자는 모두가 ’님(理)‘이 되는 시점이라 여겼다. 한마디로 ’님‘의 인플레 시대가 도래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니라 새로운 주체로서의 ’나‘를 강조하는 사회가 되었다. 애국(민족)이념을 벗어나 씨ᄋᆞᆯ 개체를 중시하는 가치가 새롭게 ’理‘의 위상을 점유한 것이다. 여성을 비롯하여 통념상 뭇 이단자들이 새로운 주체로 자리 매겨졌다. 본래 氣的 존재로 여겨진 의사, 예술가, 기술자들이 사회의 핵심이 되었다.

하지만 축소된 듯 보였던 ’우리‘의식은 세계화와 함께 다시 확대되었다. 앞서 말한 세계화와 정보화의 영향 탓이다. ’남’까지도 ‘우리’에 포함시켜야 하는 사회가 되었다. 지역차를 줄여 김대중이 대통령된 것을 한 예로 든다. 물론 세계 속 나라들 역시 ‘우리’ 의식에 내포되어야만 했다. 저자는 이를 총칭하여 최근 한국사회의 ‘理’ 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묻고 싶다. 한국사회의 변동을 이의 세분화와 재통합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옳은지 말이다. 이것이 과연 ‘理’ 지향적 사회의 특징일 수 있겠는가? 서구적 근대화를 경험하고 이를 극복하는 보편적 과정이 아닐 것인가? 근대적 획일성의 사회가 다원성의 사회로 그것이 다시 새로운 보편성의 시대로 변하는 것은 굳이 理의 개념 없이도 이해 가능한 보편적 현상이지 않겠는가?

7.

본 책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理’-지향적 한국과 일본 간의 차이를 언급한다. ‘理’ 지향적 사유 구조가 일본을 항시 ‘님’이 아닌 ‘놈’으로 폄하했다는 것이다. 이런 理-지향성이 小中華사상으로 체화된 결과이다. 심지어는 일본의 한국 기원설을 확대, 날조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저자에게 이런 한국(조선)은 자폐적 증상을 지닌 환자로 여겨졌다. 이런 일본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던 굴욕적 한이 일본을 ‘놈’으로 여기는 강도를 높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일본을 ‘놈’으로 본 원인이 理-지향성에 있다는 저자의 시각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동시에 일본의 만행 그 자체에 대한 언급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논지에서 이 점이 생략되었다. 주객, 본말이 전도된 느낌을 받을 정도이다. 저자는 지금껏 일본과 다르다는 한국적 사고의 확대 재생산을 상당부분 ‘理’-지향적 사고 틀에서만 보려했다. 산업화 시대로부터 세계화 시대에 이른 지금까지 한국인은 ‘理’의 승리를 자폐적으로 선언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필자가 저자의 의도를 비틀어 평한 것이지만 이런 비판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반일 감정 자체가 정말 한국적 ‘理’인가? 일본문화를 ‘理’라는 편협한 인식 틀로 바라보는 한, 한일 관계의 미래적 전망이 어둡다고 했는데, 이런 책임이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에게 있는 것인가? 그래서 저자는 우리에게 독도를 다케시마로 여기는 일본의 생각도 존중하라고 말했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근대화를 인정하는 순간이 도래하기를 바란다고도 말한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저자는 불가역적인 한일위안부 조약 폐기 역시 ‘理’-지향적인 한국인에게 책임을 물을 것 같다. 저자에게 한국은 일본을 ‘놈’으로, ‘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에서만 존재한다. 일본 없이도 설 수 있는 한국을 만드는 것을 한국의 과제라 했다. 일본이란 외부 없이 ‘스스로 서라’(自立)는 충고이다.

저자는 유교문명권에 속한 일본 역시 理-지향성을 지녔으나 한국에 비해 훨씬 약하다고 보았다. 과거 동북아를 삼켰던 일본의 국가주의(理)에 대한 자성보다는 q변명을 앞세운다. 전쟁헌법을 개정하여 동북아를 넘보는 일본에 대한 분석이 상대적으로 초라하다. 그렇기에 향후 저자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로 만족치 말고 일본에 대한 혹독한 비판 書를 써야 할 것이다.

이정배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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