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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참사, 87년 민주화가 잃어버린 반쪽형제복지원 참사 조명하는 토론회 열려
에큐메니안 | 승인 2018.02.10 00:08

1987년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 잊혀지지 않을 해로 기억된다. 엄혹한 군부독재 하에서 새로운 사회체제를 만들어냈다는 벅찬 감격으로 한국 사회가 들끓었던 해였다. 이 새로운 사회체제를 출범시킨 원동력은 누구나 이야기하듯이 서울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이른바 촛불혁명으로 들어서 새로운 정부 하에서 우연의 일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이 개봉하면서 한국사회는 다시 한번 1987년을 새롭게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기억이 그러하듯이 1987년 다르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다.

민주화의 열기가 삼켜버린 잔혹사

“전국 최대”라는 자랑 아닌 자랑으로 부산에서 운영되었던 부랑인 보호시설 형제복지원에서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이 시설에서 사망 사람만 551명에 이른다. 12년 동안 한해 평균 46명에 육박하고 한 달에 4명이 사망한 것이다. 이런 참혹한 죽음의 행렬이 계속되었지만 한국사회는 87년 초, 잠깐 이 사건에 주목했을 뿐 민주화의 열기가 이 참사를 집어삼켰다.

▲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주제로 한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에큐메니안

이후 1987년 신민당의 조사보고서, 민주화운동진영의 기록을 담아 1988년 발행된 ‘민추사’ 등이 연이어 발간되면 당시 사회도 형제복지원 사건을 독재정권의 폭력성을 드러낸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들 앞에 떠오르는 질문은 왜 형제복지원 참사는 87년 민주화 역사에서 ‘삭제된’ 것일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에 답을 시도하는 토론회가 열렸고 이 참사가, 그리고 민주화 운동이 삼켜버린 이 참사를 복원시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에 대한 의문에 답을 시도하는 토론회였다.

 2월 9일 오후 2시, 국가인권위원회(이하, 국가인권위) 배움터에서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등의 주최로 “또 하나의 1987, 형제복지원을 생각한다”는 제목의 토론회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고민하는 자리였다. 이날 토론회에는 형제복지원 참사 사건이 사회적 기억에서 배제된 것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연구원들, 당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 생존자들, 국가인권위를 비롯한 여러 시민단체 인사들이 자리했다. 토론회는 개회사, 3개의 주제발표, 패널들의 토론과 플로어토론을 통한 질의응답 순으로 진행됐다.

제도화되고 보수화된 저항 속의 형제복지원 참사

“1987년 6월 항쟁과 도시하층민”이라는 제목의 발제에서, 임미리 한신대 학술원 전임연구원은 형제복지원 사건이 가려진 배경으로부터 민주운동사에서 배제된 도시하층민만의 특수한 저항의식을 읽어냈다. 임 교수는 지난 주된 항쟁의 경향들이 중산층들의 참여를 다수 포함했을지라도 점차 도시하층민들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만큼, 저항 그 자체가 “제도화되고 보수화 됐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의 분석은 일반 대중과 도시하층민의 분리를 기초로 한 것이었다. 임 교수는 도시하층민이 겪는 차별의 본질은 ‘인간 이하의 대접’이고 그러한 대접을 하는 것은 정권 뿐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이기 때문에 그들의 적은 ‘세상 전체’인 반면 동지는 없다.”고 설명했다. 애초에 일반 대중과 도시하층민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주체라고 본 것이다.

또한 임 교수는 세상 전체가 적인 도시하층민의 저항행위는 필연적으로 폭력성을 띨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들의 폭력성은 ‘안전’을 복원하기 위해 저항하는 일반 대중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변한다. 그렇기에 비폭력을 주장하며 저항하는 일반 대중은 폭력적인 도시하층민을 밀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 대중은 그들에게 연민과 동정은 할 수 있을지언정 그들의 고통에 공감해 함께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형제복지원 참사, 외면된 사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최종숙 연구원 또한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결정적으로 주체적인 차원, 외부 사회운동 세력과의 연대가 부재하면서 결과적으로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당시 형제복지원 사건이 사회운동 전반에서 고립되었던 상황을 분석했을 때, 언론과 민주화운동세력, 그리고 일반대중들의 동참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먼저 최 연구원은 “87년 언론환경은 민주화운동세력에 우호적이지 않았다.”면서 “박종철 사건도 언론에 알려지기 어려웠는데, 두 사건의 보도 건수를 보면 형제복지원 사건이 박종철 사건에 비해 특별히 엄혹한 대우를 받았다고 보긴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어 “박종철 사건이 형제복지원보다 보도 건수는 세 배 가까이 많았으나, 형제복지원이 부산이라는 지역에서 발생했고 울산지청 검사 한 명이 담당한 단일 수용시설 사건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그리 적은 보도 건수라고 할 순 없다.”면서 상황을 살펴보면, 박종철 사건도 1~2월에 반짝 조명을 받은 뒤 점차 신문지상에서 사라졌다가 5월에 이르러 죽음이 은폐·조작된 것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보도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또한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비중이 줄어든 원인으로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은 민주화운동과 친밀한 원내 정당이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형제복지원 사건과 박종철 사건이 동시에 터졌는데 정부에 의해 박종철 사건이 덮일 가능성이 있자 둘 중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에 대해 신민당이 수위 조절했다는 기사들이 있다.”면서 전략적 선택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았다.

이어 “민주화운동진영은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준비위원회’로 결집했는데 형제복지원 사건에 결합했다는 보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면서 “민주화운동진영은 형제복지원 사건이 극악무도한 사건이긴 하나 시급한 문제는 아니며, 세상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보았던 거 같다.”고 지적했다.

배제와 권력의 억압으로 묻혀진 참사를 복원하는 것

이어지는 토론은 형제복지원 사건을 지금의 시점에서 다시 다루고 복원하는 문제를 주제로 진행됐다. 먼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의 한종선 대표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5.18 이후의 상황을 전제한 상태에서 다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두환 정부가 민주화운동의 여파로 악화된 여론을 의식하였고, 주된 반응 중 하나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포함한 ‘사회정화 사업’이었다는 것이다. 한 대표는 대한민국의 민주적 항쟁들은 형제복지원과같은 사건들을 배제하지 않았을 때야말로 숭고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며 “민주화가 이 사회의 중요한 획이었을지라도 누군가 배제되어야만 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건 담당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는 형제복지원 수사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수사외압으로 인해 부산에 있던 형제복지원 본원을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또한 지금에도  “현재 과거사정리기본법 개정이 계속 논의중에 있으나, 입법에 이르기까지 첩첩산중”이라고 비판했다. 더불어 부랑시설 피해자들의 문제는 여타 과거사 문제들에 비해 강한 특수성을 갖고 있는 만큼 개별적인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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