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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칼’ 한 신학사상가 죽재 선생내가 만난 서남동 목사 ⑥
김경재 | 승인 2018.02.11 23:32

수유리 동산에서 만난 처음 기억

죽재 선생님은 내가 1959년 당시 수유리 한국신학대학에 입학 했을 때, 캠퍼스에서 그리고 강의실 수업시간에 만났다. 당시는 교수들과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 켐퍼스 내에서 생활했다. 교수는 교수 사택에서, 학생들은 8명이 일조된 개인주택형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첫 강의가 시작되기 약 15분 전, 죽재 선생은 영락없이 가죽 가방에 책을 무거울 만큼 넣고, 교수 사택에서 나와 교수 연구실에로 걸어가셨다. 칸트가 일정하게 정한 시간 마을을 산보했다지만, 죽재 선생도 거의 같은 시간에 걸어나오셨는데, 항상 깊이 생각하는 사색에 깊이 잠긴듯한 얼굴로 말없이 걸어서 오가시곤 했다. 죽재 선생이 모습은 언제나 귀공자같은 풍모를 나타냈다.

한국신학대학 학부 4년 동안 죽재 선생과 나와의 인연은 길지 않았다. 강으로서는 폴 틸리히 신학을 처음으로 소개 받았다. 독일어 원서강독을 담당하시기도 했는데, 교과서는 에밀 부룬너의 <하나님의 말씀과 현대인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학 3년 첫 학기를 마치고 군대복무를 하고 복교하고 보니, 그땐 죽재 선생은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나는 학부졸업 후 광주의 개척교회 전도사를 2년 정도하고, 대학원을 하기로 작정하고 죽재 선생 문하에 들어가기 위해 연세대 연합신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박봉랑 교수는 건국대 교수로 잠시 자리를 옮긴 상태였고 모교에는 조직신학 교수가 안계시는 이유도 있었다.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시절의 기억

죽재 선생을 대학원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사사한 셈이다. 죽재 선생은 본회퍼, 떼이야르 샤르뎅, 그리고 막 출판된 영어본 교제를 가지고 몰트민의 <희망의 신학>을 감동적으로 칭찬하고 소개하셨다. 나는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시절 첫 딸을 낳은 가장으로서 너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인지라, 아르바이트와 연세대 교양학부 조교로 일하는라고 공부다운 공부를 못했다.

▲ 철학자 Paul S. Schilling(폴 쉴링)이 연세대를 방문했을 때이다. 사진 왼쪽부터 이계준 교수, 폴 쉴링, 그리고 서남동 교수(1972) ⓒ죽재 서남동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 제공

석사 학위논문은 죽재 선생이 지도교수로서 <현대신학에서 역사와 계시이해>라는 주제로 제출했는데 부끄러운 석사논문이었다. 당시는 그랬다. 1960년 반부터 1970년대 중반 민중신학이 태동하기 직전까지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 무렵, 죽재 선생은 떼이야르 샤르뎅연구를 비롯하여 <과학신학>에 깊은 관심과 연구논문을 보이셨다.

유신체제에 저항하여 교수직 해고와 옥중경험 이후

1970년대 초, 군부 권력집단의 삼선개헌 시도, 민주주의 파괴, 인권유린은 지조있는 대학사회 지성인들의 저항을 받았고, 그 댓가로 죽재 선생은 교수직에서 해고당하고 옥고를 치루었던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다. 연세대에서 교수직에서 해고당한 뒤에도, 상당 기간 동안 서 교수는 연세대 켐퍼스 내 교수 사택을 떠나지 않았다.

옮기실 집도 없었겠지만, 권력집단과 대학당국에 저항의 몸짓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초 설날엔 죽재 선생댁 세배를 가면,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유리잔에 따라 건배하고 “겨울이 깊으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라고 우리는 서로 믿고 우울하기보다 명랑하게 정초 만남을 즐겼다.

1970년대 중반기, ‘동토의 시대’에 잊지 못하는 추억은 해직당한 교수들 중에서 특히 <한국 YMCA 목적문> 작성에 힘을 집중한 일련의 사건들이다. 죽재 선생을 비롯하여, 김찬국, 현영학, 서광선, 김용복 교수가 한데 어울려 <한국 YMCA 목적문> 작성을 위해 2년 이상 연구회를 자주 가진 것이며, 당시 한국YMCA 총무 강문규 총무가 모든 뒷바라지와 열성을 다하셨다. 필자는 어떤 행운이었는지 그 모임에 자주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다.

필자가 YMCA 중간지도자 교육훈련과정에 강사로서 자주 참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구결과물로서 탄생된 <한국 YMCA 목적문>은 짧지만 아마 세계적으로 가장 훌륭한 <목적문> 문헌이라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고난시대의 용광로에서 정금처럼 다듬어져 나온 신학지성들의 <목적문>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확신한다.

기장 선교교육원 원장실에서 받은 잊혀지지 않은 충격

교수 해직과 옥중경험 이후, 한국의 민중신학자들은 성서를 다시 읽는 일에 눈을 떴고, 예수의 메시야 운동의 생생한 실체를 몸으로 깨닫고 놀라운 증언과 논문들을 쏟아냈다. 죽재 선생의 <예수, 교회사, 한국교회>(1975)도 그중의 대표적 하나이다. 모두가 살아있어서 생명력이 넘쳤고, 초기 예수 메시야 운동과 원시교회 공동체의 실체를 다시 보게 되었다. ‘보수꼴통’ 한국의 기성교회들은 동조는 커녕 이해도 못했고 비난과 공격을 일삼았다. 그러나, 세계교회 신학계는 놀랐고, 한국의 민중신학에 주목하였다.

그 무렵 이야기는 널리 많이 알려진 일들이기에 다시 여기에서 부연하지 않겠다. 다만 연세대 교수직에서 해직당한 죽재 선생에게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서대문에 있었던 ‘선교교육원 원장직’을 맡겼다. 각 대학에 민주화 인권운동하다가 퇴학당하거나, 옥중고초를 겪고 나온 “젊은 사자새끼들”이 선교교육원에 모여들었다. 거기에 죽재 선생이 계셨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내가 충격받은 한 가지 일만 언급하고 싶다. 나는 이런 저런 일로 선교육원 원장실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가장 충격적이어서 잊혀지지 아니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원장실, 죽재 선생의 집무책상이자 원고작성 책상 앞 정면 벽면에 ‘압송당하는 녹두장군 전봉준’ 사진만 걸려 있었다. 그 누군가를, 그 무엇인가를 쏘아보는 듯한 정봉준의 눈에서 나오는 강렬한 안광이 그날 따라 새롭게 느껴졌다.

폴 틸리히, 본회퍼, 샤르뎅, 꾸띠에레츠 등 신학자들 사진이 아니라 신학자 죽재 선생의 서재 책상 정면에 ‘전봉준’이라는 풍운아의 사진이라! 나는 그 때 아무말도 여쭙지 않았지만, 그 사진 한 장은 당시 죽재 선생의 심정, 사상, 관심의 초점을 다 말하고 있는듯 했다.

▲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죽재 선생의 신학하는 근본자세

흔히 죽제의 신학을  언급 할 때, ‘세계신학의 안테나’, ‘방외 신학’, ‘민중신학’ 등 여러 가지 특징을 말한다. 그 모든 별칭들은 결국 죽재 신학이 ‘레디칼(radical) 신학’이라는 말이다. ‘레디칼’이라는 단어는 ‘급진적’, ‘과격한’, ‘철저한’, ‘뿌리에서 재검토한’ 등등의 의미를 갖는다.

나는 죽재 선생에게서 본래적인 의미에서 “신학이 레디칼하다는 것은 무엇을 이미하는가?”를 배운 셈이다.

전통적인 혹은 정통적인 신학이 모두 틀렸다거나 무용지물이란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난 어떤 시대 인간 상황과 복음을 진지하게 대결한 선배들의 그때의 결과물이다. 그것을 기준으로, 표준으로, 혹은 불가침적인 규범으로 삼고서 ‘오늘-여기’에서 ‘산’ 신학은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기독교를 발생시킨 원점, 곧 예수의 생애와 삶 그 자체에 가차없이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처인 ‘구체적인 오늘의 생명현실’ 특히 ‘고난당하는 인간 생명체’의 현실 심장에서 예수의 의미를 늘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참 신학하는 자세라는 것이다. 특히 “역사적 실재란 무엇인가?”를 나는 죽재 선생에게서 배운 셈이다.

김경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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