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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바라보며(누가복음 19:41-44)무너지고 실패한 곳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평화
이성훈 | 승인 2018.02.11 23:51

앞으로 5주간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부활일을 기준으로 40일 전부터 지키게 됩니다. 그렇기에 사순절이 다섯 주간이 되고, 그 뒤에 고난 주간을 거쳐 부활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앞으로 사순절 5주와 종려주일, 부활주일을 포함하여 총 7주간 동안 누가복음의 말씀, 특히 예루살렘 입성에서 시작하여 부활에 이르는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와 부활 이야기를 함께 보려고 합니다.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기간 동안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누가복음의 말씀입니다. 흔히 우리는 복음서의 내용들을 모두 혼합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각 복음서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읽지 못할 때도 있고, 성경의 의미 자체가 모호해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말씀을 드리면서 누가복음의 말씀을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는 하겠지만, 의미 자체는 누가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만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오십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겠다고 결심하십니다. 그래서 제자 둘을 보내 나귀를 끌고 오도록 명하십니다.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그냥 길에서 나귀를 만나서 타셨다고 기록하지만(요12:14-15), 마태, 마가, 누가는 예수님께서 일부러 나귀를 타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나귀를 끌고 오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서를 사회학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에 대해 이런 설명을 합니다. 당시 유월절 기간이 되면 수많은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로마는 혹시나 일어날지 모르는 폭동을 막기 위해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 통치 기간에 수많은 반란을 일으켜왔습니다.

로마의 군대는 폭동이 일어났을 때 막기 위해 파견된 것도 있지만, 폭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처음부터 압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로마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장군은 당연히 멋진 말에 훌륭한 무구를 갖추고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재현한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로마의 힘에 반대하며, 폭력과 힘에 의한 평화를 반대한다는 의도를 명확히 보이시기 위해 명마와 비교되는 나귀를 선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가실 때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나와서 호산나를 외쳤다고 알고 계시지만, 그것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요12:12-13). 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들어가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이 그런 행동을 보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이런 모습에 당황하고 놀랐다는 말도 첨가되어 있습니다(마21:10-11).

그 와중에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선포했던 말을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외칩니다. 38절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며 외쳤다고 말합니다.

이때 함께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제자들 좀 자제시켜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추종하는 바리새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바리새인들의 요청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사람들을 침묵하게 하면 돌들이 소리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인한 평화의 선포, 이미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에 천사들이 선포했던 그 선포가 이 순간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평화가 시작되리라는 말씀입니다.

파괴된 예루살렘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새로운 장면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우십니다. 성경에 몇 장면 나오지 않는 예수님의 눈물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내용도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이유는 예루살렘의 멸망 때문입니다.

▲ 오클라호마 폭탄테러 사건 추모 공원 부근의 성요셉교회 세워진 우시는 예수 상. ⓒ위키피디아

주후 70년경에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붕괴됩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됩니다. 복음서들은 가장 빨리 기록된 마가복음이라 할지라도 주후 70년 전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즉 누가복음을 기록한 저자 혹은 그 집단은 파괴된 예루살렘을 보았고,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눈물은 예수님만의 눈물이 아니라 실제로 파괴되어버린 예루살렘을 바라보았던 초대 교인들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철저하게 붕괴되어버린 예루살렘, 그 예루살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초대교인들의 눈물입니다.

여기에서 잠깐 예루살렘에 대한 이야기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시리즈에 있어서 예루살렘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누가복음은 분명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의 교회는 예루살렘을 기반으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시작되어서 유대-로마전쟁으로 인해 피난을 하게 되면서 외부 지역으로 옮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시리즈가 예루살렘을 중요시 생각하는 점은 사도행전에 더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도 단적으로 나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교 명령이 나타나는 누가복음 24장 47절을 보면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이 “갈릴리로 가라”라고 말하고 있는 점과는 사뭇 다릅니다(마16:7).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예루살렘에 모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 교회가 모든 교회의 중심지로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을 선교의 중심지, 모든 교회의 중심지,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평화의 중심지라고 여기는 이유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당연했을 것입니다.

이사야 62장 1-3절 말씀입니다. “나는 시온의 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구원의 시작점은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시작되는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모든 구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평화가 시작되는 곳, 오늘 본문의 바로 앞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될 평화를 선포했던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하지만 실제의 역사 속에서 평화의 시작점이 아니라 참혹한 폐허가 되어버린 곳, 그곳이 예루살렘입니다.

눈물과 평화의 선포

오늘 예수님께서는 폐허가 되어버릴 예루살렘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십니다. 43절과 44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예언적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만, 초대교회의 생생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원수들, 로마 군병들이 흙벽을 쌓고 예루살렘의 사방을 둘러싸고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 어른들과 아이들 모두 쳐서 쓰러뜨리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는 그 생생한 현장의 모습입니다.

이 본문이 생생한 기록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주후 70년경에 있었던 유대-로마전쟁으로 인해 사망한 유대인 수가 대략 11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본래 예루살렘은 벼랑 위에 서 있는 천연의 요지이기 때문에 함락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로마 군인들은 몇 년에 걸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안에서부터 말려 죽이는 작전을 사용합니다. 로마의 손에 완전히 떨어지기 전 예루살렘은 먹을 것이 없어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지옥과 같은 광경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절벽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인 마사다에서 일어난 전투에서는, 유대인 포로로 하여금 절벽을 오를 수 있는 흙벽과 흙길을 쌓게 했다고 합니다. 마사다에 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향해 흙벽을 쌓고 있는 동포들을 죽일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가 싸울 수도 없어 결국 마사다에 고립되었고, 결국 집단 자살이라는 방식을 택하게 됩니다. 이런 끔찍한 상황이 주후 70년의 유대-로마전쟁 시기에 이루어졌고,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과 이 시기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끔찍함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이런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제자들의 입을 통하여 평화의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을 보며 우시고는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다 파괴되고 망하게 될 예루살렘에 평화라는 말이 어울리겠습니까? 누가복음을 기록한 교회 공동체에 있어서도 이미 다 망해버린 예루살렘 앞에서 평화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평화를 선포하셨고 누가복음도 예루살렘을 향해 평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인 44절 후반부에 있습니다.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보살핌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에피스코페’입니다. ‘에피스코페’는 본래 ‘찾아옴’, ‘와서 무언가 지도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감찰한다는 의미를 갖기도 하고, 목회서신들에 보면 이 단어가 ‘감독’이라는 직분을 말할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찾아오심이라는 의미로 ‘보살핌’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개역개정 성경의 각주에 보면 ‘심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두 가지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도우시기 위함이고 하나는 심판을 위함입니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예레미야에 나타난 심판을 ‘에피스코페’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에피스코페’의 두 가지 의미 모두를 담고 이 말을 사용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은 지금 심판 받을 날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멸망당하게 될 예루살렘,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멸망당할 예루살렘을 위해 우십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42절에서 평화가 지금은 예루살렘의 눈에 숨겨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겉으로 드러나게 될 ‘에피스코페’는 분명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여지겠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보살핌을 뜻하는 ‘에피스코페’가 숨겨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는 실패도 경험하고 좌절도 경험합니다. 지금 예루살렘의 상태와 같이 완전히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지금까지 쌓은 모든 것이 0이 되어버리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단순히 세상의 악에 의해서 악한 누군가에 의해서, 세상의 폭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면,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실패한 나, 망해버린 나, 재기할 수 없는 나만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그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개입은 그저 무너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무너짐은 다시 일어서기 위한 무너짐이고, 지금의 실패는 더욱 큰 평안을 위한 실패입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습니다. 폐허가 폐허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패가 실패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좌절이 좌절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함을 위한 쓰러짐입니다.

맺는 말

더욱 큰 평안을 위한 좌절, 아픔, 쓰라림, 실패, 어쩌면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성경에 대해서 불만과 분노를 느끼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지금의 나는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가를 외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울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루살렘을 위해 눈물 흘리시는 분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 눈물 흘리고 계십니다. 또한 그 분의 눈물은 그저 동정의 눈물, 나의 아픔을 동조하는 눈물일 뿐 아니라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는 눈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 눈에는 평화가, 평안이, 복이, 은혜가 안보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평화의 때, 보살핌의 때가 언제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 옵니다. 그 때는 분명 옵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했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다 무너져버린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좌절과 절망보다는 오히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는 평화를 외쳤던 것처럼 예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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