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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풀 한 알세월따라 역사따라 2
박준성 | 승인 2018.02.13 22:37
월간 <작은책>에 한 동안 ‘세월따라 역사따라’를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내 살아온 소소한 경험이 역사와 어떻게 얽혀 있나 연관시켜 보면서 ‘자기 역사쓰기’를 해보자는 꼭지였습니다. 연재를 하다가 소중한 지면을 오래 차지하는 것도 보기 좋지 않아 그만 두었습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파일을 추려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어떤 글은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지만 내가 봐도 재미 있는 것도 있습니다. 순서 없이 썼던 글들을 내 삶의 궤적을 따라 시대 순으로 다시 써보려고 합니다. 다른 곳에 실었던 글들도 더러 있습니다. 가까이 모아 놓고 미쳐 쓰지 않았던 과거사의 빈 부분은 짬짬이 보충하려고 합니다. - 박준성(역사학자)

 

▲ 박준성. 현장에서 요구하는대로 강의하러 다니고 역사기행을 기획하고 안내하느라 바쁘게 지낸다.

얼마 전(2005년) 경기도 하남에 있는 대안학교, 푸른숲학교에서 가을 운동회를 했다. 2학년 선경이 동생 예원이가 엄마 아빠 언니를 따라 유모차를 타고 학교에 왔다. 태어난 지 14개월 된 예원이가 볼에 밥풀 한 알 붙이고 방긋방긋 웃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예쁜던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예원이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밥에 얽힌 이런저런 일들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밥알 한 알로 평생 잊지못할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 아버지는 바라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듯 무서웠다. 반면에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작은 아버지는 내게 싫은 소리 한 번도 한 적 없이 따뜻하게 잘 대해주셨다. 작은 아버지 신혼 초에 초등학교 입한 한 지 몇 달 안 된 나를 머나먼 근무지 학교로 전학시켜 데리고 갔을 정도로 아꼈다. 갓 혼인하여 신혼 생활을 하던 작은 엄마는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을까. 우리 엄마는 초등학교 막 입학한 아들을 떼어 보낸 이 일을 평생 후회스런 일로 꼽았다.

작은 아버지가 고향에 있는 초등학교로 돌아와 근무할 때는 이따금 점심 먹으라고 학교 뒤에 살던 관사로 불렀다. 작은 아버지 못지 않게 조카를 특별히 이뻐해준 작은 엄마가 쌀밥에 달걀찜도 하고 김도 구워 상에 놓아 주셨다. 평소 집에서는 거의 못 먹어보던 밥상이었다.

어느 날 맛있게 점심을 먹고 숟가락을 놓았는데 작은 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면서 한 마디 툭 던졌다.

“준성아, 밥그릇에 밥풀 한 알 남겼네”

집에서 밥알 남겼다고 아버지 한테 혼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싫은 소리 한 번 안하던 작은 아버지가 밥풀 한 개 남겼다고 한 말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 뒤 어쩌다 나도 모르게 밥그릇에 밥풀을 남긴 것을 볼 때마다 이 말이 떠올랐다. “밥풀 한 개 남겼네”하는 작은 아버지 말 한 마디가 날마다 먹는 밥과 밥풀 한 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준 교과서보다 중요한 깨우침이었다. 평생을 밥 먹고 나서 밥그릇에 밥풀 한 개 붙여놓지 않았나 돌아보게 하는 말이 되었다.

<흥부전>에서 흥부는 쌀 되박이라도 얻어 보려고 형 놀부 집에 갔다가 형한테 도끼자루 몽둥이로 흠씬 얻어맞고, 밥 냄새에 환장하여 부엌으로 갔다.

“애고, 형수씨, 밥 한 술만 주오. 이 동생 좀 살려 주오”

'이년 또한 몹쓸 년'이라 밥 푸는 주걱으로 흥부 뺨을 때렸다. 흥부가 볼때기에 붙은 밥풀을 입으로 훔쳐 넣으며 하는 말이 참으로 서럽고 서럽다.

“아주머님은 뺨을 쳐도 먹여 가며 치시니 감사한 말을 어찌 다 하오리까. 수고스럽지마는 이뺨마저 쳐 주시오. 밥 좀 많이 붙은 주걱으로. 그 밥 갖다가 아이들 구경이나 시키겠소”

자기 땅 한 뙈기도 없고 남의 땅 빌어 부치지도 못하던 흥부 아내와 흥부는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오만 일들을 하였다.

“흥부 아내 응순하고 서로 나서 품을 판다. 용정하여 방아 찧기, 술집에 가 술 거르기, 초상난 집의 제복 짓기, 대사 치르는 집 그릇 닦기, 굿하는 집 떡 만들기, 시궁 발치 오줌 치기, 해빙하면 나물 캐기, 춘모 갈아 보리 놓기, 왼가지로 품을 팔고, 흥부는 이월 동풍 가래질하기, 삼사월에 부침질하기, 일등 전답 모눈 갈기, 이집 저집 이엉 엮기, 날 궂은 날 멍석 맺기, 시장 가에 나무 베기, 무곡 주인.역인 서기.각읍 주인 삯길 가기, 술밥 먹고 말짐 싣기, 오 푼 받고 마철 박기, 두 푼 받고 똥 재치기, 한 푼 받고 비 매기, 식전이면 마당 쓸기, 이웃집 물 긷기, 전주 감영 돈 짐 지기, 대구 감영 태전 지기, 왼가지로 다하여도 굶기를 밥 먹듯 하여 살길이 없는지라...”

조선후기 ‘비정규직 농민’이면서 임금노동자들이 등장하던 초기 품팔이 노동자들이 하던 일들이다. 이렇게 일하고도 한 끼 밥 배불리 먹지 못하였다.

이런 배고픈 사람들이 오래 동안 그리던 해방 세상의 모습은 어땠을까. 생일 명절 잔치 제삿날이 아니라도 기름이 반지르르 흐르는 쌀밥에 고깃국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 어떤 쌀밥과 고깃국인가. 밥그릇에 밥을 고봉으로 담아 안에 담김 것 보다 밖으로 쌓인 밥이 더 많은 쌀밥이고, 국그릇에 고기가 그득하여 중간에 숟가락을 꽂아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을 만한 고깃국이다.

그러한 쌀밥과 고깃국은 고등학교 때부터 10년이 넘게 자취를 하며 배고프게 공부를 할 때 배불리 먹고 싶던 내 꿈이기도 했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그 꿈은 라면 두 개에 큰 도시락 하나 말아 먹는 것으로, 어쩌다 중국집에서 짜장면이나 짬뽕 곱배기 두 개에 보통 한 개 더 비우고 배를 쓰다듬는 것으로 채우곤 했다. 한창 젊었을 때는 한번에 막국수 여섯 그릇이나 잔치 국수 여덟 그릇은 먹어야 흡족하게 먹었다고 하던 시절 얘기다.

1980년대 초, 이야기 할 곳을 찾아 산을 오르고 골짜기에 숨어 모이던 시절, 경기도 의정부 골짜기로 수련회를 갔다. 강원도 춘천에 연고를 가지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던 ‘투사’들, 나처럼 공부하면서 운동을 넘겨다보거나, 먹고 사는 일로 앞장서지는 못하고 언저리에서 도움을 주던 사람들이 모였다.

둘째 날이었다. 그때 그곳에서 제일 나이가 많았던 선배가 오전 내내 도랑가에서 모래를 조리질하고 있었다. 누가 아침밥을 하려고 도랑가에서 쌀을 일다가 한 움큼 쏟았다. 도랑물 속 모래에 쌀알이 허옇게 섞여 있었다. “누가 쌀 귀중한 줄 모르고 이렇게 버리는 거야”하며 화라도 냈으면 시원할 것을, 한마디 말도 없이 쭈그리고 앉아 쌀이 섞인 모래를 일고 있으니 모두들 좌불안석이었다.

점심 먹고 나서 가톨릭 농민회 운동을 하던 그 선배에게 쌀 한 알 만들어 내는 데 농민들의 손길이 얼마나 가야하는지, 왜 쌀은 그냥 밥 만드는 재료가 아니라 생명의 핵심인지 하는 강의를 실감나게 들어야 했다.

의정부 수련회가 끝나고 나서부터 ‘수채 구멍에서 밥알 뒤져 먹다 급체해서 뒈질 놈’이라는 욕을 될 수 있으면 안 쓰기로 하였다. 그 즈음 전두환이나 독점 재벌, 미 제국주의자들과 그 똘마니들에게는 이러한 고상한 욕조차 가당치도 않았지만, 아무리 욕을 먹어도 쌀 인간들이라도 ‘밥알’이 들어가는 욕을 한다는 것은 밥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밥’은 '숨'과 함께 목숨을 이어나가는 생존의 기본이었으며, 해방 세상의 알맹이였다. ‘밥 먹고 살 일’이 걱정인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은 목숨의 원천이었다. 거저 얻을 수 없는 노동의 땀방울이기도 하다.

진보니, 변혁이니, 해방이니 말은 번지르르 잘해도 밥 소중한 줄 모르고 밥 먹고 밥그릇에 밥 알 허옇게 남기는 사람들을 보면 말까지도 미덥지 않았다. 쌀 한 줌 밥풀 한 알을 시답지 않게 생각하는사람들은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면에서 밥은 사람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재보는 가늠자이기도 하다.

지난해 가을부터 푸른숲학교에서 일주일에 하루 목공을 가르치며 아이들과 점심을 같이 먹는다. 두 상에 여덟 명이 다 차면 손에 손을 잡고 감사 노래를 부르고 나서 밥을 먹는다.

“소-중-한-음-식, 귀한 음식 주셔서 고맙습니다.”

목숨의 근원이며, 노동의 땅방울이고, 사람다움을 가르치는 교과서인 밥을 먹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이 아이들에게 ‘밥풀 한 알 남겼네’ 같은 가르침을 주고 있는지, 내 목공예 수업을 밥풀 한 알에 비춰보곤 한다.

“예원아, 얼굴에 밥풀 한 알 붙였네”

예원이가 열 살쯤 되었을 때 아저씨가 이런 글 썼다고 이야기 할 수 있으려면, 하루하루 밥 먹을 때마다 소중한 음식, 귀한 음식 좀 적게, 천천히 꼭꼭 씹어서 밥풀 한 개 남기지 말고 잘 먹어야 하겠다. 요즘 먹는 일에 조심성이 좀 떨어지는 것 같다.

박준성은 1956년 1월 강원도 홍천 서석 조그만 동네에서 태어났다. 강원대학교, 서울대학교 대학원, 성균관대교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공부했다. 1984년부터 서울대 도서관 규장각 조교로 일했고, 대학 강의와 노동자 민중교육을 시작하였다. 동료들과 1988년 구로역사연구소(현 역사학연구소), 2003년 노동자교육센터를 만들어 연구원,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준성의 노동자역사이야기>, <슬라이드 사진으로 보는> 노동운동사 같은 책을 썼다. 여전히 현장에서 요구하는대로 강의하러 다니고 역사기행을 기획하고 안내하느라 바쁘게 지낸다.

박준성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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