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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세상(누가복음 20장 34-36절)사순절 성서 묵상 ②
이성훈 | 승인 2018.02.18 22:47

사순절 둘째 주일입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당연히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과 이들을 뒤에서 용인해주고 있었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좋지 않게 보였고, 이들은 예수님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20장 처음에서 이들은 이런 행동을 보이고 있는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권위는 어디에서 왔느냐?’고 역으로 질문을 하시며 이들이 대답하기 곤란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마태복음에서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 주인에게 열매를 바치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주제가 중심이었다면, 누가복음은 우리가 흔히 설교를 통해 들어서 알고 있는 해석, 먼저 선택받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받은 것을 독차지 하려고 포도원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였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지금의 제사장들, 서기관들과 대치중인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은 분명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비판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비유의 말씀을 들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화가 나서 또 다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예수님께 던집니다. ‘가이사, 시저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길게 설명을 드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늘 드리려고 하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사두개인들의 공격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던진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이라는 난감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는 재치 있는 답변으로 응수 하십니다. 그러자 이제는 사두개인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에게는 랍비에게 어떠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질문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두개인들의 이런 행동은 공격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지금 상황 속에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다분히 공격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이 던진 질문은 부활 후에 사람들이 어떻게 되냐는 것입니다. 질문의 내용은 신명기 법에 따른 형사취수제에 대한 문제입니다. 형사취수제에 대해서는 신명기에도 나타나지만, 룻기에서도 이야기 형식으로 이 법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형사취수제는 결혼한 형이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에 과부가 된 여인이 재산권, 상속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취해서 자식을 낳도록 해야 한다는 법입니다.

이 법은 재산권이 없이 방치된 과부를 돕기 위한 법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남자 형제가 없어 상속권을 갖지 못하게 된 슬로브핫의 딸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모세에게 자신들의 문제를 이야기했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우 여성들에게 상속권을 주라고 명하십니다. 다만 상속 받은 여성은 다른 지파의 사람과 결혼할 수 없는 제한이 생깁니다. 과거에 아들은 당연히 상속권을 가졌고, 아들이 없는 경우에 딸들도 상속권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자식이 없는 과부의 경우에는 어떠한 재산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과부들을 보호하는 정책이 형사취수제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이런 형사취수제와 부활을 연결시킵니다. 첫째 아들과 결혼한 여인이 자식을 갖지 못한 채 남편이 죽어서 둘째와 다시 결혼하고, 또 자식이 없이 둘째가 죽고, 이런 식으로 일곱 형제와 다 결혼했는데, 부활하면 누구의 부인인 것이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 사두개인들은 27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부활은 없다는 주장을 하려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질문 속에서 나타난 형사취수제는 과부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이라기보다는 대답하기 어렵게 만들려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해서 사두개인들을 꼭 나쁜 사람들로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들을 랍비에게 던지고 랍비들은 성경적으로 이를 해석해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들이 모여진 책이 탈무드입니다.

부활

지금 사두개인들이 던지고 있는 부활에 대한 질문은 엘리야가 행한 이적이나 엘리사가 행한 이적처럼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의미를 가진 부활에 대한 단순한 질문은 아닙니다. 종말 이후, 하나님의 심판 이후, 새 나라가 되었을 때에 일어날 부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 특히 예언서에는 종말의 때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종말, 하나님의 거대한 심판 이후에 남은 자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 이후에 선한 자들이 남게 된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여기에 추가하여 죽었던 자들 중에서 선택받은 자들은 다시 살아나고, 그들도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구약 예언서 대부분은 남겨진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멸망하지 않은 사람들, 죽음에 이르지 않은 사람들이 새 나라를 차지하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들의 환상이나 다니엘 12장 2절에 ‘그 때에 죽은 자들 중에서 살아나는 자가 있으리라’는 예언은 남겨진 자들뿐만 아니라 이미 죽었던 자들 중에서도 새 나라를 차지하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사두개인들이 믿지 않았다는 부활은 그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부활이 아니라 지금 말씀드린, 종말의 때에 죽었던 자들이 무덤을 열고 일어나는 일은 없으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은 멸망하지 않고, 죽지 않고 심판의 때를 넘기리라는 생각에 더 중점을 둔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비교하여 볼 때, 누가복음은 사두개인들의 이런 생각에 특별히 반대를 하지는 않습니다. 누가복음 역시도 전통적인 예언서의 견해를 따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복음의 경우, 예수님께서 숨지시는 순간에 무덤이 열리고 성도들이 깨어났다는 이야기를 첨가합니다(마27:52). 이는 마태복음이 에스겔이나 다니엘의 부활 사상, 종말 사상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는 그런 이야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대답

누가복음이 종말에 대해 어떤 생각,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도 흥미로운 주제이기는 하지만, 이 말씀에서 우리가 집중해서 생각하려는 것은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오늘 본문, 부활 논쟁에 대해서는 공관복음서에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누가복음만 약간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사실 이 본문은 목회자로서 저에게 약간의 혼동을 주는 본문입니다. 저희는 죽으면 천국에서 먼저 떠난 이들을 만나서 그들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고 있는 천국을 생각해보면 그 곳에서는 남편도 부인도 없고 모두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렇기에 가족들을 만나게 될지, 만나지 못할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오히려 만나려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목회자로서 성도님들께 드리는 말씀과 다르기 때문에 많이 고민이 되기는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그런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사두개인들이 왜 형사취수제를 이야기했고, 예수님의 대답 다음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선 사두개인들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심판 이후에 이 땅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이라는 사상 속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37절 이후에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이라고 하시면서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죽은 자의 하나님이실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생각하기 죽은 사람들, 우리가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하나님 안에서는 모두 살아있다. 즉 하나님에게는 죽음이라는 개념도 무의미하고 그렇기에 부활이라는 개념도 무의미해집니다.

그런데 그 전에 이미 하나님 나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어떤 곳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인 34-36절은 정말로 허를 찌르는 대답입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갑니다. 이들이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 시대에도 우리는 결혼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보통 결혼을 해야 사람이 안정적이고 잘 살게 된다고 말하지만, 제 주변에 아직 결혼 안한 친구들을 보면 더 안정적이고 더 즐겁게 사는 친구들이 많아 보입니다. 자식이 없으면 말년에 힘들어진다고도 말합니다만, 자식이 있어도 자식에게 버림받고 말년에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결혼에 대한 특정한 이유가 없다면 그 결혼은 흔히 말하는 눈에 콩깍지가 껴서 하게 된 결혼일 것입니다.

지금은 결혼의 이유에 대해서 뭐라고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만, 예수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아야만 자신의 대를 이을 수 있었고, 또 노동력을 창출해 낼 수 있었습니다. 자식을 낳는다는 행위는 비용을 들이지 않고 재산을 얻는 수단이었습니다. 여성의 경우 결혼을 하지 않으면 삶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형제가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속권이 없었기에 여성은 결혼을 해서 남편을 만들어야만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장가를 가고 여자는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그곳은 재산 축적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노동력을 창출하기 위해서 자식을 만들어야 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대를 잇기 위해서 자식을 낳아야 하는 사회도 아닙니다. 여성이라고 해서 생존권을 갖추기 위해서 남편을 얻어야만 하는 곳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이가 천사와 동등하기에 동일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곳에서 결혼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신의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해서, 재산권을 얻기 위해서 일곱 형제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여인도 그곳에서는 더 이상 누군가의 아내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구나 생존권을 갖고 있고, 누구나 평안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두개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도대체 어떤 곳으로 생각하기에 이 여성이 남편에게 의지해야 하고, 남편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역으로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더 이상 삶을 위해서 버둥거릴 필요가 없는 나라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 나라에서 살아갈 권리를 얻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활입니다.

우리의 이야기

재작년, 작년을 이어 올해에도 나라 경제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려운 경제 속에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쉽게 돈을 벌기 위해서 투기라는 행위를 벌입니다. 내 자식을 위해서 또 내 노후를 위해서, 또 내 삶을 위해서 투기를 합니다. 그 결과 강남의 집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젊은이들은 비트코인에 투자하여 많은 돈을 잃었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권을 잃어가고 있고, 그 생존권을 돌려달라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의 생존권이 보장받는 사회는 이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멀어 보입니다.

이런 대한민국에 부활이 있을까? 모든 사람이 생존권을 보장받고, 모든 사람이 평안하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을 보장받는 그런 나라가 될 수 있을까? 그런 나라는 오직 죽은 후에 가게 되는 천국에서밖에 이루어질 수 없을까? 저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여러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이 땅에서도 부활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오늘 본문 3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이라는 단서를 제시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그 앞에 여러분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함으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을 통해서 이 땅도 부활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을 넘어서 삶에 평안을 얻는,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는, 아니 행복을 얻으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시며, 예수님 말씀 따라 살아가셔서 여러분께서 먼저 이러한 부활을 얻으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부활을 이 땅에서도 이루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이 땅이 참된 하나님 나라,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고 고통 받지 않으며, 자신의 생존권, 재산권을 위해 울부짖지 않는 나라가 될 줄 믿습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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