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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움이 없으므로”-其無私邪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07
이병일 위원 | 승인 2018.02.19 22:36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 되었다. 능히 하늘 땅이 길고 또 오랠 수 있는 것은 바로 제 뜻대로(자기만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래 살 수 있다. 이런 까닭에 聖人은 몸을 뒤로 하지만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멀리하지만 그 몸이 존재한다. 이것은 그 사사로움이(邪慝함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
- 노자 『도덕경』, 7장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인류 역사에서 백성을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통치자의 사사로운 욕심에서 시작되고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정치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백성이 사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와 법을 요구하는 명분이 질서회복이지만, 현실적으로 백성은 예와 법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강제하는 방법을 고안하였으니 그 수단이 상(명예와 벼슬)과 벌입니다. 덕치(德治) 즉 예로 다스리기를 주장한 공자는 체벌적 형법보다 우선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먼저라고 합니다. 공자는 수치를 알 때 사람이 바르게 된다고 했는데, 수치는 도덕의식을 지니지 못한 사람에게 당연히 따르는 불명예입니다.

그러나 수치심 역시 도덕의식을 고양하기 위한 일종의 심리적 형벌입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결국 백성의 복종을 얻기 위해 강압 설득 회유 협박하는 과정이니, 미(美)와 선(善)을 알리는 것 또한 설득과 회유의 과정입니다.

자기를 이롭게 하려는 행동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이로운가?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들, 재화, 출세 등이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것인가 생각을 해봅시다. 재화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에 집착하는 마음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사사(私邪)와 사(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사사로움은 개인적인 이기심인데, 그것도 착각하고 있는 이기심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무엇인가 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사로움을 버리는 것이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남한에서는 이전의 권력자들의 범죄가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이전 대통령들을 비롯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하는 공직자들이 자의든 타의든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공공의 적이 되고 있습니다. 최고권력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남용하여 사사로움을 버리지 못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개인의 욕망을 추구함으로써 모든 분야에서 비리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국민들을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했고,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게 만들었습니다. 이참에 권력형 비리인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현 정부는 그 권한을 제대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 내었다 //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 들었다 //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
​사람들에게도 /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게  있다는 것을, //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 나희덕의 시 “길 위에서”

하늘과 땅은 길고 오랠 수 있는 까닭은 하늘과 땅이 제 뜻대로만(자기만을 위해서) 살지 않기 때문이고, 사사로움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그 끝이 분명하고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과정은 각자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과 사명을 이루는 과정인데, 그 목적과 사명은 모든 사람과 생명을 위해서 무엇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온 목적, 이 땅에 살면서 이루려고 했던 그 꿈을 발견하고 따라가는 길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혹은 하루아침에 깨달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로마 식민지의 변두리 작은 마을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아이, 그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던져진 숙명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나는 무엇 하러 왔나?’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기 위해 애쓰는 일입니다. 그것을 찾고 깨닫는 일뿐만 아니라 그 생각 자체를 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특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 내 힘이나 노력으로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는 시대에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것은 관념적 유희나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장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 급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의 압제에 신음하는 식민지적 현실, 예루살렘으로부터 극심한 차별과 멸시를 당하는 갈릴리, 하루하루의 일거리를 찾아야 하는 날품팔이 목수. 그러한 상황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나 환경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선포로 시작하는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요즘 우리의 시간과 공간은 새로운 흐름으로 화들짝 놀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옛 조상들의 노력과 우리들의 노력과 우리 아이들의 노력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만들어낸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의 노력이 저 아이들의 시대를 조금이나마 빛나게 하고, 그런 우리의 시대를 저 아이들이 기억한다면, 우리는 서로 시간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세상에 온 목적과 진정한 사명을 찾아 행하는 일은 나와 우리 아이들과 이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나는 무엇 하러 왔나?” 중에서

이병일 위원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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