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독립 위해 공산주의를 택했던 여성들 이야기

정초 이틀에 걸쳐 두 권으로 된 장편소설 『세 여자』를 읽었다. 이은선 교수가 오래 전 사왔고 그녀의 손때가 묻은 책으로서 방 한 쪽에 뒹굴고 있었다. 일전에 새길 교회 설교 갔을 때 한완상 선생께서도 흥미롭게 읽었다 하며 권하던 책이었다. 하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필자가 공동대표로 있는 ‘열린 포름’에서 저자 조선희를 모셔 본 책을 주제로 토론할 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일이 생겨 갈 수 없었다. 내심 이 책과는 인연이 없다 싶어 마음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주일 오후 갑작스레 이 책이 내게 찾아왔다. 몰입하여 읽었고 도중 몇 번씩이나 가슴을 쳐야했다. 나라 독립을 위해 이들이 택한 삶이 너무도 기구했던 탓이다. 문학적 감각보다는 역사를 배우는 느낌으로 읽었다. 본 책이 역사적 실존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했기에 더욱 그랬다. 오늘 우리들 현실이 거져 주어진 것이 아님을 새삼 느끼게 하였다. 아마도 나에겐 이 땅, 우리들 현실을 달리 생각하고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좋은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 책은 출신 성분이 다른 세 여성들의 역사적 삶을 기초로 쓰인 장편소설이다. 저마다 유복한 집안에서 남다른 재능을 갖고 태어났으나 일제 치하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택하여 민족독립의 길을 갔던 여성들 이야기이다. 순수 공산주의 이념을 갖고 민족 독립은 물론 계급독립까지 꿈꿨던 이들 여성들과 그들 짝이 된 세 남자들의 삶이 얽혀진 아픈 역사를 기술했다.

평생 독립을 위해 살았음에도 비방과 시기, 모함, 때론 전향 등의 이유로 옥살이는 물론 병으로 고생했으며 부모와도 등졌고 자식을 잃었으며 남편과 헤어지는 모진 아픔을 당해야 했다. 경성에서 시작된 이들 삶은 상해, 모스크바 등에서 활동했으나 각기 남한과 평양 그리고 카자흐스탄의 낯선 오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세 여자의 남편들은 남노당의 대표였던 박헌영을 비롯하여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한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부모와 결별했고 남편을 잃었으며 자식마저 떠나보냈던 여성들, 그 모진 세월 속에서 갈등하면서도 이들이 붙잡았던 공산주의 이념, 그것은 남쪽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낯설었고 모르는 영역이었다. 우리가 배운 것은 일본에 맞선 저항적 민족주의가 고작이었고 기독교인의 경우 서구 선교사들의 시혜적 활동이 전부였다.

하지만 기독교는 물론 민족주의 진영과도 결별한 채 공산주의 이념을 택해 살았던 여성들의 삶이 우리 역사의 일부인 것을 배우며 새삼 놀랐고 부끄러웠다. 공산주의 이념을 공유했으나 그 속에서 다시금 성차별을 겪어야하는 이들의 갈등과 참고 견디며 극복하려는 白死千難의 노력에 고개를 떨구어야만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역사가 쓰였고 오늘이 있음을 절감한 까닭이다.

본 책은 청계천 개울가에서 단발머리 상태로 발 담구며 환담하는 사진 속의 세 여성들, 신여성의 이상을 품던 혼전의 풋풋한 여인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전통의 굴레를 벗고 새 세상을 호흡하는 짧은 머리 여성들은 화젯거리였다. 하지만 당대 신여성의 상징인 나혜석처럼 여성의 자유, 해방만을 추구하지 않았다. 말했듯이 자유로운 사랑을 꿈꿨지만 조국이 먼저였고 이념을 우선시 한 탓이다.

세 여성 이상으로 이들이 선택한 세 남자들 역시 우리 역사의 핵심인물들이나 여성작가가 쓴 이 책은 세 여성에 초점을 두었다. 동일 이념을 품고 같은 시대를 살았으나 여성의 삶이 한층 더 어렵고 힘겨웠으며 아팠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밖에서는 동지로 지났으나 집에서는 아내라는 인습적 가치를 수행한 여성들의 이중고통이 너무도 잘 적시되었다. 자식을 낳고 키우고 잃는 과정에서, 자기 일(使命)을 좆는 남자들과 달리 가정을 지키려는 노력에 있어 남녀 차(差)가 적지 않음도 서술되었다.

물론 이것이 주제는 아니겠지만 성(性)을 혁명하는 일이 공산주의 혁명 이상으로 어렵다는 것을 여성작가는 은연중 여러 곳에서 암시했다. 필자 역시 이 세 여성들의 투사적 의미만큼 여성으로서의 아픔을 같이 느끼며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을 통해 내 삶을 재발견한 결과일 것이다. 같이 30년을 교수로 살았으나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한 여성의 삶이 얼마나 더 지난했을까를 생각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여성 주세죽, 남노당의 책임자 박헌영을 남편으로 맞아 일평생을 혁명가의 아내로 살면서 옥바라지를 감당했다. 모두가 욕심내는 학력과 아름다움(美)를 지녔음에도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를 선택한 그녀의 운명은 참혹했다. 공산혁명을 위해 남편 박헌영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

본래 기독교 신앙을 지녔으나 민족해방과 여성해방 그리고 계급투쟁을 위해 몸담았던 기독교를 버려야만 했었다. 공산주의의 시각에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일제와 타협한 종교였던 까닭이다. 카츠라-태프트 밀약에 근거 일본의 한국 통치를 전제로 이 땅을 밟았던 기독교, 그 종교에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남편 박헌영이 기약 없이 감옥에 갇혔고, 생사를 모를 정도로 연락이 두절 되었을 때, 한 점 혈육인 딸을 홀로 두고 스탈린의 이주 정책에 의해 유배를 떠나야 했을 때 그녀를 지켜준 것은 하느님이었다. 그녀가 의지했던 하느님을 공산주의자 박헌영도 고맙게 생각했다. 해방 이후 박헌영의 위세는 한 때 대단했으나 주세죽은 카자흐스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살아 생전 그녀는 모스코바 보육원에 맡겨진 딸을 한두 차례 밖에 만나지 못했다. 감옥과 같은 유배생활이 모스코바를 방문할 여지를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훌륭한 무용수로 자란 딸에게 어머니 주세죽은 아버지를 버리고 친구 남편과 결혼한 부도덕한 존재로 기억되었다. 어머니 죽음도 외면할 정도로 그렇게.

본래 박헌영과 함께 상해에서 경성으로 잠입하려 했으나 남편의 간곡한 만류로 주세죽은 딸과 함께 모스코바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남편의 감옥생활로 기약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러 주세죽은 ‘세 여자’ 중의 한 사람인 고명자의 남편 김단야와 결혼했다. 후일 이 사실을 알게 된 박헌영, 조선 공산당 최고 책임자로서 유배 중인 아내를 한조선 땅에 데려 올 수 있었으나 그토록 만나기를 원했던 주세죽의 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자신의 모진 삶을 이해 못한 그를 원망하는 것도 잠시, 박헌영이 결국 김일성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기막힌 소식을 이어 접했다. 평생 공산주의 혁명을 꿈꾸던 박헌영이 공산당 내부의 권력다툼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일제마저도 피해간 죽음을 몸 바친 공산주의에 의해 맞게 된 모순에 주세죽은 몸을 떨었다.

이렇듯 남편의 거절과 죽음으로 병세(폐염)가 악화된 주세죽은 하느님을 부르며 카자흐스탄에서 죽었고 낯선 땅에 묻혔다. 해방된 조국, 자신이 살던 경성을 죽어서도 올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 살면서 대나무처럼 곧게 살라고 부모가 지어 준 이름 ‘세죽’(世竹)처럼 그녀는 그렇게 살다 갔다. 하지만 박헌영 이상으로 그녀 역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역사가 되었다.

두 번째 여인은 허정숙이다. 이들 세 여자 중 가장 자유 분망한 성격을 지녔고 그나마 해피엔딩으로 삶을 마감한 사람이었다. 물론 김일성 치하에서 살아남은 상태로 말이다. 동지를 적으로 만드는 공산파벌 싸움에서 김일성의 후원으로 90세를 넘겨 살았다. 그가 원했던 공산주의는 아니었으나 평생 믿었던 그 이념체제 하에서 살아봤으니 세 여자 중에서 가장 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하튼 그녀는 공식적으로 세 사람과 결혼하여 배다른 자녀 여럿을 두었다. 당대 애국 판사이자 변호사였던 아버지 딸로 태어나 민족의식을 배웠고 기독교를 비롯한 신식학문을 배웠으나 허정숙의 가슴을 불태웠던 것은 주세죽처럼 공산주의였다. 애시당초 주세죽에게 공산주의 이념을 가르쳐 지키게 한 사람이 바로 허정숙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공산주의 이념에 투철했다.

허정숙은 조선의용대의 한 구성원이었고 여성 몸으로서 일본군을 상대로 무력투쟁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는 세 여자들 중에서 항시 앞서간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공산주의자로서 민족해방과 계급투쟁만을 위한 삶을 살지 않고 여성해방 또한 몸소 실천하였다. 평생 동지였던 남편을 떠나 새로운 사랑을 꿈꿀 수 있을 만큼 자기 삶을 해방시켰다. 비록 재혼했으나 주세죽이 남편 박헌영을 사랑하고 그의 가정을 지키려 했던 것과는 다른 삶을 살았던 것이다.

주세죽의 남편 박헌영과 김일성 사이에서 허정숙은 김일성 편에 섰다. 정치적으로도 이념보다 현실에 무게를 둔 결과였다. 물론 허정숙 역시 38선 이북 땅에서 공산주의 이념실천의 한계를 처절히 경험했다. 김일성의 정적들이 하루아침 형장에서 죽는 모습을 수차례 목도한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현실과 이념은 다를 수 있다고 자신을 다독거렸다.

세 번째 결혼했던 남편이 김일성의 손에 처형되는 것을 보면서도 허정숙의 선택은 다르지 않았다. 당 선전부장으로서 수미일관 김일성을 홍보했고 그의 정책을 알렸다. 그 결과 허정숙은 김일성의 신뢰 하에 자식들을 곁에 둔 채로 긴 여생을 마칠 수 있었다. 38선 이북이긴 했으나 그래도 조국에서 말이다.

고명자는 세 여자 중 마지막 인물이다. 만석꾼 자식으로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한 외동딸이기도 했다. 동학 천도교 계열에서 세운 여고를 나왔던 탓일까 그녀 역시 세상을 달리 보는 눈을 가졌다. 자신의 몸종에게 연민과 사랑을 갖고 살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녀가 공산주의 이념 신봉자가 된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고명자가 세 여자의 한사람이 된 것은 바로 주세죽과 허정숙과의 친밀한 사귐 때문이었다. 이들 셋이 밝은 대 낮 머리 자르고 청계천에서 노닐 수 있을 만큼 이들은 서로 좋아했다. 이중 막내인 고명자는 공산주의에 관한 한 두 언니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학습했다. 처음 두 언니들은 무산계급인 대 주주의 딸인 그녀가 자신들 생각을 따를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공산주의를 진지한 학습을 통해 충분히 내면화시켰다. 부모를 속이고 공산주의자 김단야와 동거한 것도 이런 학습 및 두 선배들의 영향 탓이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남편과 함께 공산주의를 연구하고 마르크스-레닌 이론에 심취했던 것도 이런 맥락이다. 여기에는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형제들을 눈속임할 목적도 있었다. 공산주의 본고장인 모스크바에서 얼마든지 동지이자 부부로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함께한 시간도 길지 못했다. 고명자의 귀국 후 그곳에 남은 감단야는 주세죽과 결혼했고 주세죽과 함께 박헌영의 아이를 키우다 병사하고 말았다. 당시 옥중에 있던 박헌영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후일 고명자 역시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좌절했다.

남쪽 땅에서 지나던 고명자의 삶도 피폐하긴 마찬가지였다. 옥고를 치렀고 경제적 어려움도 컸다. 부모의 손길로부터도 멀어졌다. 공산주의자인 자신을 돌볼 길이 없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대표 33인인 중 한 사람이던 박희도 목사의 권유로 친일 잡지를 만들며 삶을 영위했다. 일종의 변절인 셈이다.

해방 후 건국준비 위원장으로서 좌우합작을 시도한 여운형 편에서 일하지만 과거 전력 탓에 어려움을 면할 수 없었다. 찬탁/반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운형이 살해된 이후에도 그녀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운형 편을 들었다하여 우익 정권에 의해 모진 핍박을 당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해방 후 자신의 고향 남쪽 땅에서 생을 마감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녀에게 행운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의 이념적 고향이 소련이고 북한이었으니 말이다. 자신의 본뜻을 접은 채 남쪽에서 해방을 맞았고 좌우합작을 위해 일하다가 결국 이승만 정권 하에서 죽음을 맞이한 고명자는 다른 두 여인처럼 제국주의의 희생양일 것이다.

본 책에서 상해 임시정부 의장이었던 김구는 해방 후 이승만과 함께 우익의 대표자로 평가된다. 물론 이승만과는 많이 다르겠으나 민족주의 계열에 서서 공산주의를 배격했고 이들의 공을 빼앗는 우익 정치가의 한 표상이었다. 해방 후 좌우익이 서로를 향해 죽고 죽일 때 김구가 속한 정당 역시 좌파 정치인들을 살해했다. 우익 정치가 김규식이 좌파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듯이 좌익인 여운형 또한 찬/반탁 싸움 와중에서 우파들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한때 박헌영 등의 공산주의자들은 일본 정부요인들을 암살한 우익들, 즉 민족주의자들을 높이 평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계급모순에 무심한 이들과는 운동은 같이하되 삶은 나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함께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이들이 해방 후 우/좌파로 나뉘어 싸운 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깝다. 독일처럼 패전국 일본이 분할 통치 되었어야 함에도 식민지였던 한반도 땅을 분열시킨 책임이 외세와 함께 일정 부분 우리들 몫이 되었으니 말이다. 함석헌의 말대로 분단은 세계사적 적폐의 결과물이자 우리 민족이 감당할 죄책고백이 되었다. 분단의 족쇄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푸는 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들의 책무라 할 것이다.

본 책의 주인공 ‘세 여자’들처럼 그렇게 우리도 새로운 독립, 곧 통일을 위해 뜻을 세워 살 필요가 있다. 이 시대의 독립운동은 통일 운동인 탓이다. 아직 스스로 서지(獨立) 못한 나라가 목하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남남갈등, 정치적 정쟁은 ‘스스로 서기’위해 그쳐져야만 한다. 평창 평화 올림픽마저 정쟁 대상으로 삼는 것은 선혈들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세 여자’의 한(恨)이 아직도 풀어지지 않고 떠돌고 있음을 감(感)하여 지(知)했으면 좋겠다.

모두에 말했듯이 필자는 한일합방 이후 식민지 통치하의 민족주의자들과 그들의 독립운동만을 배웠고 알았다고 진술했다. 그래서 우리 역사 속에서 공산주의 혁명사, 곧 독립운동사가 있었음을 이 책을 통해 어렴풋이 다시 알게 된 것이 고맙다. 그래서 내게는 이 책이 소설이 아니라 역사책이 되었다.

혹자는 문학성이 부족하다 비판했으나 역사적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려준 것이 더욱 좋았다. 3.1 독립 선언서 발표 100주년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그 때 그 마음으로 돌아가서 우리 현실을 다시 생각했으면 좋을 듯싶다. 아직도 진보진영 속에서도 민족모순과 계급모순, 어느 것이 먼저인가를 두고 논쟁이 그치질 않고 있다. 이 둘은 결코 선후의 관계가 아닐 것이다. 언제든 함께 엮어진 모순일 뿐이다. 그래서 감히 말하고 싶다. 어떤 논쟁보다 ‘세 여자’의 순수한 열정을 결핍한 자신들을 책망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이다.

이정배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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