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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날에 이를 때(누가복음 21:5-9)종말, 시작과 희망 그리고 구원의 시간
이성훈 | 승인 2018.02.25 23:20

사순절 셋째 주일입니다. 저희는 지금 누가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셨던 내용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말씀은 종말론입니다. 지난주에 예루살렘 입성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신 말씀을 전해드릴 때에도 이러한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후, 한 번 더 예루살렘이 무너질 것에 대해서 강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7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8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9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사실 종말론은 어려운 주제입니다. 종말론이 가장 어려운 이유는 종말의 징조에 대한 말씀들이 이미 인류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이런 징조 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리라는 말씀을 성경이 담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예수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징후들로 인해 세상에 종말이 올 거라고 말한 종교인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지금까지도 종말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말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종말론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가장 쉬운 생각은, 종말 이야기는 그저 복음서를 기록한 초대교회의 희망, 소망, 바람이었을 뿐이고, 종말론 자체가 그들의 창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보게 되는 종말론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종말론과 유사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성경은 페르시아 포로 귀환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회복이 완수된 것처럼 끝나지만, 실제로는 그 후에 로마의 속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직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믿었고, 하나님에 의한 완전한 회복과 통치가 실현되는 종말이 오리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에 있어서, 특히나 유대 외곽 지역에서 기록된 복음서의 교회들에게 있어서 종말은 유대인들의 종말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종말의 시작은 로마의 멸망이나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독립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유대고대사나 유대전쟁사를 저술한 당시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당시 로마의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가 진정한 메시아라고 말하기는 합니다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수많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던 초대교회에게 있어서 로마의 전복으로 시작되는 종말은 큰 동의를 얻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교회들이 기록해놓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유사한 맥락을 갖고 있는 종말론이 그들의 단순한 창작물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한 한 지역의 교회만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이해할 수도 있지만, 서로 다른 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세 개의 교회(마태, 마가, 누가)가 거의 유사한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이를 누군가의 단순한 창작물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종말론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두 번째는 종말론이 전체적인 창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예언적 선포에 재림이라는 창작이 덧붙여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 복음서에 나타난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70년대에 발생한 유대로마전쟁의 상황과 거의 흡사합니다. 유대로마전쟁은 예루살렘 성전에 황제의 신상을 세우는 등, 로마의 폭거 속에서, 주후 66년, 종교적 분쟁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주둔 로마 군대를 습격하면서 시작됩니다. 이를 로마가 진압하는 과정에서 강경 대응을 해오자 폭동은 점차 커져서 독립 전쟁으로 발전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전쟁은 주후 73년까지 이어졌는데, 당시의 끔찍한 상황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예언하셨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이러한 끔찍한 상황을 지켜본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예언이 이루어짐을 체험하였고 거기에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요소를 덧붙였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은 유대로마전쟁에 대한 예언을 하셨고, 초대교회는 그 예언의 성취를 본 후 재림이라는 창작물을 첨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이상한 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복음서들이 당시의 끔찍했던 유대로마전쟁을 종말의 징후, 종말의 시작으로 보았다면 거기에는 예수님의 재림도 함께 있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환난의 순간, 큰 환란이 일어날 때에, 27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신 일은 없었습니다. 

만약 복음서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중간에 기록되었다면, 이들이 재림이라는 창작을 덧붙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복음서는 전쟁이 모두 끝난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은 역사도 이미 체험한 상태입니다. 그들의 앞에는 재림하신 예수님이 계시지 않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관복음서를 기록한 교회들은 예수님께서 오시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35절에 보면 마태나 마가에는 없는 말이 있습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즉 유대로마전쟁은 아직 종말의 시작이 아닐 수 있다는 유예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렇다하더라도 앞서 이야기하고 있는 징조들에 대한 그들의 생생한 증언과 재림에 대한 확신, 특히나 누가복음의 기록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그들이 이미 실제로 체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누가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바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서들 각자가 종말에 대해서 전하고 있는 점이나 특히 누가복음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한 전쟁의 이야기나 끔찍함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순간에 ‘짠’ 하고 나타나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 누가복음은 그 종말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에게 다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재난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시작되는 부분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어떤 사람들은 분명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성전의 아름다움과 꾸며진 것을 보며 감탄합니다. 지금 이들이 보고 있는 성전은 헤롯 대왕, 마태복음에서 아기 예수님을 죽이도록 명령한 헤롯 대왕이 만들었던 성전인데, 이들의 감탄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 성전이 무너지리라 말씀하십니다. 오해하면 안 되는 점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전을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하셨던 말씀(마26:61; 막14:58; 요2:19)과는 전혀 다른 맥락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을 염두 해두고 하신 말씀이지만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을 고발하는 거짓 증인들이 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과 관계없이 성전이 무너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하게 성전의 무너짐을 넘어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성전이 아름답고 고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이며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곳이기 때문에 성전은 귀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보고 있던 것은 성전에 머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전의 외형이었습니다. 성전의 본질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비본질적인 부분만을 바라보면서 좋아했습니다. 

이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교회를 세우는 일보다는 전도가 잘된다는 이유로 크고 멋진 교회만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모습도 문제이겠지만, 성전 자체에만 국한 시키지 않고 우리의 삶에 적용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본질적인 것들보다는 비본질적인 가치들만을 추구하며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돈을 이용하고 있지 못하고, 단순히 도구에 불과한 돈을 위해 살아가고, 돈만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요즘에는 그 돈조차도 거의 보지 못하고 은행에서 적어주는 숫자만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의 붕괴는 본질적이지 못한, 비본질적인 것들의 붕괴, 지금 우리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들의 붕괴와 상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 뒤에 누가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9절에 보면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다고 해서 ‘끝이 곧 오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다르게 생각해보면, ‘환난이 있고 한참 뒤에야 끝이 온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뒤에는 더 심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더 심한 상황을 말씀하십니다. 누가 보더라도 끝에 가까워진 상황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끝장났다.’라는 표현을 쓰기는 합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이정도 환난도 아직 끝이 아니라고 하시며 심한 이야기를 점점 더하십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이 바라보고 있는 ‘끝’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재난의 상황이나 환난의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했던 것들이 모두 무너져 내렸을 때, 절망하고 좌절하며 그 상황을 ‘끝’이라고 판단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종말론에 있어서 ‘끝’은 환난이 아닙니다. 심판과 재앙으로 인해서 세상이 무너져 있는 상황은 아직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에 의해서 재건되는 세상,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는 세상이 ‘끝’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종말의 ‘끝’인 순간입니다. 이것은 절망으로의 선포가 아니라 반대로 희망으로의 선포입니다.

끝으로 가기까지

오늘 본문 이후의 말씀들, 종말론의 이야기들 속에서 누가복음은 끝으로 향하는 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했던 가치들, 어쩌면 본질적이지 않은 가치들이 모두 무너져 내리고, 우리는 낙담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도 9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처럼 두려워하지 않고 버티려고 노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후에는 더욱 큰 어려움과 환난이 닥쳐옵니다. 나에게 시련은 이것으로 끝이겠지 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더 큰 시련이 닥쳐올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분명 더 이상 일어설 수도 없을 정도로 좌절하고 낙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누가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절에 보면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 목숨을 얻으라.” 그 순간, 한 번 더 인내하고 참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저 참으라고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이유를 18절에서 이미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깊은 좌절과 낙담의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끝을 보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우리게 체험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사탄이 욥을 시험할 때에 하나님께서 욥의 생명은 건들지 못하게 하시며 욥을 지키셨던 것처럼, 우리 앞에 놓인 시련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며 참된 ‘끝’인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20절 이후에 보면, 예수님의 보호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시련은 끊이지 않습니다. 또 다른 어려움이 생겨나고, 또 다른 시련이 생깁니다. 그것은 어쩌면 앞서 경험했던 일들보다 더 큰 고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되기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한없는 어려움과 고통, 인생의 시련들 속에서 결국 우리가 끝에 만나게 될 것은 우리 앞에 나타나시는 예수님이시고, 구원입니다.

종말의 순간

종말의 이야기를 마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당부를 하십니다. 36절에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누가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종말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인내하며 기도하고 깨어 있어라” 그렇다면 종말은 단순히 모두가 죽고 없어지는, 환난과 고통만을 주는 순간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을 얻게 되는 희망의 순간이 됩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자면, 예수님의 부활 역시도 성경 외에 다른 역사서를 통해 보자면 없었던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복음서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누가복음을 기록한 교회의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자신들에게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본 것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이 아니라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폐허 속에서 구름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경험한 바를 지금의 우리를 위해서 복음서로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이 겪었던 가장 큰 재난과 환난의 순간은 예루살렘의 파괴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유대로마전쟁을 모티브로 환난을 말하고 있지만, 환난은 그 전쟁이라는 한 순간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재난과 환난의 순간은 지금 이 땅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아픔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쁨을 잃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포스트 모던 시대라고 말하지만, 과거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에서 그렸던 모던 시대의 모습보다 더 기계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세상이 지금 세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를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고통이 아니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우리가 기계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요즘의 수많은 사람들은 여행이라는 이름의 현실도피처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본주의라는 체계가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체계가 우리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몸집을 키워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하나의 도구가 되어가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환난과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말합니다. 
 

“조금만 참고 버텨라. 예수님께서 지금 당신을 돕고 계신다. 그러니 고개를 들어 지금 당신을 돕고 계신 예수님을, 구원의 소식을 들고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아라!”

종말은 환난이 아니라, 재앙이 아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의 순간이고 희망의 순간이고 구원의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과 구원, 그리하며 다시 시작하는 순간은 지금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그 ‘끝’의 순간이 임하기를, 또 그 순간을 바라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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