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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온 사람이나 나중 온 사람이나(마태복음 20:1~16)비정규직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사순절 집중기도회
최형묵 | 승인 2018.03.01 03:19

오늘 말씀은 성서 가운데서 아주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포도원 일꾼 이야기로 잘 알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비유로 전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한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을 찾아 그들에게 일거리를 주고 또 필요한 삯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노동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어떤 해법이 가능한지 중요한 통찰을 주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일꾼들을 불러다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데려다 씁니다. 포도원 주인이 약속한 한 데나리온은 당시 하루 최저생계비였고, 당시 율법(레위 19:13; 신명 24:15)에 따라 노동자들이 굶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임금은 꼭 그날 저녁에 지급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품꾼들을 데려다 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또 장터에 나가 사람들을 데려다 씁니다. 오늘 실업과 불안정한 노동의 현상이 심각합니다만, 예수님 당시 사회에서도 생계수단을 갖추지 못한 가난한 민중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외에도 네 차례나 더 품꾼들을 데려다 일을 시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있는 이 포도원 주인의 행위는,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보더라도 확실히 의로운 일에 해당합니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에게 실업수당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최대의 배려, 최대의 복지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주인이 일꾼들에게 품삯을 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저녁 때가 되어 품삯을 지급하는데, 늦게 온 사람부터 동일하게 지급합니다. 아마도 임금의 투명성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인 것 같습니다. 맨 먼저 온 사람들부터 하나씩 품삯을 받고 돌아가면 나중에 온 사람들이 얼마나 받는지 알 수 없고, 따라서 적게 주든 똑같이 주든 먼저 온 사람들의 불만을 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주니까 앞에 온 사람들도 그 내역을 알고 당연히 먼저 온 자기들이 더 많이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데서 벗어나자 문제가 되었습니다. 일한 시간만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상식이요, 오늘 역시 우리들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이 그 상식을 엎어버렸습니다. 주인은 이의를 제기하는 일꾼에게 “그대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소위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주인의 임금지급 방식은 공정하지 못한 처사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바로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의 요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비유를 꺼낼 때 하늘나라는 이 포도원 주인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 주인의 의중에 하늘나라의 뜻이 담겨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 뜻이 하늘나라의 정의, 곧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함축하고 있을까요?

가장 일반적 의미에서 정의는 각자에게 정당한 몫을 주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일반적인 정의의 원칙이 확립되는데, 그것은 기여에 따른 분배의 원칙입니다. 업적에 따른 분배의 원칙입니다. 물론 그 원칙이 확고하다 해도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기여를 일률적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자본을 투자한 기업가와 노동력을 제공한 노동자의 몫은 자본과 노동으로 나뉘는데, 투자된 자본과 투여된 노동은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에 우선권을 부여하고 있지만, 자본 그 자체가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이기 때문에 노동에 우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견해가 오히려 상식적입니다. 그 양자의 균형을 맞추자는 것이 오늘날 이야기되는 ‘경제민주화’의 핵심입니다.

어쨌든 돈이든 노동이든 기여한 몫에 따라 나눈다는 것이 일반적 정의의 요체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이른바 비례적 정의론입니다. 그 원칙만 잘 지켜져도 사회는 제법 정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의 이야기는 그와 같은 비례적 정의와는 전혀 다른 ‘이상한’ 정의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돈을 가진 주인이 자기 마음대로 한 데 요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은 기여와 업적에 상관없이, 다시 말해 노동시간에 상관없이 일꾼들에게 똑같은 임금을 지급합니다. 그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들이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최저생계비에 해당합니다. 주인은 노동시간에 상관없이 모든 일꾼들에게 최저생계비에 해당하는 만큼 공평하게 임금을 지급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주어진 물질을 어떻게 나눌 것이냐 하는, 이른바 경제적 원칙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인간관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업적에 상관없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저생계비를 보장한다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업적에 상관없이 존엄한 존재로서 품위를 유지하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정의의 요체입니다. 그 어떤 인간적 업적 여하에 따라 인간의 삶에 차등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서적 정의, 곧 하나님의 정의의 요체입니다.

사람마다 능력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또 사람들 사이에서 기회의 불균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것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이 포도원 주인이 제시하고 있는 정의의 요체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성서 이야기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묘한 여운을 남기는 교훈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언뜻 보면 ‘늦게 온 사람도 똑같이 필요한 임금을 받을 수 있다’, 단순히 이 사실을 옹호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깊은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의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현실은, 먼저 온 사람이나 나중 온 사람이나 모두 동등하게 되는 현실을 말합니다. 통상적으로 기득권에 따라 당연히 더 많은 것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그 통념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이 이야기는 그 진실을 더욱 극적으로 강조합니다.

단순한 역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일용할 양식을 누리며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적 관계, 사회적 관계를 이 이야기는 말하고 있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가 무의미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은 직선의 대열을 그리며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곡선의 대열, 또는 원형의 대열을 생각할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서기 위해 달리는 대열이 아니라, 앞서고 뒤서는 개념 없이 함께 춤을 추는 대열을 생각해야 합니다. 춤추는 대열에서는 첫째와 꼴찌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함께 춤추는 대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앞서고 뒤서는 관계에만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대열과는 전혀 다른 대열로서 삶의 질서를 일깨워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가치의 전도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는 매우 급진적인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사순절 집중기도회에서 최형묵 목사가 말씀을 전하고 있다. ⓒ윤병희

한국사회는 촛불혁명으로 새로운 희망을 안게 되었습니다. 촛불을 함께 들었던 모두의 마음은 단지 정치권력을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저마다의 삶을 바꾸고자 하는 희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거리의 시민과 일터의 노동자들이 분리되었던 1987년 항쟁과 달리 평범한 시민과 노동자들이 광장에서 하나가 된 촛불항쟁은 그 간절한 희망의 발로였습니다. 아마도 오늘 성서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그 뜻과 다르지 않은 희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땀 흘려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현실은 여전히 팍팍합니다. 지난 해 수출규모로만 보면 세계 6위에 이른 경제대국 한국에서 그 주역인 노동자들의 상황은 최악입니다.

부끄럽게도 한국사회는 아직도 노동자의 기본권리가 정당하게 보장되고 있지 않습니다. 노동조합 조직율은 10.3%로 낮은 상태이고, 곳곳의 사업장에서 노사간 협의는 결렬을 겪고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고공으로 나서 절규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노동자들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선택으로서 단체행동 또한 처벌의 대상이 되어 극도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산업재해 또한 빈발하여 매년 세월호 희생자 6배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산재로 하나뿐인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그나마 일하는 노동자들의 절반에 이르는 이들이 비정규직의 굴레에 매여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처해 있고 극심한 임금차별로 최저생계비도 보장받지 못해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촛불항쟁으로 탄생한 새 정부가 일자리 대책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최저임금의 인상을 추진하고 있지만, 지금 그 취지가 무색해지는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공공부문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예외의 대상이 남발되고 있는가 하면 변형된 형태의 정규직화로 이른바 ‘중규직화’라는 사태가 야기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 정규직의 반발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자체가 난항을 겪고 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최저임금의 인상 역시 난관에 봉착해 있습니다.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으며, 여전히 최저생계비를 보장받지 못한 노동자들의 생활고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일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갖가지 이유로 생활고를 겪고 있는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정책과 제도가 지금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문명국가의 기본규범이자 동시에 국제사회의 공통규범으로서 노동삼권은 완전하게 보장되어야 합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로 그 어떤 불이익도 겪어서는 안 되며 노동자의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생활인으로서 삶의 향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 기본권이 보장되는 바탕 위에서 당면한 과제로서 비정규직화의 정규직화, 최저임금의 인상 정책 역시 해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상시지속적인 업무에 대해서는 예외없이 정규직화해야 한다는 원칙이 지켜지는 가운데 그 현실적 해법이 모색되어야 합니다. 자발적인 선택을 포함하여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비정규직을 용인한다 하더라도 어떤 경우이든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지켜지는 가운데 고용과 근무의 형태가 차별의 요인이 되는 사태를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 사회적 정의와 공정성의 기준을 합의할 수 있는 각계의 노력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지금까지 우리사회에서는 광범위하게 비자발적인 비정규직의 형태를 허용해 온 까닭에 제한된 상시 정규직이 일종의 특권으로 인식되어 온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공정성의 문제는 사실상 그 특권체제를 상식적인 것으로 용인하는 전제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정규직을 보장하는 절차만이 유일한 공정성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회적 인식을 높이고 다양한 공정성의 기준을 모색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사회적 약자들에게 충분한 기회가 허용되고 결과적으로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보장받도록 하는 절차에 대한 합의가 사회적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사회가 파국에 이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촛불의 염원을 담아 온전한 민주주의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과 약자들이 마땅히 저마다의 삶의 권리를 온전히 보장받는 데서 이뤄집니다. 

오늘 우리사회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다수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리의 행사 차원에서 약자로 전락한 평범한 이들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지당한 그 기대와 요구가 상식이 되는 사회, 이로부터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피울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의 의미를 새기며 그 뜻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일하는 노동자들이 정당한 삶의 권리를 보장받고 여러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이 저마다의 마땅한 삶을 누리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에 다가서는 것임을 믿습니다. 함께 나아가는 그 길에서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달려 나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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