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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을 이루고 물러나는 것이”-功遂身退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09
이병일 | 승인 2018.03.06 01:30
“가졌으면서도 그것을 채우려 한다면 그만두는 것만 못하다. 갈아서 그것을 뾰족하게 하면 오래 지키지 못한다.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면 그것을 능히 지킬 수 없다. 재물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교만하면 스스로 그 허물을 남긴다. 공을 이루고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道이다.”
- 노자, 『도덕경』, 9장
持而盈之, 不如其已. 揣而銳之, 不可長保. 金玉滿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 功遂身退, 天之道

도덕경 2장에서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라고 한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성인의 다스림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도의 질서를 존중하고 백성과 싸우지 않는 정치입니다. 그러나 인의(仁義)와 예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자 한다면, 이것이 이미 있는 질서에 또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채우려 하고, 뾰족한 것을 더 예리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속에는 정치를 통해 부귀를 유지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 욕망은 교만과 허물을 낳습니다.

올 겨울이 아무리 추웠어도 우수가 지나고 경칩이 되니 봄기운이 여기저기에서 올라옵니다. “四時가 번갈아 운행하니 세월의 공이 이루어지면 계절이 바뀐다.”라고 왕필은 말합니다. 봄은 봄이 할 일을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싹이 나고 움이 돋고 꽃이 피고 하다보면 어느새 여름입니다. 여름은 여름의 일을 한 다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어느새 가을이 와 있습니다. 어느 철도 자기의 공을 내세워 그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계절의 순환을 묵상하면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와 공수신퇴(功遂身退)의 의미를 몸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욕심과 교만입니다. 어느 종교에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멀리해야 할 것이 욕심과 교만을 내세웁니다. 욕심 때문에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욕심 때문에 자기 것을 나누지 못합니다. 욕심에 교만이 더하면 자기가 이룬 것을 모두가 자기가 잘나서 자기의 공으로 이룬 줄 착각하게 됩니다.

길은 제 길을 끌고 무심하게
언덕으로 산모퉁이로 사라져가고
나는 따라가다 쑥댓닢 나부끼는 방죽에 주저앉아
넝마져 내리는 몇 마리 철새를 본다
잘 가거라, 언덕 저켠엔
잎새를 떨군 나무들
저마다 갈쿠리 손 뻗어 하늘을 휘젓지만
낡은 해는 턱없이 기울어 서산마루에 있다
길은 제 길을 지우며 저물어도
어느 길 하나 온전히 그 끝을 알 수 없고
바라보면 저녁 햇살 한 줄기 금빛으로 반짝일 뿐
다만 수면 위엔 흔들리는 빈 집일뿐
- 김명인의 시 “길”

마비로 온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은 그를 들것에 눕혀 지붕을 뜯고 예수님에게 데려간 사람들의 믿음과 예수님의 죄 용서의 선언에 의해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우리가 살고 활동하는 모든 일은 어느 누군가의 도움과 어느 생명의 희생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과 교만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성모독의 죄를 범합니다.

야훼의 이름을 훼방하는 것은 십계명에도 있듯이 야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서 그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자기의 욕망과 욕심을 위해서 사용하는 일, 그것이 기도든 설교든 찬양이든 어떤 방법이 됐든 야훼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야훼의 이름으로 관철하려는 것이 신성모독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자기의 주장을 남에게 강요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팔아먹는 것이 바로 신성모독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그 하느님의 뜻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행동하는 것이 신성모독입니다.

“사지가 마비된 사람이 나음을 입고, 관습에 따라서 죄인으로 여겨졌던 억울함을 벗게 된 사건은 오염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을 감수하면서 지금 아파하고 억울한 사람을 도운 네 사람과 신성모독의 혐의를 피하지 않고 잘못된 관습과 악한 권력에 당당히 맞선 예수님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억압된 생명을 살리고 아픈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신성목독이라는 누명을 씌워서 죽인 예수님과 스데반은 그들의 허물을 드러냈으며, 그들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여기에서 신성모독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고 도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파괴하고, 평화를 깨뜨리고, 죽임을 선동했기 때문에 그들이야말로 신성모독을 저지른 것입니다. 신성모독이라는 누명을 씌우는 사람들은 신의 이름을 남용하고 신의 이름을 망녕되게 하기 때문에 그들 자체가 중대한 신성모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신성모독, 야훼의 이름을 훼방하는 것은 십계명에도 있듯이 야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서 그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자기의 욕망과 욕심을 위해서 사용하는 일, 그것이 기도든 설교든 찬양이든 어떤 방법이 됐든 야훼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야훼의 이름으로 관철하려는 것이 신성모독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자기의 주장을 남에게 강요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팔아먹는 것이 바로 신성모독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그 하느님의 뜻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행동하는 것이 신성모독입니다. 그 뜻을 행하다가 권력으로부터 ‘신성모독’의 혐의를 받을지라도 낙심하지 맙시다. 그리고 이 땅에서 누가 하느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지 분명하게 봅시다. 누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지 확실하게 분별합시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누가 신성모독을 말하는가?”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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