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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청춘세월 따라 역사 따라 6
박준성 | 승인 2018.03.13 18:02

1979년 내가 겪었던 논문 도용 사건과 1980년 '광주'는 나를 주화입마 된 듯 만들었다. 공부만으로는 화를 누를 수 없었다. 술로도 안될 때 하염없이 걸었다. 1980년대 초반 통행금지가 해제 된 뒤 종로나 동대문에서 술 마시다 새벽 두세시에 몇 번이나 신림동까지 걷곤 했다. 4시간에서 4시간 30분 쯤 걸렸다. 80년 5월 ‘서울의 봄’ 때 서울역 퇴각이 가슴 아프게 떠오르곤 했다. 한강 다리 난간에 기대 강물을 바라보면 새벽안개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박준성 제공

1981년 1월이었다. 입주 아르바이트를 하던 집 보일러가 얼어 터졌다. 2-3일 다른 곳에서 보내야 했다. 대학원 연구실에 가서 묵을 곳을 찾아봐야지 하며 탄 버스가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행이었다. 내친 김에 청주에 사는 큰 고모님 댁에나 가보기로 했다. 고모 집에 들려 운동화를 벗어놓고 발에 꼭 끼는 고모부 농구화로 바꿔 신었다. 산 갈 때 운동화보다는 농구화가 좀 나은 편이었다. 등산화를 신어야 한다고는 생각조차 못하던 때였다.

속리산행 버스를 탔다. 한 겨울 한 낮 법주사를 지나 비포장 넓은 길을 따라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문장대와 신선대 갈림길 가까이서 20대 전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 세명과 동행하게 되었다. 26살에 접어든 나보다 조금 아래로 보였다. 우리 네 사람 말고는 속리산은 텅텅 빈 것 같다.

한 사람은 운동화를 신었고, 두 사람은 굽 낮은 구두를 신었다. 그때만 해도 문장대 갈림길 휴게소에서 구두신고 온 사람들에게 운동화를 빌려주었다. 한 사람이 굽이 낮아 괜찮다며 구두를 신고 그냥 갔다. 얼마 되지 않아 미끄러운 눈길에 펄떡펄떡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다리에 쥐까지 났다. 돌아서 내려가기도 어정쩡한 지점이었다. 쥐난 다리를 주물러 풀어주고, 밀고 당기면서 가까스로 문장대까지 올라갔다.

한 겨울 해가 빨리 저물기 시작했다. 산 너머에서 어둠이 성큼성큼 내려올 것만 같았다. 누구 하나 후래쉬도 간식도 없는 맨 몸이었다. 마실 물조차 가지고 온 사람이 없었다. 어쩌자고 한겨울에 그렇게 무모하게 겨울 산에 들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다가 이런 사람들을 만났는지 뭐에 홀린 듯했다.

어두워지면 저 미끄러운 구두를 신고 어떻게 산을 내려가지....... ‘조난사고’가 떠올랐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어둠이 산을 뒤덮기 전에 휴게소까지는 내려 가야했다. 같이 가다가 사고를 당하느니 내 신발을 벗어주는 편이 났겠다고 판단했다. 신었던 농구화를 벗어주었다. 천천히 조심해서 내려오라고 이르고는 맨발로 문장대에서부터 얼어붙은 눈길을 뛰기 시작했다. 발이 얼더라도 옆에서 같이 내려갈 생각은 못했다.

한겨울 눈길에서 맨발로 천천히 걸을 상황이 아니었다. 나무와, 바위와, 산이 휙휙 스쳐지나가듯 뛰었다. 신선대 경업대를 한달음에 지나쳤다. 양말이 얼 새도 없이 휴게소까지 내려왔다. 맨발의 청춘이었다.

휴게소 위쪽 간이식당에 들어가 우동그릇으로 막걸리 두 대접을 안주도 없이 단숨에 들이켰다. 서울에서 아침을 먹은 뒤 저녁때가 다 되어서 막걸리로 배를 채운 것이다.

난로에 발을 녹여가며 천천히 막걸리를 더 마시고 있는데 세 사람이 터덜터덜 내려왔다. 농구화를 받아 신고, 법주사 쪽 큰 길을 따라 같이 걸어 내려갔다. 고맙다면서 청주에 가서 저녁도 사고 차도 사겠단다. 그냥 추억 속에 남겨지길 바랬다. 아, 얻어 먹을 수만은 없는데 내가 뭘 살 돈이 없기도 했다. 길모퉁이에서 오줌을 누는 척하면서 떨어졌다. 한참 멀어질 때까지 천천히 걸었다.

혼자서 터벅터벅 걸으면서 '보고 싶은 얼굴'을 불렀다. 서서히 퍼지는 술 기운에 눈물이 핑돌았다. 광주가 떠오르고, 한 때 짝사랑했던 후배 얼굴이 떠올랐다. 신발을 벗어 준 사람이 후배와 인상이 비슷한 것 같았다. 먼저 떠난 사람들이 갑자기 보고 싶었다. 청주까지 가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싶었다.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쳤다.

다시 뛰었다. 숨을 몰아쉬며 속리산 터미널 문을 열었다. 청주 가는 막차가 방금 떠났다고 한다. 헛헛하고 아쉬운 기분이 엄습했다. 다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차도 끊겼다. 청주까지 하염없이 걸어서 가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속리산 터미널에서 세 시간 걸려 보은에 닿았다. 저녁 9시나 열시쯤 되었을 시간, 구멍가게에 들려 간신히 빵과 우유를 사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청주까지 걸어서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서넛이 둘러앉아 소주를 마시던 사람들이 간첩 같다며 신분증을 보자는 거였다. 내 꼴이 '간첩식별법'에 나오는 ‘달빛이 없는 야간에 해안가를 배회하는 자’, ‘새벽에 등산복 차림으로 나타나는 자’ 꼴로 보였나 싶다.

역사 현장을 찾아 직접 답사하면서 공부하던 학자들까지도 간첩 신고를 당하던 시대였다. 멀쩡한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목숨을 빼았던 권력이 사람들을 맹목에 빠트리던 때였다.

예나 지금이나 반공이데올로기에 내면까지 지배당해 신고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에게는 이치를 대가며 설명하고, 논리로 설득해도 먹히지가 않는다. 절대화 된 신념은 그들에게도 꿈이다. 당장은 그 꿈이 깨지기 싫은 거다. 화를 내며 따지니까 신고를 할 듯한 기세였다. 신분증을 보여주고 말았다. 기분이 엿 같았다.

화를 삭이면서 다시 걸었다. 차가운 밤이 깊어가면서 별은 더 새파랗게 빛났다. 밤은 점점 무거워지고 어둠은 질겼으며 새벽이 오는 속도는 한없이 느렸다. 걸어도 걸어도 시계는 정지된 것만 같았다. 바람이 심하면 뒤로 돌아서 뒷걸음으로 걸었다.

새벽 세시가 넘으니까 자꾸만 졸렸다. 길가에 앉아 한참씩 쉬었다. 그대로 누워 자고 싶었다. 이러다 얼어 죽지하며 일어섰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뒤에서 달려오던 택시가 옆에서 급하게 멈췄다. 무조건 타란다. 흐느적거리며 걷는 모양이 위험스러웠나 보다. 지쳐서 더 이상 걷기가 힘들었다. 택시비도 없으면서 그냥 탔다. 새벽 4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다. 막걸리 몇 잔과 빵 하나, 우유 한 개로 때운 채 열서너 시간을 걸은 것이다.

잠이 들었다 싶었는데 눈 깜작 할 사이에 청주에 도착했다. 기사 분은 택시비 달라는 말도 한마디 없이 그냥 떠났다. 이름이나 알아 둘걸.......지금도 그 새벽 기사님이 고맙게 떠오른다.

고모집에서 간단하게 밥을 먹고 곯아 떨어졌다. 새벽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24시간을 먹지도 않고 내리 잠만 잤다. 곤한 잠 속에서도 빨리 깨어나고 싶은 꿈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동행했던 사람들이라도 등장하지 맨 간첩으로 몰려 허덕이는 꿈이었다.

지리산 종주를 할 때도, 역사와 산 산행을 할 때도, 백두대간을 걸을 때도 한겨울 문장대에서 뛰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겨울 산에서는 특히 장비를 잘 챙겨야 한다며 예로 들기도 한다. 그 때 맨발의 질주는 사고 날까봐, 같이 살려고 판단 했던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 뒤 다른 비슷한 행위를 하더라도 나도 살자고 하는 일들을 가지고 마치 크게 희생이나 한 듯이 생색내고 자랑질하지나 않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이 또한 산에서 겪었던 우연한 경험이 가르쳐준 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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