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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옆의 사람들(누가복음 23:39-43)예수 곁에 함께 못박힌 정치범들
이성훈 | 승인 2018.03.18 23:54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이번 주간은 고난주일입니다. 저희는 이미 사순절 첫째 주일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해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번 주일이 종려주일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함께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2장 후반부와 23장 전반부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재판 과정은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지만, 저희가 몇 주 전부터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는 누가복음의 시험 이야기와는 크게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대신에 지난 두 주간 동안 전해드렸던 말씀을 요약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탄의 시험에 의해 예수님께서는 홀로 남겨지게 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향한 사탄의 시험에 의해서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다만 베드로만은 예수님의 기도에 의해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돌아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홀로 남겨진 순간에 예수님께서도 마음에 흔들림을 겪으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아심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지 않으면 안 되냐는 의심의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기도해 오셨던 예수님이시기에, 기도라는 습관으로 인해서 예수님은 한 가지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순간에도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기도를 이끌어내었고, 사탄의 시험을 이겨낼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이야기를 그저 하나님의 아들, 신적 권능을 가진 분에 대한 이야기로 보지 않았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이야기였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예수님이 겪고 있는 시험, 고난은 결국 자신들이 겪고 있는 시험과 고난이었고 그것을 이겨내는 방법을 누가복음에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

예전에 누가복음을 깊이 있게 읽어보지 않았을 때에는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가 거의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열심히 읽다보면, 누가복음의 수난 이야기는 마태나 마가와는 상당히 다르게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앞서 요약해서 말씀드린 사탄의 시험에 대한 일련의 이야기들이고, 그 이야기는 오늘의 본문인 십자가 사건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까지의 말씀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에는 우리가 잘 아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빠져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가상7언’이라고 해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곱가지 말씀을 이야기합니다만, 그것은 모든 복음서의 말씀을 섞어놓은 것이고, 저희는 각각 복음서에 나타난 말씀들을 보려고 합니다.

모든 복음서를 통틀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중에 유명한 말씀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22편 1절의 말씀이기도 하고, 마태와 마가에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 예수님이 이런 외침을 하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는 없습니다. 오히려 누가복음 23장 46절에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마태나 마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예수님의 외침은 초대교회 성도들, 로마에 의해 핍박받던 성도들의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이면서 죽음에 의해 하나님과 예수님의 연결이 한 순간 끊어졌다가 부활로 다시 이어짐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연결이 끊어졌다는 점은 신학적으로 할 말이 많긴 합니다만, 저희가 살펴보는 말씀은 누가복음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누가는 마태, 마가와 같이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신 순간에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성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순간에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렇기에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신앙을 전해줍니다.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을 통해서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본래 제자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이미 도망가고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오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26절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여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닌 많은 등장인물이 나타납니다.

먼저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에서 올라오다가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힙니다. 이 사람은 그저 시골에서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왔다가 십자가 처형이라는 사건을 구경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갈만한 상황이 안 되자 로마 병사들이 옆에서 구경하던 시몬을 붙잡아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전통적인 설교들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은 이때에 예수님을 만나서 뭔가를 깨닫고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구레네 사람 시몬에 대한 이런 전설이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만, 누가복음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의 존재는 초대교회가 당했던 박해 시에 아무 이유 없이 함께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들의 모습이 투영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어쩌다가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당하게 된 사람이고, 초대교회 성도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게 된 주변 인물의 투영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슬퍼하는 여인들이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의 예언을 한 번 더 하고 계시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점은 이 여인들이 십자가 옆에서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수난을 그저 수난으로 바라보았고 그렇기에 슬퍼했습니다.

저는 매년 고난 주간이 되면 성도님들께 그저 슬퍼하는 주간으로 보내시지 말라고 말씀드립니다. 고난 주간은 예수님의 고난을 슬퍼하는 주간이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들을 향해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구원을 위한 고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따라 행해 나가야 할 고난입니다. 이것은 그저 슬퍼하고 눈물 흘려야 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구원을 위한 고난을 기념하며, 그 고난에 동참하기 보다는 그 사건을 회상하며 슬퍼하기만 합니다. 고난주간이 되면, 그저 슬퍼하기 위해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같은 영화를 함께 보며 눈물 흘리곤 합니다. 맬 깁슨이 이 영화를 만든 목적 자체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고난 주간에 슬퍼하기 위해서였지만, 이렇게 슬퍼만하고 있는 일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있기는 했지만 십자가 사건의 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행동입니다.

그 후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관리들, 군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구원하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아무도 구원하지 못함을 비웃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향해서 스스로를 구원하라고 말합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딱히 더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두 명의 행악자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인물들이 오늘 저희가 읽은 두 명의 행악자입니다. 마태나 마가에서는 강도라고 나오는데, 누가에서는 행악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에는 없는 그들의 이야기가 누가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당시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들을 강도나 행악자라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습니다.

▲ The Crucifixion. Louvre, Paris. This painting originally formed part of the predella of the big San Zeno altarpiece at Verona. Illustration: ' Italian Painting' Lionello Venturi. Copyright 1950 (Switzerland) Editions Albert Skira, Geneva. A. Zwemmer.

십자가 처형은 정치범에게 가해지는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의 정치범이라면 로마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로마에 대한 반동군자 십자가에 처형되신 것이지, 제사장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달라고 부탁해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은 아닙니다.

사실 본디오 빌라도는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온순한 사람은 아닙니다. 상당히 교활하고 냉혹하게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총독입니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면 철저하게 잡아서 십자가에 처형시켜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 양 옆에 있던 두 사람도 저희가 생각하는 식의 강도라기보다는 반란을 꾀했던 사람들, 혹은 실제로 반란을 행했다가 붙잡인 사람들, 반란의 주동자들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두 명이 예수님의 양 옆에서 함께 처형당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을 비방한 한 사람의 이야기는 사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였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의 말도 예수님을 향한 조롱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만, 이 사람의 말은 조롱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향한 비난이자 비판입니다. 왜 구원자의 힘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고 십자가 처형이라는 고난, 더 나아가 예루살렘의 멸망이 이르게 하는가에 대한 비난입니다.

여기에서 누가복음의 교회의 상황으로 넘어와서 그저 예루살렘이 겪게 되는 고난을 넘어 인간의 삶에서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냥 구원하면 안 되는가? 이 질문은 초대교회, 특히 박해를 받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당연한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누가복음은 새로운 이야기를 더합니다. 그 사람을 꾸짖는 또 다른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마태나 마가에서는 두 사람이 모두 예수님을 비방했다고 말합니다만 누가복음은 한 사람은 예수님을 옹호한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점은 지금 예수님은 모두에게 버림받은 상태라는, 사탄의 시험은 아직도 유효한 상태라는 점입니다. 아직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들은 예수님의 행위, 십자가 처형 사건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 한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해하고 예수님 곁에 있는 사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사건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더 나아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인간이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아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누가복음은 한 가지만은 이야기해줍니다.

우리 옆에는 우리의 생각을 이해하고 우리를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행악자는 본래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그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고난 이후에 낙원이 준비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기는 했지만, 이를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그 고통을 슬퍼하기는 했지만, 역시 깨닫지 못했습니다. 관리들과 군인들은 십자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조롱하기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한 편에서 십자가에 달려 있던 행악자는 예수님이 능력이 있음에도 왜 세상을 구원하지 않는지 비난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옆에 있던 행악자는 이를 깨달았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런 사람이야말로 참 성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되신 구원 섭리를 깨닫는 사람이 참된 성도입니다. 또한 이 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고통 중에 있을 때에, 시험에 당할 때에, 결코 혼자 외롭게 고통 받는 사람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나가는 말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통하여 분명히 인간이 처하게 될 필연적 고독을 이야기합니다. 어떠한 고통이나 고난이 닥쳤을 때에 우리가 느끼게 될 고독감, 외로움을 말합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버림을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의 도망을 통하여 물리적으로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때로 우리 옆에 누군가 함께 있기는 해도 그들은 실제로 우리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거나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은 한 사람의 여지를 남겨놓습니다. 단 한 사람, 최후의 순간에 만나게 된 사람, 고통의 순간에 만나게 된 사람, 우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사람, 하나님 외에도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 그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홀로 남겨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저 함께 계신다고 믿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곁에 함께 할 수 있는 성도님들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나 자신을 받아들여줄 사람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통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도록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들께서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 고통 중에 있을 때에, 여러분 옆에 있는 그 사람을 깨달으시기 바라고, 또한 누군가 고통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곁에 서서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주고 그에게 힘을 주는 그 사람이 되시기를, 그런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누가복음이 이야기하는 참된 성도, 예수님과 함께 하였고,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올라가게 된 성도가 될 줄로 믿고, 또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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