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8월 31일 밤 10시 대한항공 007편 747 점보여객기가 경유지 앵커리지 공항을 떠났다. 9월 1일 새벽 사할린 부근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가 쏜 미사일에 맞아 떨어졌다. 승객 240명과 승무원 29명이 목숨을 잃었다. 승무원 가운데 내 사랑하는 후배 은미가 있었다. 대학 졸업생 환송회 때, 애인도 없이 졸업하는 불쌍한(?) 선배를 위해 파트너가 되어준 후배다. 찬란하고 눈부셨던 사람이 그 정점의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대학을 다닐 때, 아니 아내와 결혼 할 때까지도 이성에 대한 내 사랑은 대부분 짝사랑이었다. 사람들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짝사랑이었다고 변명한다. 내 짝사랑도 그렇기는 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인지 헷갈리는 사랑이 내 짝사랑이었다. 그것도 대상은 늘 두 명이었다. 한 사람이 조용하면서 깊은 내향성이라면 한 사람은 명랑하고 쾌활한 외향성이었다. 한 사람이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을 터인데도 수시로 바뀌는 내 성향의 부족한 면을 서로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선택도 못하면서 마음 속의 바람기는 끊이질 않았다.

최인훈의 『광장』에서는 “‘사랑’이란 말 속에, 사람은 그랬으면 하는 바람의 모든 걸 집어넣는다”고 했다. 내가 꼭 그 짝이었다. 사랑이란 이름 속에 내 실존과 이상, 세상을 향한 온갖 고뇌를 집어넣고 허우적대었다. 결과는 매번 손도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사랑을 사랑하는 방황으로 끝이 났다.

은미는 독서 모임의 아끼는 후배였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한동안 종잡을 수 없는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광주에서 죽어간 시민군들의 죽음, 1981년 5월 도서관 옥상에서 투신한 김태훈의 죽음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죽음이었다. 한 쪽의 죽음들이 내 마음을 모질게 채찍질 했다면 은미의 죽음은 나를 알 수 없는 외로움의 심연 속으로 밀어 넣었다. 실제로는 두 가지 죽음들이 뒤섞여 나를 마구 뒤흔들었을 것이다. 며칠 동안 혼자 술을 마셔도 헛헛하고 울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죽음의 너울에서 벗어나야 했다. 몇년치 일기장과 메모를 싸들고 후배들과 추억을 공유했던 춘천으로 갔다.

춘천을 안개에 휩싸이게 하던 소양강 공지천, 그곳에서 호수에 비친 달을 잡겠다고 술에 취해 뛰어 들었다가 빠져 죽을 번한 적도 있었다. 호숫가 제방에서 1979년 ‘논문도난사건’이후 1983년 8월까지 매일 쓴 일기장과 수첩 아홉 권을 태웠다. 화선지 30여장을 반으로 잘라 60장을 이어서 쓴 신경림의 장시 <새재>도 길게 펼쳐놓고 불을 붙였다. 몇 십미터나 됐다. 방위 생활을 할 때 울분을 삭이면서 쓴 붓글씨였다. 어두운 밤 멀리서 번지는 들불처럼 화선지가 넘실넘실 타들어 갔다.

그 무렵 써야할 석사 학위 논문은 잘 진척되지 않았고, 긴한 이야기를 할 사람들을 만나려면 ‘산’으로 가야했다. 자취 방에서 빨래하고 밥을 지으면서 '늙은 노동자의 노래' 속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하고 레코드 판 튀듯 부르던 노래도 점점 지겨워졌다. 심신이 지쳐가고 있었다. 노동자 민중이 노동하고 투쟁하는 현장인 '광장'과 대학원 연구실 또는 자취방이었던 '밀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고 방황했다.

1980년대 서울 신림동에 있는 복사집 '관악사'는 온갖 사회과학 서적과 원전들의 집산지이자 재생산처였다. 누군가 그곳에서 복사한 책을 가지고 있다가 잡혀 들어갔다고 하는 소식이 들리면 복사본들을 사과 상자에 넣어 안전한 곳으로 이리저리 옮겨야 했다. 학교와 걸어다니던 자취집 사이에 '관악사'가 있어 대학원 언더모임 성원들의 복사를 전담하다시피하고, 운동하던 현장의 후배들이 부탁한 문건들을 대신 복사해주던 나는 늘 조마조마 했다. 일기장과 메모는 더 위험했다.

때때로 자료를 숨기고 옮기는 일 조차 점점 부담스럽고 두려웠다. 다가올 민중의 시대에 회색빛 지식인이 쓴 소소한 일상의 기록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일기와 기록을 태워 버리고 다시 나를 추스르자고 마음 먹을 즈음 은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광주'를 경과한 뒤 경직된 내 사고는그 후배 집안의 여유로움도 용납하지 못했고, KAL 스튜어디스가 된 뒤 만났을 때 화려하게 보이는 그 모습 또한 어색했다. 후배가 아니라 이성으로 느껴져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연애에서도 '동지'의 요건을 요구하던 시대였다. 서먹하게 대했던 날들을 아프게 떠올리며 후회한들 다시는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은미의 재가 뿌려졌던 강물에 내 기억을 담았던 일기장의 남은 재를 밀어 넣었다. 잘 가라. 소주를 따라 붓고 마셨다.

내가 4학년일 때 ‘죽우회(竹雨會)’라는 독서 모임에서 후배들과 『광장』을 읽고 독서토론을 했다. 2학년이던 은미도 후배 중 한명이었다. 『광장』은 독서 모임에서 매년 한 번씩 읽던 책이었다. 내가 『광장』을 처음 읽은 것은 중학생 때였다. 나를 참으로 아껴주던 작은 아버지가 중학교 입학 선물로 사준 신구문화사판 ‘현대한국문학전집’ 속에 들어 있었다. 18권으로 된 문학전집을 한아름 받고도 처음에는 속상하고 서운했다. 내가 바랐던 선물은 자전거였다. 책은 좋아했기 때문에 중학교 때 한국현대문학을 주루루 읽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때 문학한다는 친구들 사이에 끼어 말을 보탤 수 있었다.

중학교 때 읽었던 『광장』에서 기억에 남는 줄거리는 철학도 이명준이 남쪽도 싫고 북쪽도 싫어 자기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인 중립국으로 가다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내용이다. 대학 때 다시 읽었더니 줄거리 빼고는 모두가 처음 보는 듯한 내용이었다. 생판 낯선 문장이 가득했다. 독서회에서는 ‘광장’이냐 ‘밀실’이냐, 어떻게 살 것이냐를 놓고 되풀이해서 토론하고 논쟁하였다. 말이 막히면 소설을 흉내 내어 ‘고독해서 그래’하며 웃음으로 뭉개곤 했다.

광장을 읽으면서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명준의 남쪽 애인 윤애와 북쪽의 은혜를 놓고 줄다리기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때 읽은 『광장』에서는 석방 포로를 싣고 중립국으로 가는 3,000톤짜리 타고르호를 맴돌며 끈질기게 따라오는 갈매기 두 마리가 이명준이 사랑한 두 여자를 상징했다. 소설은 이명준이 그녀들을 따라 자살한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남 북쪽 어느 곳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선택하지 못한 회색인의 형상이었다.

남북의 분단을 다룬 『광장』을 읽으면서도 분단의 과정, 북쪽의 실상, 한국전쟁, 포로수용소의 선택 같은 문제를 가지고 토론했던 기억은 없다. 소설 속에서도 그런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친절한 설명이 따르지 않았다. 독서 모임에서 이영희 『전환시대의 논리』(1974), 송건호 『민족지성의 탐구』(1975), 에릭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1976)를 같이 읽기는 했어도 분단 현대사의 역사와 현실을 전면으로 다루지는 못했다. 현대사의 인식 지평을 넓힌, ‘해전사’는 그 뒤에야 나왔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첫 번째 권이 나온 것이 1979년이었고, 2권이 나온 것이 1985년, 6권으로 마무리 된 때가 1989년이었다. 1985년 무렵이 되어서야, 북한을 ‘북한식으로 알기’인 ‘북한 바로알기’ 학습이 시작되었다.

『광장』을 다시 읽었다. 내가 중학생 때 읽은 신구문화사판본에는 갈매기들이 윤애와 은혜를 표상했고, 1976년 독서 토론을 할 때도 그랬다. 그 뒤 오랫동안 그렇게 기억해왔다. 그런데 다시 읽으면서 보니 문학과 지성사의 1976년 8월 25일 출간된 ‘최인훈 전집 판’에서는 갈매기가 남쪽의 윤애와 북쪽의 은혜가 아니라 은혜와 그의 딸로 바뀌어 있었다.

1983년 여름에 태워버린 일기장과 메모들은 두고 두고 아쉽다. 소설 『광장』이 개작되어 주인공 이명준이 은혜를 선택한 것을 진작 알았다면 은미의 죽음에 맞춰 내 일기장을 태우지 않았거나, 숨겨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얼토당토않은 상상을 해 보았다. 아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과 폭력이 기승을 부리던 1983년이었기 때문에 태울 수 밖에 없었다. 광장과 밀실 사이에서 헤매던 갈등이 그렇게 표현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 『광장』이 다시 쓰여지듯이 내 '세월 따라 역사 따라'도 쓸 때마다 조금씩 바뀐다. 예전에는 '사랑이 별건가,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두고두고 떠나지 않는 사랑의 기억 또한 사랑이지' 이런 말을 안했었다. 만남도 이별도 인생도 다 미리 예정되어 있는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다.

박준성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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