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재 서남동 선생을 만나고 민중신학, 아니 신학 자체를 만나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섭리였다. 나는 원래 예장 새문안교회의 청년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가고 출옥한 후에 갈 데 없이 헤매던 나를 반겨줬던 곳이 기장 교단이 운영하던 선교교육원(서대문구 충정로)이었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거기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 보러 갔다가 여러 친구, 선배들의 권유로 입학하고 말았다. 지금도 생각하면 꿈과 같은 시절이었다. 우리는 갈 데 없었지만, 그곳에서 작은 공동체로 모인 학생-교수들과 어울리며 젊은 시절을 즐겁게 보냈다. 그때는 신학으로 밥 먹고 살겠다는 생각은 전연 하지 않았고, 그냥 모임이 좋았고 수업이 좋았다.

▲ 서대문에 위치한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에서 ⓒ죽재 서남동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 제공

지금도 서남동 선생이 열정적으로 떼야르 샤르뎅의 오메가 포인트를 강의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후에 그의 저서 “민중신학의 탐구”에 실릴 논문들을 미리 프린트해서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감격해 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서남동은 한반도와 그 남녘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그에 기반하여 상황을 변화해 보려고 몸부림쳤던 신학자였고 기독인이었다. 그의 “민중신학의 탐구”를 보면 이것이 역력히 드러난다.

그 당시 나는 어렸던 관계로 그의 사상적 고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운동권의 객기로 적절치 못한 질문을 던져서 그분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한번은 내가 기청 선언문 초안을 써서 서남동 선생께 자문을 요청해 보였더니 충분히 숙고되지 않았고, 젊은 혈기로만 쓴 글로 내용이 풍부하지 않다고 나무라셨다. 나는 그분으로부터 소위 이쁨을 받은 애제자는 아니었다.

내가 그분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유학 2년차였던 1984년 뉴욕의 어느 곳(스토니포인트였을 것임)에서 였다. 그분께 내가 미국에 해방신학 책들이 많으니 이것들을 다 읽으시면 더 좋은 것이 나올 수 있지 않겠느냐는 취지로 말씀을 드렸는데 그는 “민중신학을 하기도 벅차고 공부할게 너무 많다”고 대답하셔서 내가 멀뚱해졌다. 그러나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도 세군도라고 하는 해방신학자를 탐독하셨다고 한다. 나도 세군도를 매우 좋아했었다. 그해 님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다.

님은 한을 가진 채 민중신학을 후배들에게 부탁하고 아직은 더 일할 수 있는 연세에 홀연히 떠나셨다. 신학이라고 하는 학문 특히 님이 추구했던 민중신학의 연구 대상은 무엇이었나? 그에게 중요한 개념은 “역사적 지식”이었다. 역사적 지식은 그가 민중신학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사용했던 화두였다.

민중신학이 역사적 지식을 찾는 것이 목적이라면, 민중신학의 연구 대상은 역사 속의 민중이 아닌가? 그가 믿음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크나큰 범주 대신, 역사적 지식을 기본 범주로 삼았던 것은 그가 교리를 넘어서 역사 속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신적인 힘을 증거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두 이야기의 합류, 한, 성령(그리스도가 아니라), 계시의 하부구조 등 역사적인 범주들을 설정했다. 그의 신학은 민중의 역사 속에서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생명의 영을 분간하는 것이었다.

서남동ㆍ안병무ㆍ문동환, 이 세분은 나에게 아주 가까운 스승님이다. 서남동 선생님은 선교교육원 시절 줄곧 강의를 해 주셨고 지금도 그는 학문적으로 나를 이끄신다. 마찬가지로 선교교육원의 교수로 계셨던 문동환 선생님은 공부를 가르쳐 주었을 뿐 아니라, 나를 유학으로 이끄셨다. 안병무 선생님도 줄곧 강의를 통해서 가르쳐주었을 뿐 아니라, 내가 유학을 마친 후에는 한국민중신학회를 함께 만들고 함께 일했다.

그의 “민중신학 이야기”는 적어도 몇 군데에는 나를 피끌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그 대목은 항상 이 역사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그의 사건론은 역사적인 것이고 역사적 지식과 연관되어 있다. 나는 민중신학 안으로 태어났고, 그 속에서 자라왔다고나 할까. 민청학련사건을 계기로 민중신학과 사상이 본격화되었음을 볼 때, 그 사건으로 감옥에 간 나는 자연스레 민중신학 안에서 유영하게 되었다.

조직신학자인 서남동의 신학 사상은 나의 젊은 시절 이후 지금도 나의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야기, 한과 단, 계시의 하부구조, 두 이야기의 합류 등의 사상의 큰 물결은 나의 신학 속에 지금도 밀려오고 있다. 이런 범주적 개념들은 지금 우리 시대에 더욱 적합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사상은 나의 생각이 갈 수 있는 끝자락까지 인도해 주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신학으로 귀환하며, 그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즉 turn to 서남동하고 있다. 또한 그의 한국적, 아시아적 이야기로 귀환하고 있다. 그의 영은 지금도 잠자고 있는 내 마음을 뒤흔들어 주고 있다. 그의 한이 우리 안에 남아 있다. 진정한 학문은 한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신학 사상일수록 그 속에 한 인간으로서의 한, 그리고 집단적 민중의 한을 반영하고 있다.

서남동을 우리가 특별히 기리는 것은 그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가 민중신학을 시작했던 해가 1975년이라고 한다면, 그해 연초에 민청학련 사건에 연류된 교수와 학생들이 출옥했던 때였고 내 나이 23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안병무, 서광선, 몰트만 등을 만나서 신학적 대화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서남동은 1975-84년까지 약 10년간을 민중신학에 헌신하였다. 84년 7월 19일에 향년 66세에 돌아가셨으니, 올해 내 나이 66이어서 더 마음이 아프다.

세월은 이렇게 끊임없이 흘러 올해는 선생님이 태어나신지 100년이 되었다. 서남동 기념 책들 출간을 기획하고 있고, 곧 영문판 책도 나올 예정이다. 신흥고등학교에서 올초에 올해의 학교를 빛낸 인물상을 받으셨다. 선교교육원 동문들과 연세대 신과대학원, 한신대와 공동으로 개최되는 몇 개의 사업들이 진행될 예정이다. 죽재 선생은 연세대 신학대학원학장을 역임했고 한신대 교수를 하셨다. 우리가 선생을 기리는 것은 그의 인품의 아름다움이 있음이요, 그의 신학사상과 이론의 시대 적절성 때문이다.

이제 서남동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이것을 이렇게 생각한다. 우선 서남동의 가장 중요한 신학사상으로 돌아가는다는 것이고, 그의 성숙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마지막 10년 동안 혼신을 다한 결정체인 민중신학으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혹자는 서남동의 초기 사상인 폴 틸리히 사상, 과정신학, 샤르뎅 등의 생태 신학 등에 관심을 두고, 서남동이 특히 생태, 과정신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회귀하면, 1975년 이전의 서남동의 과정, 생태사상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이는 서남동을 서구신학의 아류로 만드는 우를 범하는 일이다. 서남동이 나를 전율시킨 것은 그의 민중신학적 돌파이며, 그가 혼신을 다해서 만들고 창조한 “두 이야기의 합류”와 “계시의 하부구조,” “한” 그리고 “역사적 지식” 등 창조적인 이론이다.

그러나 서남동은 이러한 창조적인 이론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곧 삶을 마감하였다. 마치 모세가 출애굽을 이끌었지만, 가나안 땅 입구에서 삶을 마감했던 것처럼, 서남동은 남한의 민주화의 문턱에서, 민중신학이 활짝 꽃피기도 전에 세상을 뜨셨다. 이번 촛불혁명의 전과정에서 나타난 민중의 이야기와 생각과 예술과 담론의 합류 속에서 영적 집단적 상상력이 터져나오는 사건을 보지 못하셨다. 그 촛불혁명의 힘으로 약자를 위한 사회변혁 뿐 아니라, 남북간의 화해와 통일로 진행되어 가고 있는 이 시대를 보셨더라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덩실 춤을 추셨을 것이다. 올해 그분을 기리면서 광화문 광장에서 축제를 하고 싶다.

서남동은 한을 품고 가셨다.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이어서 한스러운 죽음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생각하면, 그는 최선을 다했고, 그가 던질 수 있는 화두를 부족함없이 다 던지고 떠나셨다. 민중신학은 한의 신학, 한을 담은 신학이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서남동의 한과 민중의 한을 우리 안에 담고 사고해야 한다. 그리고 신의 역동적인 개입이 있는 이 역사 속에서 “역사적 지식,” 아니 “역사적 진리”를 찾는 과제를 충실하게 감당해야 한다.

권진관  jkkwon@mails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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