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첫 노동자 교육과 황주석 선배

▲ 고 황주석 선생

내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나에 대한 기억도 정확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잘못된 기억을 되풀이해서 기억하면서 고착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기 기억이 옳다고 착각한다. 증언이나 회고는 사실의 일부 근거일 뿐이다. 크로스체크와 점검이 필요하다.

오래 동안 내가 노동자교육을 처음 시작한 때는 1984년 여름이었고,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다음 가을학기부터였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이야기』에서 지은이 소개글에도 “1984년 가을부터 여러 대학을 오가며 강의를 했다”고 썼다.

첫 번째 노동자교육은 1984년 8월에 부천 YMCA 노동교실에서 했다. 내용은 노동교실이었으나 강좌제목을 그렇게 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인터넷을 뒤져 부천YMCA 황주석 총무가 1985년에 쓴 <노동청년클럽 활동에 관한 연구>를 찾았다.

그 당시 외부에 알린 강좌 제목은 ‘직장 청년을 위한 교양강좌’였다. '노동교실'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참가비는 매월 2000원이었고, 과목은 천자문, 경제, 역사, 법률, 회의 진행법, 레크레이션, 인간관계 훈련, 성과 결혼, 야외수업으로 이루어졌다.

강사 선정 기준도 실려 있다. “강사는 담당과목을 전공하여 대학에 출강하는 수준의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산업프로그램을 이해하고 노동청년에 대한 애정이 있는 지도력을 확보한다. 강사비는 없는 것으로 하고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 또한 개강 전에 강사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또는 개별적으로 교양 강좌의 목적과 취지를 설명하고, 교안에 대해 기본적인 토의를 가졌다”고 한다. 1980년대 부천 YMCA 뿐 아니라 노동교육 민중교육을 수행했던 다른 단체들도 대부분 강사료가 없었다.

역사과목을 강의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처음에는 연고가 있던 내 대학원 친구 이영호에게 해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자기 대신 나를 소개했다. 1984년 2월에 석사학위 논문을 제출 한 뒤, 역사의 주체인 노동자 민중의 역사를 연구하고 교육을 매개로 그 역사를 주인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닐 때였다. 해보겠다고 나섰다.

내 기억대로 그해 9월부터 대학에 출강하였다면 아직 '대학에 출강하는 수준'이라는 자격이 안 되었는데 어떻게 강의를 했을까. 이미 강의를 하고 있었거나 석사 논문을 썼으니 할 만한 ‘수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노동자교육을 하겠다고 나서는 자격있는 젊은 역사연구자가 없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혹시나 하고 일기장들을 끌어내 들춰봤다. 1983년 9월에, 몇 년 동안 쓴 일기와 수첩을 몽땅 태워버린 뒤 1987년 6월항쟁 이전까지 일기를 안 쓴 줄 알았다. 1984년 일기장이 있었다. 그전처럼 하루하루 깨알같이 쓰지는 않았지만 메모 형식으로 한 두 줄 쓰기도 하고 때로는 길게 쓴 날도 있다.

내가 머리 속으로 기억하고 있던 것과 달리 1984년 가을학기부터가 아니라 3월부터 경기대학과 성심여대에서 강의를 했다. 대학에 출강하는 수준의 강사 자격이 되었던 것이다. 부천 YMCA에서 처음 노동교육을 시작한 날 일기도 있다. 1984년 8월 1일(수) 첫 강의를 했고, 8월 4일(토) 두 번째 강의가 이어졌다.

첫 강의를 하던 날은 비가 조금씩 뿌리는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처음 강의를 마치고 나니 옷이 흠뻑 젖었다. 날씨가 덥고 강의 장소가 지하실이라 습하고 눅눅한 탓만은 아니었다. 대학 다닐 때 야학도 좀 했고, 한 학기 대학 강의를 하고 났을 때인데도 처음하는 노동자 교육이라 긴장을 많이 했다.

강좌에는 전자회사와 화장품 회사에 다니는 20살에서 25살 사이의 여성노동자들 30여 명이 신청했다. 강의를 들은 사람은 15명 쯤 되었다. 강의 주제는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였고, 두번으로 나누어 했다. 첫날은 강만길 선생의 ‘분단시대 역사학’, 둘째 날은 정창렬 선생의 ‘백성의식.평민의식.민중의식’을 바탕으로 강의안을 만들었다.

노동교실 강좌가 끝나고 나면 ‘과목과 강사에 대해 하나하나 평가하여 반응이 나쁜 과목과 강사는 다음 강좌에서 제외’한다는 방침이 있었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는지 강좌가 없어질 때까지 내내 역사를 담당하였다. 강좌가 이어지면서 남성 노동자들의 참가가 늘어났고, ‘학출(학생출신)’ 활동가들도 위장취업하듯이 강좌에 섞여 들어왔다.

성균관대에서 학생운동을 하고 1984년부터 부천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한 최동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때는 다 가명을 쓰고 전력을 숨기던 때라 누군지도 모르고 그러려니 하면서 어울렸다. 뒤에 1989년 인천지역노동자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안기부의 혹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90년 한양대학교에서 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최동인줄 알았다.

망월동 구묘역 끝자락에 그의 무덤이 있다. 그 앞에 설 때마다 부천 YMCA 노동교실 때 모습이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마석 모란 공원, 광주 망월동 구묘역, 양산 솥밭산 공원 묘역곳곳에 노동자 민중교육 과정에서 만나 인연 맺었던 숱한 동지들의 죽음이 줄지어 묻혀 있다.

강의가 끝나고 이어지는 뒤풀이 자리는 거꾸로 내가 노동현장과 노동자들의 삶과 말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뒤풀이가 끝나면 남녀 노동자들이 노동자들의 자취방으로 우루루 몰려가 잠깐 눈을 붙이며 새벽출근을 기다리곤 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아홉 팔팔한 때였으나, 스무살 갓 넘은 노동자들에게는 나이로도 선생님이었다. 자취방에 쓰러져 내 팔을 베개 삼아 잠들어 있는 동생 같은 여성 노동자들을 보면서 활동가들이 신조처럼 지켜야할 ‘도덕적 금욕성’을 되새기곤 했다.

부천 YMCA에 노동교실이 유지될 때까지는 강좌가 끝난 뒤에도 산행도 하고 역사기행도 하면서 노동자들과 만남을 이어갔다. 간혹 학출들이 노동자들을 지도하려 드는 꼴이 어설프고 눈에 거슬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친구처럼 어울리며 지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주로 강의를 매개로 만나다 보니 예나 지금이나 '선생님'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부천 YMCA에서 만난 황주석 총무와 인연의 고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1979년 ‘YH사건’ 때 황주석 선배는 YH노동조합 최순희 위원장의 남편으로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을 주선하였다.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YH노동자 김경숙의 묘비에도 그 이름이 올라있다.

YH 노동자들은 1979년 8월 9일 오전부터 11일 새벽까지 신민당사에 들어가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이다”고 외치면서 싸웠다. 진압하는 과정에서 스물한 살 김경숙(1958-1979)이 목숨을 잃었다. 8월 13일 박정희 유신 정권은 서울 시립강남병원에서 그의 시신을 재빨리 태워버렸다. 동료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어머니, 외삼촌, 동생과 회사관계자, 경찰만 입회시켰다.

김경숙 열사 10주기인 1989년에 김경숙추모사업회가 중심이 되어 추도식을 하고 가묘와 묘비를 세웠다. 뼛가루도 묻지 못하고 뼛가루 뿌렸던 곳에서 흙을 한줌 떠와 묻었다. 묘비 앞면의묘비명은 고은 시인이 썼다. 뒷면에 김경숙 열사의 약력과 함께 건립위원으로 YH노동조합과 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앞장섰던 동일방직노동조합, 반도상사노동조합, 콘트롤데이타노동조합, 원풍모방노동조합, YH노동조합의 권순갑, 박태연, 이순주, 최순영, 신민당사 농성에 도움을 준 김영삼, 문동환, 서경석, 이문영, 인명진, 황주석, 동생 김준곤 이름이 새겨져 있다.

YH 사건을 겪고 난 뒤 황주석은 1980년 마산으로 내려가 ‘사랑의 YMCA 노동형제단’을 꾸렸다. 전두환 정권의 폭력과 감시로 노동자들이 모이기 힘든 시절에 1982년 가을까지 15개 공장에 150명 가량되는 형제단을 조직했다. 훗날 19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을 겪으면서 1천명 이상 사업장 12곳에 노동조합이 결성 될 때 8개 사업장에서 노동형제단 출신이 위원장이나 부위원장 같은 간부를 맡았다.

부천 YMCA '노동교실'은 황주석이 마산에서 벌였던 노동형제단 경험을 바탕으로 꾸린 노동자 교육사업이었다. 부천 YMCA 교육인 인연이 되어 곳곳의 YMCA 청년강좌, 노동교육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가운데서도 홍성 YMCA와 서산 YMCA에서 여러차례 강의를 했다.가톨릭 농민회 교육과 함께 1987년 이전 내가 드러내놓고 다녔던 대표적인 노동자 민중교육 활동 공간이었다. 그리고 나를 노동자.농민교육으로 이끌었던 사람들은 그 뒤 조금씩 나와 다른 길을 걸어갔다. 내 강의가 계급성을 강조해서 그런지 시민교육이나 시민강좌에서는 "강의가 쎄다"며 별로 인기가 없었다.

부천 YMCA 교양 강좌가 없어진 뒤 어쩌다 한 번씩 보았던 황주석 선배를 2006년 항암 민간처방을 받으러 다니던 양구 생기마을에서 만났다. 1999년 비인강암에 걸려 몇 년째 투병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사정을 까마득히 몰랐다. 암도 나보다 몇 년 앞선 선배는 인제에서 텃밭을 가꾸면서 항암치료를 하고 있으니 한번 놀러오라고 하였다. 가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는데 2007년 2월 14일 쉰 여덟살, 아직 할 일이 많은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내 첫번째 노동교육을 돌아보느라 황주석의 『마을이 보인다 사람이 보인다』와 최순영의 『당신이라는 선물』을 읽었다. 투병중에 황주석 선배가 아내 최순영(Soon Young Choi) 전 YH노동조합 지부장에게 준 글귀가 자꾸 아프게 떠오른다. “힘들고 괴롭고 아플 때 미소를 배우지 않으면 언제나 익힐 수 있겠나...”

박준성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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