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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의 부활, 죽은 자의 부활(마가복음 16:1-7)강남향린교회 예고없는 철거를 규탄하는 부활절 연합예배
김경호 | 승인 2018.04.07 23:59

안식일이 지나니,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가서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래서 이레의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을 때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내 주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런데 눈을 들어서 보니, 그 돌덩이는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 돌은 엄청나게 컸다. 그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웬 젊은 남자가 흰 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그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만, 그는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입니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십시오. 그는 그들보다 앞서서 갈릴리로 가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십시오." (마가 16:1-7)

16년 전 강남향린 담임목사로 재직할 당시 임대 생활을 마치고 처음 교회당을 마련했다. 너무 기뻤다. 예배당을 어떻게 꾸밀까, 새로 마련된 방 하나하나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도심의 낡은 빌딩이지만 온 교우들이 마음을 모았다. 교회당 주변에 화단을 만들고 담장이를 심어 올렸다. 마음이 급해 옥상에도 화분을 만들어 담쟁이를 심어 내렸다. 그 담장이가 이젠 제법 교회를 덮었고 도심에서 고풍스런 운치를 자아내는 건물이 되었다. 그러나 오만한 자본은 교회나 예배, 종교의 자유쯤은 안중에도 없다. 부활절 앞에 갑자기 교회에 들이닥쳐 교회를 폐쇄하고 십자가를 떼어내고 강대상 등 모든 집기를 어디론가 실어갔다.

순순히 조합의 요구대로 따랐다. 교회는 보상금이 터무니없게 낮게 책정되었다는 소송을 진행하는 중이다. 헌법 제23조 제3항 ‘공공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 사용 또는 재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정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교회는 소송과는 별도로 이사갈 새로운 빌딩도 마련했다. 4월에 잔금을 치르고 4월말이나 5월초에 이사할 것이라는 것을 조합도 알고 있었다. 종교 시설의 경우엔 강제집행 시점이 임박하더도 지역 내 역할 및 사회적 의미 등을 고려해 가장 후순위 집행 대상지가 되는 것이 관례기도 하다. 아직 주변의 건물이 모두 퇴거한 것도 아니다.

▲ 서울동부지법 앞에서 강남향린교회 예고없는 철거를 규탄하는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설교하는 김경호 목사 ⓒ박상범 (향린교회)

서울시는 2009년 ‘서울시 뉴타운 지구 등 종교시설 처리방안’을 내놓은 적이 있다. 처리방안의 주요 내용으로는 △ 이전계획 수립시 관련 종교단체와 협의 △기존 부지와 이전 예정부지는 ‘대토 원칙, △ 현 종교시설 실제 건물 연면적에 상당하는 건축비용 조합 부담(성물 등 가치가 큰 종교물품에 대한 제작설치비 고려), △ 사업기간 동안 종교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임시장소 마련·이전비용 등을 고려하여 보상하도록 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중에도 가장 우선시 되는 권리이다. 그런데 아무런 계고장이나 예고조차도 없이 습격했다. 통상 강제집행이 결정될 시 법원은 계고장을 발송해 집행 사실을 예고하고 1~2주 간 자진 철거 기간을 두고 있음에도 서울동부지법은 이런 절차를 모두 무시했다. 동부지청에 항의 방문한 결과 조합측에서 강남향린교회는 까다로운 교회라서 강력한 저항이 예상되니 아무런 예고없이 집행해달라는 탄원서를 26일에 접수했고 법원은 접수 4일만에 기다렸다는 듯이 예고없이 교회를 털었다. 법원측에서도 이렇게 신속하게 알리지도 않고 집행하는 것은 유래가 없는 사례라고 했다. 조합과 법원집행관의 유착관계가 의심되며 비상식적인 절차에 대해 조사를 의뢰할 예정이다.

교회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강남향린교회를 먼저 시범케이스로 강제집행하면 주변 아직 퇴거하지 않은 개인들은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보호되어야할 종교의 자유는 종교인들이 매주 모임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역이용하여 주변을 정리하는 도구로 삼은 셈이다. 가장 존중되어야할 권리가 가장 무시해도되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아무래도 잘못 판단한 듯하다. 정권을 바꾸는데 앞장선 투사들의 교회이다. 강남향린교회가 꺾어지는가, 조합, 건설사, 이들과 연계한 법원이나 경찰이 온전한가 한번 해보자. 너희는 권력과 돈의 힘으로 나오겠지만 우리는 민심과 양심, 그리고 천심의 힘으로 나설테니 누가 이길 것인가 한번 해보자.

그런데 헌법적 기본권이 무시되었다는 것은 밖에서 보는 관점에 불과하다. 종교인, 신앙인들에 의하면 이는 실로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거룩한 영역이 파괴되고 예배가 중단되는 위기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신앙인에게 예배가 신성하게 계속드려져야 하는 것은 순교를 해서라도 지켜야할 절대명령이다. 그런데 갑자기 교회는 폐쇠되었고 십자가와 성물들은 뜯겨졌다. 이들이 종교기관과 교회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너무 모른다. 이들은 교회당 밀어 버리고 예배가 중단된들 무슨 대수냐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레위기 10장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불이 나와서 그들을 삼키었다. 제사장들이 죽었다. 예배의 신성성을 훼손하고 제단에 정해진 불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이다. 정해진 불을 써야하려면 언제라도 제단의 불을 끄지 않아야하는 것인데 아마 잠깐 불을 꺼트린 모양이다. 예배의 계속성과 신성성을 위반한 죄로 참사를 당한 것이다. 예배를 중단 시킨 다는 것은 용서 받지 못할 죄이다. 재판 중에 있는 교회를 제멋대로 폐쇠하고 훼손한 죄는 교회를 능욕하고 신앙의 자유, 종교의 신성한 권리를 침해한 죄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전 교단적으로 그 책임을 엄격하게 물을 것이다. 나아가서 모든 기독인들이 이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소수가 모이는 교회니 금방 잠잠해지리라 생각했나보다. 그러나 교회는 개교회가 재산을 운영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개교회의 재산이 아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며 법적으로는 공교회의 소유이다. 노회, 총회의 재산이다. 개교회는 사용자일 뿐이다.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강남향린교회 한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교회의 문제이다.

교회 목사는 개교회가 청빙하지만 노회가 파송한다. 왜냐하면 목사는 노회 소속이기에 그리고 목사의 임직은 총회가 관리한다. 이런 것은 공교회이기 때문이다. 이 공교회성을 다지기 위해서 매주 성찬식을 한다. 이는 전 세계에 흩어진 그리스도의 자녀들, 나아가서 지나간 세대와 앞으로 올 세대들까지의 연대의식을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일개 조합과 롯데건설, 법원, 경찰이 한 통속이 되어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 롯데기업에 부도덕 성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지금 총수가 수감중이다. 그런데도 반성하지 못하고 교회의 거룩함을 파괴한 사건에 대해서는 단지 소유권의 문제를 넘어서 중대한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로 보고 법적 도의적 책임을 물어 갈 것이다.

우리는 법적 사회적 책임을 묻지만 하나님께서도 예배와 교회를 능욕한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것이다. 문제가 있는 자들에게 하늘의 심판이 행해져 그 불의함이 명백하게 드러나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다시는 세상의 권력이 거룩한 것에 손대지 못하도록 하고, 원칙에 의하지 않고 불의한 유착관계에 의해 일이 처리되지 못하도록 하실 것이다.

용산참사의 망령이 아직 우리 가운데 있다. 오늘 용산의 유가족 고 윤용헌 열사의 부인이신 유영숙 님께서 방금 우리에게 소중한 격려의 말씀을 전해주셨다. 정권도 바뀌고 민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하지만 오늘 이 사건에서도 드러나듯이 권력과 돈의 유착은 민중의 권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전문 꾼들이 고용된 조합과 법원, 경찰, 공무원의 부정한 유착으로 계속 국민의 눈에서 피눈물이 솟게 만든다. 이들이야 말로 아직까지 도처에서 도사리고 있는 적폐세력들이다. 이제는 이런 적폐들, 국민의 생활 한복판에서 국민을 집어 삼키는 서민형 적폐들을 뿌리 뽑아야 한다. 아직 무리한 재개발 집행이 도처에서 국민들을 용산 참사의 늪으로 몰고가고 있다.

▲ 야웨께서 명하지 않은 불을 드리다가 죽음을 맞이한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 ⓒGetty Image

오늘은 부활절이다. 마가복음 16장은 엄밀하게 보면 부활에 대한 증언이 아니다. 빈무덤 이야기이다. 여인들은 단지 예수의 시체에 향유라도 바르려고 그곳에 갔다. 그들은 무덤을 막은 거대한 돌을 어떻게 굴려낼까를 염려할 뿐이었다. 그러나 무덤을 막았던 돌이 굴려져있었다.  예수의 시신이 사라졌고, 그가 걸쳤던 옷만 남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예수)가 그들(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갈릴리)에서 그(예수)를 볼 것이라”(마가 16:7)는 소식을 전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려면 갈릴리로 가라, 예수께서 먼저 갈릴리로 가셨다는 메시지였다.

본문에는 세 가지 지명이 나온다. 나사렛, 막달라, 그리고 갈릴리이다. 예수를 나사렛 예수라고 한다. 부활의 첫 증인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다. 나사렛, 막달라, 그리고 세포리스는 갈릴리 지역의 마을들이다. 그리고 부활과 관련해서 나타나는 지명이 엠마오이다. 이들 지역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갈릴리는 별개의 마을이었으나 로마가 헤롯가문에 왕권을 주고 대리 통치하게 되면서 예루살렘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로부터 갈릴리 농민들은 로마에 대한 세금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대한 십일조등 각종 세금까지 부담하게 되었다. 갈릴리 농민들은 로마의 계속되는 정복을 정면으로 맞서야 했으며 나사렛, 막달라, 가버나움 지역에서는 대규모 학살사건도 있었다.(호슬리, 『예수와 제국』,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145.)

특히 갈릴리지역에 위치하고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약 6Km 떨어진 곳에 세포리스는 갈릴리의 중심 도시였다. 세포리스는 두 차례나 큰 변란을 당한다. 헤롯대왕이 왕이 되었을 때(37 B.C)와 헤롯이 죽고 그의 아들 안티파스가 왕이 되었을 때(4 B.C), 두 차례에 걸쳐 세포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요세프스의 유대사에 의하면 시리아 총독 바루스는 그 도시를 완전히 불태우고 그곳의 주민을 노예로 팔아버렸다.(Ibid., 110)  

예수를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데 사도행전에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나사렛 도당이라고 부르며 소란을 일으키는 반란자로 부른다.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괴수입니다.”(행 24:5)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려면 가보라고 한 갈릴리는 예수당시 로마에 항거하다 전멸된 가장 아픈 이야기들의 고장이다. 복음서는 부활한 예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에 주목한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의 이야기는 유명한 부활의 증언이야기다. 엠마오 역시 그냥 단순한 지명이 아니다. 엠마오도 뼈아픈 한을 가진 고장이었다. 예루살렘 서쪽에 엠마오로 추정되는 여러 곳이 있다. 니코폴리스(Nicopolis), 쿨로니에(Kulonieh), 엘쿠베, 암와스등 여러 지명이 언급된다. 엠마오는 예루살렘 근처 구릉지역이어서 예루살렘에 접근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잦은 전쟁이 일어났다. 마카비시대를 연 중요한 전투도 엠마오전투였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땅이다.(마카베오 상 4장) 엠마오는 수많은 민족해방의 전쟁을 치러졌다. 엠마오의 지명이 불확실한 것은 아마도 엠마오가 일찍이 폐허가 되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지명은 불확실하지만 로마에 항거하다가 초토화된 전설적인 마을로 유명한 곳이다. 주전 44년에도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Cassius)는 유대 백성을 압제하고 학대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의 서쪽에 위치한 엠마오, 룻다, 담나, 고프나 주민들이 세금을 체납하자 주민들을 잡아서 노예로 팔아버리고 그 마을들을 학살하고 파괴해 버렸다.

엠마오는 갈릴리와 수백 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이지만 끔찍한 외세의 약탈과 만행으로 파괴된  마을이라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우연히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지만 그 길에서 벌써 앞서 길을 가고 계신 예수를 발견했다. 엠마오 도상의 이야기에서도 마가의 빈 무덤의 이야기가 반복되며 서로 연결된다.(누가 24:23-25)

이렇듯 성서의 부활의 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어떻게 현존하시는가의 이야기이다. 부활한 예수는 갈릴리로, 엠마오로 민족의 한이 서려있는 전설적인 현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제자들은 나중에 깨달을 뿐이다. 부활한 예수가 먼저 민족의 현장, 역사의 아픔이 서려있는 땅으로 가고 있었다. 제자들은 뒤늦게 그리로 향해 가면서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깨닫게 되었다.

예수의 부활은 산자의 부활을 말한다. 죽은자의 부활은 우리가 관심할 바가 아니다. 죽음후에 이루어지는 초월한 부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이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선물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살아있는 동안도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산자의 부활이다. 지금 아픔이 있고 눈물이 있는 곳에 함께하는 사람들은 부활을 체험할 것이다. 거기서 예수의 현존을 만나는 것이 산자들이 누릴 부활이다.

죽음이 꼭 숨이 꼴깍 떨어질 때 오는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 움직이지만 죽음의 세력에 갇혀있을 수 있다. 바울은 이를 사망권세, 죽음의 권세라고 부른다. 이세상의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항상 죽음을 담보로 인간을 위협하고 협박한다. 그들이 우리를 철거하고, 옥에 가두고, 해고하고, 폭행한다. 때로는 생업을 위협하고 생존권을 박탈하기도 한다. “너 그러면 감봉당해! 혼자 잘난 체 하다간 너 잘려!, 네 자식과 가족도 생각해야지! 옳은 일이라고 다 하냐?”이런 소리들이 우리를 굴복시킨다. 이것은 다 생명을 담보로 우리를 비겁하게 만들고 굴종케 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죽음의 세력, 사망권세이다. 바울은 이 죽음을 담보로 한 위협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고전 15:55)고 외친다. 이것은 “더 이상 죽음이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다” “우리는 죽더라도 비겁해지지 않는다.”는 승리의 외침이다. 바로 그것이 부활이다. 그것이 산자의 부활이며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장의 외침이다.

정부에서 헌법 개정안을 발표하였다. 감동적인 내용이다. 헌법 개정안은 그동안 시민사회단체에서 제안했던 내용이 거의 망라된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촛불은 시작이고 헌법 개정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개정안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혁명, 부마민주항쟁과 5·18민주화운동, 6·10항쟁의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시작한다. 추가 의견이 높았던 ‘촛불혁명’은 현재 진행중이라는 이유로 제외됐다.

부활은 마치 우리 헌법 전문에 3,1운동, 4.19항쟁, 부마항쟁, 5.18광주 항쟁, 6월 항쟁, 촛불혁명을 열거한 것과 같이, 갈릴리와 엠마오와 막달라의 사람들이 그들의 전설적인 역사를 불러내어 그들의 생생한 현장에서 맞닥뜨릴 때 부활하신 예수의 현존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아니고 산자의 부활이야기이다.

지금 우리는 부활의 산역사를 써가고 있다. 여기 모이신 분들은 처음부터 이 생생한 현장에 중심에 있었다. 회피하지 않고 동력을 만들고 이끌어온 역사의 주체이다. 끝까지 예수 부활의 역사가 이 한반도 민중의 현장에 살아 나오도록 우리의 부활이야기를 써가기를 바란다.

부활한 예수의 소식을 처음 들은 여인들은 단지 그의 시신에 기름을 바를 목적이었다. 고작해야 그들은 무덤을 막은 돌을 어떻게 굴려낼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이 살아나셨다”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예수의 무덤은 큰 돌로 막혔고 로마 병정들이 무덤을 지켰었다. 지금 강남향린교회의 입구는 펜스로 봉쇄되고 용역들이 지키고 있다. 그러나 부활절 아침 입구를 막은 돌은 굴려졌고 예수는 살아나셨다. 그 무덤 속에 그는 계시지 않았다. 롯데건설과 조합, 동부지청이 돈과 권력의 힘으로 신앙과 종교의 자유를 장사지내려 하였으나 우리는 부활할 것이다. 아픔이 있는 그곳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부활은 죽은 후의 세상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시고 지금도 살아 역사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보다 먼저 갈릴리로 엠마오로 가십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우리들의 작은 몸짓이 큰 태풍이 되도록, 낡은 역사를 청산하고 새 역사의 기운을 일으키십니다. 세상에 나가 우리보다 앞서가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부활의 영이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김경호  kim17kh@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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