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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 벼리(바탕)은”-是謂道紀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14
이병일 | 승인 2018.04.09 22:34
“그것을 보아도 보이지 않으니 이름 하여 이(夷; 평평하다, 온화하다)라고 한다. 들어도 들리지 않으니 이름 하여 희(希; 드물다, 성기다)라고 한다. 잡으려 해도 얻을 수 없으니 이름 하여 미(微; 은은하다, 은밀하다)라고 한다. 이 세 가지는 따져서 이를(도달할) 수 없으므로 섞어서(합하여) 하나로 된다. (하나는) 그 위에 밝음이 없고 그 아래에 어두움이 없고, 재고 재도(아무리 탐구해도)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무물(無物)로 다시 돌아가니 이를 일러 형상 없는 형상이라 부르고, 물질 없는 상(象; 모양)이니 이를 일러 홀황(흐릿하고 멍함)이라 부른다. 앞에서 맞이해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뒤에서 따라도 그 뒤를 볼 수 없다. 예전의 도를 가지고 지금의 있음을 다스리고, 능히 태고의 시원을 아니, 이를 일러 도의 벼리(밑바탕)라 부른다.”
- 노자, 『도덕경』, 14장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至計), 故混而爲一. (一者) 其上不曒(攸), 其下不昧(忽). 繩繩(尋尋)<兮>不可名(也),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忽恍.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今)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노자는 도의 바탕(벼리)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나 도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설명할 수 없고, 따져서 도달하거나 아무리 탐구해도 이름을 붙일 수 없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지고한 신에 대하여 각자가 경험하고 체험한 만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든가 노자의 道라든가 하는 대부분의 종교적 진리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과학적 진리처럼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종교적으로 참회를 한다든가 참선을 하는 행위를 통하여 스스로 체험한 것이 없이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진리들이 많습니다.

하나는 위에 있는 임금은 벼슬이나 재물 등 인위적인 수단을 쓸 일이 없어 급하지 않으며, 아래에 있는 백성은 쾌락과 벼슬을 구하지 않아 허둥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와 아래가 이해득실의 마음이 사라져 오직 자연의 덕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무물은 쾌락을 추구할 물질적 대상(오음, 오미, 오색)이 없다는 뜻입니다. 인위적인 명분과 수단이 없다고 하여 현실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실에는 만물을 낳는 도의 덕, 즉 상(象)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Getty Image

노자는 물질 없는 상의 상태에서 사람이 황홀하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아득하고 흐리멍덩한 것은 이해관계의 분별을 떠나 편하고 만족스러운 상태를 뜻합니다. 사물로서 형상을 지니지 않지만 그 작용은 무한하니, 가히 황홀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사물 없는 형태로 돌아간다’ ‘모양 없는 모양’ ‘사물 없는 모양’의 얼굴 없는 도의 모습을 잘 응시할 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잡히지 않는 도의 실체를 황홀 중에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지나온 모든 길은
곧 당신에게로 향한 길이었습니다.
내가 거쳐온 수많은 여행은
당신을 찾기 위한 여행이었습니다.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 조차도
나는 당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당신을 발견했을 때,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 역시
나를 향해 걸어오고 계셨다는 사실을...
- 잘랄루딘 루미의 시 “당신”

인간은 삶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체험을 통하여 스스로를 자라게 합니다. 진지하게 삶을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절대자나 도를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따를 뿐만 아니라, 그 따름을 삶의 끝까지 계속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른다는 것은 일시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삶 전체를 인도하는 지향과 목적을 예수님이 먼저 걸어가신 그 길에 맞추는 것입니다.

“악하고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보면서 “하느님의 아들”(신의 아들)이라고 소리치며 유혹합니다. 그들의 의도는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행하지 말고 자기들을 그대로 놓아달라는 협박이며 유혹이었습니다. 그들은 협박과 유혹은 자기들의 정책에 반대하지 말라고 협박합니다. 악하고 더러운 귀신과 동일시되는 지배세력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함으로써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지배이념 속에 예수님의 활동과 능력을 포함시키기 위해 회유(포섭)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지 사람의 아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저런 천한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와 함께 어울려야 할 사람이다.’
지배자들에 의한 권력의 사용은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이익을 위한 것이 되고, 종교의 기능이 낙오된 사람들을 섬기지 않고 지배층을 숭배하는 것으로 전락할 때에, 바로 그 때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제도권 밖에서’ 어떤 구원의 길을 찾게 됩니다. 그 때에는 제도를 거부하고 법을 어겨서라도 인간으로서의 삶과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깊이 숨어 있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민중, 즉 오클로스의 특징은 따름과 지속성에 있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을 때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무덤에 묻힌 후에 부활의 첫 장면을 보고 깨달을 때까지 여인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따름의 지속성은 순간이 아닙니다. 민중의 따름은 그의 마음에 강한 희망으로 자리 잡은 깨달음이고 가치관입니다.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은 그 민중들과 언제나 함께 했습니다.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따른 민중들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따른다는 것은 제자가 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제자(혹은 사도)라고 하는 것은 순간적인 일시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지향과 목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깨달음과 활동이 지속적이기를 빕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진정한 민중으로 살기 위하여”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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