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5월 3일 토요일 오후,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 홍순권 형 집에서 근로기준법 세미나를 하던 날이다. 그때 세미나에는 31살이었던 나보다 3-5년씩 위인 남지대, 윤한택, 이병창, 홍순권 선배가 참가했다. 모두 역사와 철학 분야에서 석사논문을 쓰고 난 소장파 젊은 연구자들이었다. 1980년대 내가 참가했던 연구자들의 '언더모임' 둘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나를 빼곤 모두 혼인을 한 상태였다. 세미나를 할 마땅한 공간이 없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세미나를 했다.

남지대 선배는 규장각에서 조교를 같이 했기 때문에 80년대 내내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운동권' 사람들 만나고, ‘대중교육’하러 갔다가 술을 퍼마시고 돌아다니느라 규장각 일을 소홀히 할 때면 내가 해야할 일까지 챙겨주었다. 또 다른 언더 모임의 이세영 선배와 함께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내가 '광장'과 '밀실'사이에서 갈짓자 걸음으로 헤맬 때도 여러모로 후원하고 지지해 주었다. 인생과 세상에 대한 회의와 고민을 편하게 털어 놓을 수 있었고, 세상에 대한 분노와 울분을 참 많이도 들어준 선배들이다.

한쪽 언더모임에서 맑스.레닌주의 원전을 중심으로 세미나를 하다가 전태일 열사와 노동현장을 좀더 가깝게 이해하려는 방편으로 ‘근로기준법’ 공부를 하기로 했다.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평전’이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의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판된 때가 1983년 6월이었다. 전태일 열사가 옥편을 찾아가며 깨알같은 한자투성이 근로기준법을 공부했고, 끝내 자기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붙여 쓰러지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다는 근로기준법이 어떤 내용인지 알아보려고 했다. 1980년대 중반의 현실에서 ‘준법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노동법의 기본은 알아야 했다.

<<노동법>>이라는 책을 가지고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고 있는데 오후 4시가 지나면서 다들 콜록콜록 재채기를 하기 시작했다. 인천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최루탄 가스가 섞여서 그랬다.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쏴 댔으면 인천 주안에서 쏘아댄 최루탄 가스가 부천까지 날릴까.

서둘러 세미나를 마치고 인천으로 갔다. 나는 예전부터 책상머리에 앉아 가려운 현실 대신 엄한 책상다리만 긁고 있는 연구자들보다는 투쟁의 주역은 못되더라도 박수치며 응원하는 구경꾼들이 역사를 움직이는데 더 큰 힘이 된다고 생각했다. 투쟁의 증인이라도 되려면 현장에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1985년 2.12 총선에서 예상과 달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공약으로 내건 신민당이 제1야당이 되었다. 1986년 신민당은 전국시.도지부별로 개헌추진위원회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민통련은 신민당이 연 결성대회가 끝나면 지역조직이 주도해서 가두시위를 벌이곤 하였다.

1985년 3월 29일 결성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화운동 세력은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을 앞세워 5월 3일 민주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평화적인 농성을 벌일 계획이었다. 노동운동권인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과 인천노동운동연합(인노련)은 신민당의 기회주의를 폭로하고 직선제 개헌 대신 민족민중민주헌법(삼민헌법) 쟁취를 내세우면서 노동자가 독자로 정치세력화하는 계기로 삼으려고 했다.

4월 28일 서울대생 김세진과 이재호가 전방 입소훈련을 거부하며 시위를 벌이다 분신을 했다. 4월 29일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의 김대중, 민통련의 문익환 같은 이들은 학생들이 주장하는 반미. 반핵, 해방 같은 주장을 지지하지 못한다고 선언하였다. 4월 30일에는 전두환이 3당 대표와 만나 임기 중 개헌 가능성을 내비쳤다. 서노련과 학생들은 신민당이 전두환과 타협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5월 3일 정오부터 시위가 시작되었다. 민통련은 “군부독재 타도하고 민주정부 수립하자”고 외쳤고, 서노련의 구호는 “속지 말자 신민당, 몰아내자 양키놈”이었다. “철천지 원수 미제와 그 앞잡이 깡패적 반동정권의 심장부에 해방의 칼을 꽂자” “학살 원흉 처단하고 신민당 배격하자”는 구호도 외쳤다.

5시 무렵 우리가 탄 버스가 주안역 근처에서 시민회관 쪽으로 더 이상 못갔다. 버스에서 내렸다. 주안4거리 쪽에서 시위대가 경찰이 쏘아대는 다연발 최루탄에 밀려 흩어졌다 모였다 하면서 시위를 계속하고 있었다. 최루탄 가스가 자욱하게 하늘을 덮었다. 인천에서 서울 쪽으로 바람이 불었다. 최루탄 가스를 맞받아 마시자니 한참씩 주저앉아 눈물을 흘려야 했다. 시위대 쪽으로 가다가 전경들이 막으면 큰 길을 버리고 샛길로 돌아갔다.

갑자기 옆으로 후다닥 쫓기던 학생들이 사복 짭새들에게 붙잡혀 등 뒤로 손이 꺾인 채 끌려갔다. 집으로 뛰어들어 숨은 학생들까지 끌고 갔다. 으르렁거리듯 휘젓고 설치는 짭새들에게 소리한번 지르지 못하고 슬금슬금 피하면서 주안역에서 시민회관 쪽으로 빠지는 길까지 갔다. 주안역 앞에는 전경들이 늘어져 앉아 있다. 먼 곳에서 한 차례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잠잠해졌다. 날은 어둑해지고 상황은 끝나가고 있었다.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소주를 한 잔씩 나누고 나와 시위대와 경찰이 떠나간 시민회관 앞으로 갔다. 깨어진 보도블록, 여러 유인물, 플랭카드가 발길에 채였다. 시민회관 벽에는 빨간색 스프레이 페인트로 쓴 “인천을 해방구로” “8시간 노동 쟁취하여 노동자 생존권 보장하자”는 구호가 초저녁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 부평역 앞에 내려 포장마차에서 다시 소주를 더 마셨다.

새벽 한 시쯤 신림동에 있는 자취방으로 돌아와 얼굴에 묻은 최루탄 가스를 씻어냈다. 그날 일기 한 대목을 “적대적인 모순에 대하여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비타협적인 자세로, 비적대적인 모순에 대하여는 비판과 자기비판을 통한 역량의 확산을 토대로 지난한 해방의 날을 위해 전진하자”고 썼다. 지금보면 감정과잉에 어디서 베낀 것 같은 도식적인 표현이 어색하고 부끄럽다. 그때는 그렇게 살겠다는 심정으로 썼을 것이다.

1986년 5월 3일 세미나를 같이하고 늦게나마 인천 5.3항쟁 현장을 찾기도 했던 선배들은 1980년대 말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연구자 조직에서 한 몫들을 했다. 타는 배는 달랐으나 모두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저어 나가려고 했다. 남지대 선배는 1988년 9월에 만든 한국역사연구회에서 활동하였고, 윤한택, 홍순권 선배는 1988년 11월에 만든 구로역사연구소(지금 역사학연구소)에서 번갈아 소장을 맡았다. 이병창 선배는 1989년 3월에 만들어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대표를 맡았다. 대학 강사시절에는 다들 강사노조 활동에 앞장서거나 열심히 참가했다.

누구든 자신에 대한 기억은 자신의 기록과 머리속에만 담겨 있지 않고 관계를 맺었던 수많은 타인의 기억 속에도 담겨 있다.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 속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기억은 ‘그때 거기’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다른 사람들 기억 속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담겨 있을까 궁금하다. 서로 연락하고 물어보면서 내 부족한 기억을 보충할 짬 마련할 틈도 없이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그때 세미나를 같이했던 선배들은 1986년 5월 3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이렇게 실명으로 거명되는 것을 꺼려하지나 않을까. 또 다른 언더모임의 성원들은 1988년 역사연구자들의 조직개편 과정에서 나만 '구로역사연구소'에 참가하고 모두들 '한국역사연구회'를 만드는데 주축이 되었다.

박준성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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