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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以後, 목숨을 건 추락세월호 참사 4주기 추모 기도회에서
이은선 | 승인 2018.04.13 22:41
“예수께서 가까이 와서 빵을 들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또 생선도 주셨다.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내 어린 양을 먹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 그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주님,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을 먹여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너의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요한복음 21장 13-18절)

1.

세월호 4주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4년 전 그때도 그랬던 것처럼 교회의 부활절과 4.16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항상 같이 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월호와 더불어 부활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고, 올해도 역시 그랬습니다.

오늘 제가 선택한 성서 텍스트도 다시 부활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요한복음 마지막 장의 부활하신 예수의 현현 이야기이고, 특히 베드로와 관련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제가 집중해보고 싶은 물음은 부활 자체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부활을 경험한 이후의 삶에 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세월호 사건과 더불어 다양해진 부활 이야기들로 한국 교회의 부활에 대한 성찰이 더 깊어지고 더불어 우리 삶과 죽음도 더욱 인간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저는 한국 교회와 사회가 지난 세월호의 일을 겪으면서 이미 한 편으로 깊은 부활의 체험을 통과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통상적인 부활 이야기에서는 그렇게 자주 거론되진 않지만, 오늘의 신학 언어로 ‘사회적 부활’ 또는 ‘공적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이후 한국 사회와 교회가 그 참사와 더불어 뼛속까지 경험한 비참과 고통, 거기서의 몸부림을 통해서 큰 변환과 전환을 겪은 것을 말합니다.

▲ 세월호 참사 4주기 추모기도회에서 세종대 이은선 교수가 말씀을 전하고 있다. ⓒ윤병희

우리가 보통 ‘촛불혁명’이라고 칭하지만, 저는 이 촛불혁명이야말로 세월호가 촉발시킨 우리 사회와 공적 영역에서의 소중한 부활이고, 거기서의 보통사람들과 특히 유족들의 변화와 달라짐은 우리가 ‘부활’이라는 말 외에는 다르게 서술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전환과 비약인 것을 봅니다. 한국 사회의 변방이라면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외진 곳의 일상의 사람들이 전통의 국가와 교회와 권위를 뿌리에서부터 흔드는 정의와 진리의 전사로 거듭났으니 그것을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경험한 부활의 실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까지도 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진 것이 거의 없고, 제2차 특조위 구성이 시작부터 진통을 겪고 있으며, 참사 유족들에 대한 비방의 글도 여전히 넘치는 것 등을 들어서 다르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가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넘어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 유족들이 중심이 되고 주체자와 주관자가 되어서 각종 활동들을 통해 세월호를 이제는 현대 한국의 삶을 앞뒤로 가르는 중요한 좌표가 되도록 했다는 것 등은 부인하려야 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우리가 소중하게 경험한 부활의 실제이고 체험입니다.

3.

그러나 오늘 제가 더 집중하고 싶은 물음은 그 이후의 일에 관한 것입니다. 앞에서 읽은 신약성서 텍스트에 따르면 부활해서 현현하신 예수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연거푸 물으십니다. 그러면서 만약 네가 그러하다면 이제는 ‘내 양을 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서 그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늙어서는 남들이 너의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즉 부활을 경험한 베드로가 그 이후로 살아갈 삶이란 결코 어떤 영광이나 정의, 평화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거기서부터 더욱 멀어진 삶, 자유롭고 고통이나 고난이 없는 삶이 아니라 그와는 달리 극도의 부자유와 비주체와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끝없는 나락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그것은 ‘목숨을 건 추락’의 일이라고 하겠는데, 그래서 부활이란 보통 말하듯이 ‘목숨을 건 비약’이 아니라 오히려 ‘추락’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지시하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4.

그동안 세월호 참사 4주기를 맞이하기까지 세월호를 통해서 한껏 드러난 세상의 불의와  싸우면서 한국 사회와 특히 유족들은 일종의 주체됨을 경험했습니다. 변방의 목소리가 경청되는 경험과 스스로의 힘으로 싸워서 세상이 조금씩 변화해 가는 것을 보면서 나름의 자존감과 자신감도 회복했습니다. 그렇게 부활의 실제를 경험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부활의 경험조차도 오늘 4주기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여전히, 아니 점점 더 크게 들려오는 전방위적인 진실의 조작(fake)과 날조, 사실의 왜곡과 더불어 또한 내부에서도 점점 더 균열의 소리가 들리는 함께 해왔던 사람들 간의 불신과 다툼, 시기와 상호 비방 앞에서는 다시 그 힘을 잃는 위기를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앞으로의 긴 날들을 살아갈 희생자들의 젊은 형제와 자매 유족들이 겪는 비방과 진실 조작의 소리들은 이들을 다시 절망과 무력함의 나락으로 빠뜨립니다. 오늘 단지 세월호와 관련된 일뿐 아니라 점점 더 그 강도가 세지면서 우리 사회를 무차별적으로 강타하고 있는 사실 날조와 거짓의 죽임 앞에서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페이크 뉴스의 진원지라고 합니다. 종교와 교회가 ‘믿음’(信)과 ‘진실’(그리스도)의 주재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현실에서는 그 반대이니 이 아이러니 속에서 세월호 물음과 관련해서도 그렇고 오늘 우리 공동체적 삶을 그 근본에서부터 말라죽게 하는 이 사물에 대한 왜곡을 어떻게 할 것인지, 어디에서 그 극복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인지,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의 이야기는 거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를 묻고자 합니다.

5.

오늘 성서의 이야기는 우리의 부활 경험 이후에 오히려 ‘목숨을 건 추락’을 요청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부활을 경험하고서 하나의 ‘주체’로 선 내가 기대할 일이란 나의 주체를 단단히 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포기하는 일이고,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묶어서 끌고 가는 데로 가면서 팔을 벌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자기를 버리는 무아(無我)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철저한 비주체의 삶을 말하고, 스스로를 제로로 만들면서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배경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렇게 하는 이유는 바로 그처럼 자아는 죽고, 내 감정에 고삐가 물리고, 우리 사적 욕망과 이해추구의 욕구를 버릴 때 대신 ‘사실’과 ‘진실’과 ‘세상’과 ‘객관’이 더욱 온전하고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와 자아의 욕구와 욕심에 의해서 훼손되고 왜곡되었던 사실이 치유되고 밝혀지면서 다시 그것이 우리 행위의 진실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이란 말과 행위와 약속과 용서의 믿음의 일로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 인간적인 행위의 기초가 되는 사물과 사실과 세계가  소름끼치는 동요 속으로 떨어지게 되면 우리 삶은 지속될 수 없고, 유지되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월호 유족들의 여러 활동 중에서 소수의 어머니들이 주축이 되어서 끌고 가는 ‘세월호 기억저장소’의 일은 아주 귀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복음의 그루터기가 된 소이는 바로 그렇게 자아를 버리는 목숨을 건 추락의 일을 통해서 예수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회복시키고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만일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너를 제로로 만드는 돌처럼 되어야 한다고 청하셨습니다. 긴 세월의 풍상과 바람과 부침에도 쉽게 흩트려지지 않는 돌과 같이 너를 제로로 만드는 일을 통해서 ‘사실’과 ‘진실’을 간직하고 보존하고, 이어주주면서 세상과 그 양을 위해서 토대가 되어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6.

오늘 우리 시대는 진리가 수천 가지의 모습으로 패러디화 될 수 있고, 무한한 활동의 장을 가질 수 있는 ‘포스트 진리’(post-truth)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대에서는 예전에 우리와 특히 우리 진보주의의 선배들이 해왔던 방식으로 진리를 단지 말로만 가르고, 자신을 그 진리와 진실의 담지자로 앞세우는 방식을 통해서는 시대의 진정한 동의를 얻어내기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우리 자긍심의 기초로 삼아왔던 진리와 진실은 거기서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을 無로 돌리고 제로로 만들라고 요청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진실이 온전히 드러나지 못하고, 그렇게 될 때 우리 자신도 자칫 투명하지 못한 거짓과 위선과 교만의 분쟁 속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참으로 두려운 시대이고,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이며, 온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서 사물의 각개를 알아볼 수 있도록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또한 때를 맞추어 ‘물러나는 것’(退)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각주 1)

저는 이렇게 우리가 ‘사실’ 앞에 겸허히 자신을 내어놓고, 그것을 우리 욕망과 권력으로 덧칠할 일이 아니라  온전히 그 ‘존재자체’(thereness)로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를 내려놓는 일, 그래서 그 사실의 진실이 우리 삶의 그루터기가 되도록 하는 일, 그 일을 베드로가 요청받았고, 베드로는 그 일을 이루어냈으며, 그래서 그는 교회의 반석이 되었고, 오늘의 우리도 그 교회의 복음을 듣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일이란 이제 우리 자신에 대한 몰두에서 벗어나서 대신 세계와 사실에 집중하는 것이고, 그렇게 사실은 완고성에서 어떤 권력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는 일일 것입니다.(각주 2)

7.

오늘날 정의의 물음이 더 이상 현재와 인간 사이만의 물음이 아니고 과거가 온통 날조와 왜곡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물과 세계 자체가 권력과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조작당하고, 난도질당하며, 거짓과 폭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마당에서는 베드로처럼 자아를 철저히 비우는 방식의 저항과 투쟁이 요청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 스스로도 거짓과 폭력의 괴물과 싸우다가 스스로가 괴물이 되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세월호의 경험을 통해서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다시 방향감각과 실재감을 얻으려면 그렇게 우리의 자아를 버리는 방식을 통해서 싸움을 계속해 나가야겠습니다. 예수도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재차 물으셨듯이 그 길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버리고, 진리를 위해서 산다는 의식도 지양하면서 온전히 사실과 진실이 밝혀지고 전해지도록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자리를 빌어서 오늘 우리 각자는 우리의 자리에서 어떻게 이 세월호의 진실과 사실 앞에서 스스로를 비울 것인지, 그것이 비록 한없는 추락이 된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일에 용기를 내어서 함께하며 참된 부활의 증거자가 되도록 할 것인지를 묻고자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4주기를 맞아서 이 자리에서 다시 드리는 예배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참사와 더불어 오늘 한국 사회에는 그동안 흔들린 과거의 사실들로 인해서 위험과 위기가 적지 않습니다. 돌과 사실은 비록 죽은 것처럼 보이고, 아무 말도 없는 듯 보이지만 결코 죽은 것이 아니고 소리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돌들의 외침이 진실이고, 그 돌들은 산 돌로서 참된 부활의 외침이고 열매입니다. 이 사실과 진실에 대한 선한 믿음(信)이 우리의 인도자이십니다. 다음의 시는 그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사실(事實) II>(각주 3)

아무리 부정하고 부정해도
그것이 사실이니 좋습니다.

어떤 증거를 하나라도
세울 수 없어도
그것이 사실이니 좋습니다.

모든 사람이 부정하고
부정해도
그것이 사실이니
좋습니다.

모든 사람이 부정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어버렸어도
그것이 사실이니
좋습니다.

모든 사람이 잊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한 사람도
모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사실이니
좋습니다.

다른 사람이 모를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내가 한 일을
다 잊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사실이라면
좋습니다.

내가 그 사실을
잊었을 뿐 아니라
나도 내가 한 일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사실이니
좋습니다.

좋습니다.
좋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니
좋습니다.
남이 몰라도
좋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니
좋습니다.

좋습니다.
좋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니
좋습니다.
내가 잊어버렸어도
좋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니
좋습니다.
-1968년 아이오와(Iowa)에서

각주

(각주 1) 이원진, “고령기의 퇴계 이황 선생: 물러섬(退)의 학으로 한 삶을 마무리”, <동양일보>, 2018.04.08.
(각주 2) 한나 아렌트, 「진리와 정치」, 『과거와 미래사이』, 서유경 옮김, 푸른 숲, 2005, 347쪽.
(각주 3) 이신, 『李信詩集 돌의 소리』, 이경 엮음, 동연 2012, 59-61쪽.

이은선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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