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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죽재의 아픔과 부활내가 만난 서남동 목사 ⑭
이영재 | 승인 2018.04.15 21:37

서남동 목사님의 존함을 처음 듣게 된 것은 우리 어머니로부터였다. 대구 동문교회에서 목회하실 때 우리 어머니는 서남동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회고하셨다. 어머니의 아버지 곧 나의 외할아버지께서는 동문교회의 장로님으로 봉직하셨다. 서남동 목사님은 동문교회에서 목회하시다가 서울로 교수로 초빙되어 가셨다고 어머니는 회고하셨다.

서 목사님께서 동문교회에 시무하시던 시절에 우리 어머니는 처녀 시절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를 따라 동문교회를 다니시던 어머니는 항상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고 하셨다. 주일마다 목사님이 설교를 듣기는 하는데 그 말씀이 도무지 무슨 뜻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셨다고 어머니는 투덜대셨다.

나는 그 설교를 못하시는 목사님이 서남동 목사님이셨다는 사실을 나는 1975년에 한국신학대학의 신학생이 된 이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신학교 입학했을 때 서남동 교수님은 연세대학교에 재직하고 계셨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는 합동측 교회를 다녔다. 고등학교는 대구에서 통합측 ‘동로교회’를 다녔다. 동로교회는 ‘동문교회’가 ‘종로교회’와 합쳐서 생겨난 이름이다. 그 교회에는 도서관이 있었는데 오래된 신학책들이 많이 있었다. 아마도 서남동 목사님 때부터 조성한 도서관이 아닌가 싶다.

나는 많은 시간을 그 도서관에 보냈다. 신학 책들을 읽는 재미에 푹 빠진 것이다. 그 때 읽은 책 중에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함석헌의 『민족과 역사』나 『성서로 본 한국역사』 같은 책들이 있었고, 문익환의 기독교서회 60주년 기념주석서 『창세기』가 특히 기억난다. 이 책들은 신앙의 싹이 한창 자라고 있던 청소년에게 풍부한 자양분을 제공했다. 특히 문익환 목사님의 창세기 주석서 앞부분에 JEDP사문서에 대한 설명을 읽었을 때 성서신학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읽고는 성령을 받는 체험을 하였다. 나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로 진학을 하기로 결심했을 때 함석헌 옹이 강의하는 한국신학대학교를 택했다. 함 선생님께서 한국신학대학의 목요강좌에서 강의한다는 학교 안내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신학공부를 위한 나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동로교회 도서관에서부터 싹튼 신학의 여정이 서남동 목사님과 처음부터 관련되었다고 굳이 연결하여 보고 싶다.

▲ 1973년 11월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지지하며 한신대 교수단 전원이 삭발 시위를 감행했다. 오른쪽부터 김정준, 김이곤, 박근원, 안병무 교수. ⓒGetty Image

내가 75학번이니까 1학년 신입생 때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되었다. 4.19날 선배들과 교내시위에 참여했는데 이튿날 휴교령이 내려서 기숙사에서 쫓겨났다. 휴교 중에 명동구국선언 사건으로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등 교수님들이 구속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교내시위, 휴교령, 교수님들의 구속이라는 일련의 사건으로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나는 용산직업소년학교라는 야간학교에서 수학 선생으로 봉직하면서 교회는 서울성남교회를 다녔다. 어머니는 서울성남교회에 가면 진기숙이란 전도부인이 있는데 대구 동문교회에서 서남동 목사님과 함께 동역하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서울성남교회에 다니면서 청년회도 기웃거렸다.

서울성남교회에서 처음 만난 선배는 황주석이라는 분이었다. 이 분의 소개로 교회에서 주최한 사회과학 강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74년도에 구속되었던 민청학련 사건으로 재적된 선배들이 철학, 사회학, 경제학, 일본어 등을 강의하였다. 장상환, 이해찬 선배 등의 강의가 기억에 남는다. 이 강좌를 통해 사회의식에 논을 뜨게 되었는데 황주석 선배의 주선으로 장안의 17개 교회 청년회 대표단을 꾸려서 성서공부 그룹을 만들고 그것을 기점으로 소위 ‘기청’이란 단체를 꾸리게 되었다.

이 당시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내가 습득하고 있는 신학의 지식으로는 사회변혁운동을 이끌거나 참여하기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민중신학이란 논문이 나오지 않았다. 안병무 선생님이 쓴 역사와 예수를 가지고 청년들이 함께 공부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성서공부를 간단히 끝내고 이어지는 커리는 대개 마르크스나 레닌 아니면 네오-마르크시즘 정도의 일본어로 된 책들이었다. 성서라는 고리를 간단히 거친 후에 사회주의 세계관으로 바로 넘어갔다.

한국신학대학교에서는 김정준 교수님이 학장으로 계셨는데 이 분의 지도하는 구약학회에 참여하면서 구약성서학에 대한 관심을 커졌다. 김정준 교수님은 명동구국사건과 같은 시대의 아픔 속에서 지병이 재발하여 몸져누우셨다. 나중에 서남동과 안병무의 민중신학 논문을 대할 때마다 구약성서를 가지고 민중신학을 전개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나는 김정준 선생님께서 건강악화로 일찍 돌아가지 않으셨더라면 구약성서의 민중신학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었다.

나는 기청 활동과 야학 활동을 하면서 수도권 산업선교회나 빈민운동의 선배들과 만나면서 서서히 유신반대투쟁에 골몰하게 되었다. 박형규, 이해학, 허병섭 같은 선배들도 존경하며 따랐다. 나중에 서울제일교회나 동월교회에도 동참하면서 자주 하월곡동을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나도 어느새 유신헌법철폐를 외치다가 신학교 3학년 때 체포되어서 감옥 신세를 지게 되었다. 1977년 고난주간 중인 4월 7일에 ‘고난선언문’을 발표하고 잡혀가서 1979년 7월 19일 제헌절까지 감옥살이를 하다가 가석방으로 출소하였다.

1977년에 마침 공동번역 성경이 출간되어서 감옥에서 내내 탐독하였고 성경원어인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을 비교하면서 공부하였다. 불트만의 공관복음서전승사라는 책도 여러 차례 정독하였다. 또 한 편으로 폴 스위지와 같은 네오맑시스트들의 책도 함께 읽으면서 교회와 함께 조국의 민주화를 이루는 꿈을 꾸었다. 수감 생활 중에 박석운이라는 걸출한 선배를 만나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내가 서남동 교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감옥에서 나온 이후였다.

1979년 가을과 1980년 봄 사이에 나는 서대문에 위치한 선교교육원에 등록하여 다녔다. 이 때 백낙청, 이문영, 안병직 교수 등 많은 유명한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이 학교에서 서남동 선생님은 원장으로 재직하고 계셨다.

당시에는 ‘서울의 봄’이라고 해서 박정희가 암살되고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이어서 12.12사태가 발생하고 전두환 반대 데모가 서울역 광장에서 대규모로 열리는 등 정신 없는 시국상황에서 교육원에서도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광주항쟁이 벌어졌고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였다.

그 바람에 선교교육원에서 공부하던 시절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활동무대를 현장으로 옮겨서 군사정권을 무너뜨리는 작업을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서남동 목사님과 조용히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언제 기회가 오면 인사를 드리고 나의 어머니와 외조부모님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었지만 죄송하게도 그러한 기회는 영영 오지 않았다.

그 후 서남동 선생님의 글들이 출간이 되었고 나에게는 안병무 선생님의 글들과 더불어 가장 흥미롭고 아름다운 독서거리가 되었다. 서남동 선생님께서 The Tribes of Yahweh(트라이브 오브 야훼)라는 책도 소개한 적이 있어서 그 놈의 두꺼운 책을 영문으로 읽어본다고 끙끙 대기도 하였다.

▲ 오른쪽부터 안병무, 서남동, 문동환, 이문영 교수. ⓒ죽재 서남동 목사 100주년 기념사업회

그 후 어느 해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박재순 선배가 나를 한국신학연구소로 불러서 민중신학을 공부하자고 제안하였다. 안병무와 서남동을 이을 제2세대 민중신학의 작업을 하자는 취지였다. 그래서 서남동, 안병무 두 분 선생님을 모시고 박재순 선배랑 나랑 네 명이 매주 한 번씩 만나서 정기 세미나를 가졌다. 말이 세미나였지 나는 두 분 선생님과 한 분 선배가 벌이는 대화를 주로 듣는 편이었다.

당시 세미나에서 들은 토론의 내용이 또렷이 기억난다. 죽재 선생님은 홍길동전 같은 민중이야기나 불교의 미륵신앙 같은 한국의 전통이 담긴 이야기를 바탕으로 신학을 펼쳤다. 심원 안병무 선생님은 신약성서 이야기를 주로 했는데 두 분의 논쟁이 격해질라치면 매번 심원이 논쟁을 중단시키곤 했던 기억이다.

심원은 지금 상황에서 우리끼리 논쟁하는 것은 유익하지 못하니 나중으로 미루자고 제안하였다. 이 때 나는 앞으로 구약성서를 가지고 민중신학을 전개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이처럼 재미있게 연속된 대화들이 무엇 때문에 중단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기간에도 나는 죽재 선생님께 나의 사적인 가족 내력을 말씀 드리지 못했고 선생님도 개인사에 대해서 묻지 않으셨다.

언젠가 교육원에 다닐 때 인사를 드리려고 원장실을 두드린 적이 있다. 노크를 해도 아무 응답이 없었다. 기척이 없길래 원장님께서 부재 중인 줄 알고 돌아섰다. 그런데 창문 틈으로 원장실이 엿보였는데 죽재 선생님은 책상에 엎드려서 몹시 앓고 계셨다.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엿보면서 선생님에게 지병이 있는 줄 짐작하게 되었다. 나중에 죽재 선생님이 소천하신 후에 오래 동안 무서운 병을 앓고 계셨음을 들어서 알게 되었다. 그의 민중신학 곳곳에 삶의 고통이 깊숙이 스며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1983년 경에 나는 농촌목회를 시작하였다. 죽재의 <민중신학의 탐구>란 책을 농촌목회 현장에서 탐독했던 것 같다. 그의 책을 읽고 나는 민중신학의 목회적 적용이 가능한가를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울산으로 가서 노동자교회를 시작하면서 심원과 죽재의 민중신학을 교회현장에 적용하는 실천에 도전하였다.

그 이후에 벌어진 개인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죽재를 추념하는 문집에서 사족이 될 것이다. 서남동 기억은 이처럼 짧다. 그러나 반드시 말해 두고 필을 내려야 할 것은 죽재의 신학이 지금도 나의 신학적 여정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나를 이끌고 있다는 고백이다. 죽재는 나의 성서연구와 목회의 삶 속에서 부활하였다.

이영재  rheeyjae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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