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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 숭배(출애굽기 32:1-6)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렸다
이성훈 | 승인 2018.04.15 21:52

오늘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금송아지 사건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상 숭배에 대한 대표적인 이야기로 설교 시간에 많이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상 숭배에 대해서 금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지금도 보수적인 교회들에서는 불교는 불상을 섬기는 잘못된 종교라면서 불상을 파손한다던가 불교는 우상 숭배 종교라며 손가락질하기도 합니다. 타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이 시대에 우상 숭배가 어떠한 형태를 갖춘 물질에 대한 신앙으로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해서 오늘 함께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먼저 오늘 말씀의 기본적인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애굽에서 고통에 차서 울부짖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를 떠돌게 되었기는 합니다만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애굽의 노예로 고통스러워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런 존재가 되었을 때에 그들은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먼저 그들의 모습을 생각해봅시다.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 산 위로 올라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만이 산 위로 올라가도록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시내산 위에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성막에 대한 법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법을 듣고 배웁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산 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절부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을 광야로 이끌어온 모세가 산에 올라가더니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죽었으리라 판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가지 결심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에서 여기까지 인도했다면 이제는 우리를 인도할 새로운 신을 찾자” 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를 직역해보자면 ‘우리들 앞에서 걸어갈 신’을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이들이 ‘신’을 말할 때에 히브리어 ‘엘로힘’을 사용하고 있지만, 실상 이들은 하나님의 신상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동사는 완료형과 미완료형으로 구분됩니다. 쉽게 말해서 완료형은 이미 행해졌음을 의미하고 미완료형은 아직 행해지지 않은 일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는 미완료형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자신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했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아닌, 시내산 이후의 여정에서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입니다. 그렇기에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단순하게 우상을 만들어 섬겼다는 의미만을 갖지 않습니다. 더 큰 의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 금송아지 숭배, 니콜라스 푸생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요구에 따라 아론은 금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어내는데, 이때 아론이 4절에서 하는 말은 이스라엘의 요구와 다릅니다.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이것도 히브리어를 직역하자면 ‘애굽 땅에서 너를 데려온 신’입니다. 아론의 말은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아론은 새로운 신을 요구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신상을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론의 차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찾고 있다면 아론은 하나님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우상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훗날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과 연결되게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론 둘 다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의 잘못된 행동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잘못은 두 가지 형태의 우상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우리가 우상이라는 개념을 ‘물질로 만든 형상을 갖춘 신’이라고만 정의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딱히 우상을 찾았던 것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요구한 것은 새로운 신이었습니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하나님 말고 앞으로 자신들을 이끌어줄 새로운 신을 요구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요구는 앞으로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인 모습들의 전초전일 수도 있습니다. 그 시점에 맞는, 요즘 말로 자신들의 니즈(needs)에 맞는 신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가나안 정착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게 됩니다. 바알은 비를 내려주는 신이고 아세라는 풍요의 신, 어떻게 말하자면, 열매를 맺는 신입니다. 그렇기에 바알과 아세라는 함께 존재하면서 비를 내려주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당연한 신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를 시작하면서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게 됩니다. 농경 사회를 이룬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이상 예전에 믿었던 신, 광야의 신은 필요가 없었기에 이제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이런 바알과 하나님의 대결이 열왕기상 18장에 나옵니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바알은 우상일 뿐이고 하나님이야말로 진정한 신이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바알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타납니다.

바알 선지자들의 제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엘리야는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쌓고 거기에 물을 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물에 젖은 제단에 불을 내리셔서 물은 말려버리고 제물을 태우십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대신하십니다. “바알이 아무리 많은 비를 내리려고 해봐라. 내가 다 말려버릴 테니까.” 비를 통해 풍요를 얻으려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시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통해 비가 내리게 됩니다.

지금 시내산 아래에서 새로운 신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역시도, 진정한 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고 새로운 신, 앞으로 새로운 삶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신을 요구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런 요구는 그들의 신분적 상태가 변함에 따라서, 또한 그들의 상황이 변함에 따라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자신들을 지켜주셨던 하나님이 지금 당장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태나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하나님을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들을 종종 봅니다. 자신의 상황이 상당히 안좋을 때에는 헌금도 열심히 하고 새벽기도도 빠짐없이 나오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오히려 헌금도 안하고 새벽기도도 안 나오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뭔가 상황이 좋아지면 더 헌금 생활도 열심히 할 듯 하지만, 보통은 반대인 경우를 많이 봅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따르지만, 상황이 변화됨에 따라 상태가 변화됨에 따라 이제는 다시 세상이라는 우상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그때그때 변한다는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필요할 때에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변하시지 않지만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는 갈대처럼 변해갑니다.

아론의 우상

다음으로 아론의 이야기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아론은 분명 자신들을 이끌어주신, 애굽으로부터 이끌어주신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 하나님의 신상을 만듭니다. 그가 왜 송아지 형상으로 하나님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습니다만, 오늘 보고자 하는 점은 결국 그는 어떠한 형태로 하나님을 만들어냈다는 점입니다.

아론은 분명 형태를 갖춘 신,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그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보이지 않음’이라는 점에서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데에 결국 실패하고 ‘보이는 하나님’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결국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우리는 이 말씀을 분명히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 믿음, 보지 않고 믿는 믿음 역시도 아론과 마찬가지로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님들은 대체재를 만들어냅니다. 가장 간단하게 생각해보자면, 모든 교회 강대상에 걸려 있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교회에 걸린 십자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상징이 되었고 때로 우리는 그 십자가에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 마냥 착각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십자가를 손에 쥐고 기도하면 기도가 잘 된다고 생각한다거나, 십자가로 만들어진 장신구를 하고 있으면 위험이 피해갈 것처럼 생각하는 점들은 십자가를 우상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우상 숭배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했으면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 중 하나인데, 많은 성도님들은 목회자를 하나님의 대체재로 생각합니다. 목회자가 하나님과 성도님들 사이의 중개자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가톨릭에서부터 출발한 생각입니다만, 목회자는 성도님들과 하나님의 중개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개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안계십니다. 목회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을 위해서 구별된 존재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많은 교회들에서는 목회자를 하나님의 대체재로 생각하며 하나님이 아닌 목회자를 섬기기도 합니다. 하나님에게 잘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목회자에게 잘 하는 것은 눈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주시는 지는 잘 보이지 않지만, 목회자가 나에게 해 주는 것은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목회자를 하나님 대신으로 삼습니다.

목회자는 결코 하나님 대신이 될 수 없습니다. 목회자에게 잘하는 일, 저 역시도 한 명의 목회자이기 때문에 잘 해주시면 감사하고 좋습니다만, 목회자에게 잘하면 복 받는다는 생각은 전혀 잘못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잘하시면 복 받으십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하지 않으면서 목회자에게만 잘하는 것은 전혀 복 받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최근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에 대한 성폭행 문제가 언론에 나오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런 일들에 대해 이미 우리는 너무도 많이 듣고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욕하는 사람들로부터 소위 ‘빤스 목사’라고 불리는 어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빤스 내려라 해서 그대로 하면 내 성도요, 거절하면 내 성도 아니다.” 물론 그 분은 이 말을 설교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해명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좋은 설교말씀이었다고 해도, 이런 말은 지금의 저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성도님들이 자신을 하나님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이고, 이를 목사 자신도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재록 목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람들의 증언도 동일합니다. “우리에게 그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전부 우상 숭배를 하고 있는 것이고, 이를 즐기는 목회자는 스스로가 우상이 되어버린, 거칠게 말하자면 사이비 교주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출애굽기의 이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신앙을 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내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골라가면서 섬기고 있지는 않은지, 더 좋은 신을 찾아 헤매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보다 더 좋은 신은 없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예전에는 느껴졌지만 이제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 자리에 계십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고 우리가 보지 못할 뿐입니다. 혹시 나 역시도 하나님을 대신할 무엇인가를 찾고 있지는 않았는지, 혹은 그런 것을 붙들고 신앙생활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잘못된 것을 붙들고 있었다면 말씀을 더 읽고, 더욱 깨달아 감으로 그것들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기독교가 점점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벗어나 우상숭배로 빠지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 만큼이나, 아론 만큼이나 마음이 흔들리기 쉬운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러분의 신앙이 굳게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점들은 비단 우리나라 교회들만의 상황은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교회들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여러분들께서 먼저 굳은 신앙으로 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온 땅에 참된 교회를 세워 가시는, 참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 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라고, 그리 되길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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