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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득 채우려 하지 않는다” - 不欲盈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15
이병일 | 승인 2018.04.16 22:50

“옛날에 훌륭하다는 선비(道人)는 미묘하고 현통하며, 깊어서 가히 알 수 없다. 대저 알 수 없으므로 그 용모를 억지로 말하자면, 겨울에 내를 건너는 것처럼 머뭇거리는구나. 사방의 주위를 꺼리는 것처럼 망설이는구나. 손님처럼 삼가는구나(의젓하구나). 얼음이 녹으려는 것처럼 흩어지는구나. 통나무처럼 투박하구나. 골짜기처럼 비어있구나. 흐린 물처럼 섞여있구나. 누가 능히 혼탁함으로써 그것을 잠잠하게 하여 서서히 맑게 할 수 있느냐. 누가 감히 편안함으로써 그것을 오래 움직여 서서히 나게 할 수 있느냐. 이 도를 유지하는 사람은 가득 채우려 하지 않는다. 대저 채우려하지 않으므로 능히 낡은 것을 새로이 이루지 않는다.”
- 노자, 『도덕경』, 15장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豫焉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容(客), 渙兮若氷之將釋, 敦兮其若樸, 曠兮其若谷, 混兮其若濁,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動之徐生, 保此道者, 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敝而不成)

도를 따르는 사람의 모습은 법과 규범에 대한 지식으로 옳고 그름을 단정하는 권위적 태도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의 실상을 선입관이 없이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예와 법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보면, 인위적인 도덕과 법이 가해지기 전에는 세상이 천하고 혼탁하고 무질서한 상태였습니다. 섣불리 옳고 그름을 단정하는 태도를 버리고 자연을 관찰하는 태도는 마치 섞여서 혼탁한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런 혼탁한 태도를 지킬 때 만물의 실상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옛 선비(도를 따라 사는 사람)의 태도는 모두가 천하다고 여기는 자연의 자연성, 즉 예법을 익히기 전의 타고난 성정(性情)을 선입관이 없이 이해하는 자세입니다. 덮어두고 새로 채우지 않는 태도는 귀천을 따지는 규범적 판단태도를 그친 자세입니다. 노자는 결국 인간이 지켜야 할 계율보다 먼저 인간의 회복을 생각했고 그래서 도의 회복을, 도에 하나 되기를 강조했습니다. 법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고 인간보다 중요한 것은 도입니다.

ⓒGetty Image

도를 따르는 사람의 탁월함은 더러운 가운데서도 그 더러움을 맑혀 간다는 점에 있습니다. 역사 속의 모든 위대한 사람들은 진흙 속에서 꽃을 피워낸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꽃은 죽음과 증오와 전쟁의 땅에서 생명과 사랑과 평화의 꽃으로 피어납니다. 스스로 탁류처럼 되어 탁류 속에 거하지만 끝내 탁류가 되지 않고 맑은 샘이 되게 하는 것이나, 끊임없이 인내하면서 편안함을 가지고 굳고 완고한 세대를 변화시켜 서서히 생기를 불어 넣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스스로 탁류 속에 들어가 탁류를 맑히고자 하는 맑은 마음의 힘입니다.

그래, 길이 있다
굴참나무 울창한 숲을 안으로 가르며,
전화줄처럼 명확하고도 애매하게,
길이 나 있다
아침을 지나 아무도 없는 숲 안에서
나는 외롭고, 지나치게, 무섭다
길 저쪽 깊은 숲속으로 곧장 난
길 저쪽 어쩌면 길 저 끝에
무엇인가가 있는 듯 느껴진다
굴참나무 잎들이 쌓인 숲 저 안,
어둠의 폭풍이 소용돌이치는 곳
- 이하석의 시 “그래, 길이 있다”

강남향린교회는 자본과 권력에 의하여 결탁한 오랜 관행과 적폐가 여전히 남아있는 토지강제수용, 재개발로 인한 건물과 토지의 강제수용에 의해 성전을 침탈당했습니다. 가득 채우려 하지 않는 강남향린교회는 재개발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확보기 위한 활동이 아닌, 잘못된 법과 제도와 바꾸는 활동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예고 없는 강제집행으로 재개발조합에게 교회를 빼앗긴 것을 강남향린교회와 향린공동체 모든 교우들은 더 열심히 고난 받는 이들과 더욱 연대하라는 예수님의 채찍이라고 생각하며 감수하겠습니다.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이 시련을 능히 극복하고 하나 되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사명을 받들겠습니다.

자본과 권력의 이름으로 서민들의 삶의 터전을 강제로 수용하는 토지강제수용과 이미 사문화된 법과 원칙이라는 미명으로 예고 없이 민중들의 교회와 집을 빼앗는 강제집행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누구나 자기의 재산권과 주거권을 정당하게 보장받는 날이 올 때까지 희망과 연대의 끈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불의에 대한 저항은 우리 믿음의 핵심이요, 정의를 바로 세움은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소명임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나서겠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중에 “그 열둘”을 불러 세움으로써 새로운 이스라엘을 결성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정치권력과 종교제도가 소수의 지배자들만을 위한 것으로 전락하고 사회의 자율과 자정 기능이 파산한 그 사탄적 혼란의 나라에서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파산된 사회에서 버림받고, 거덜난 종교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의하여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열둘을 세운 목적은 “그들이 그와 함께 있고, 그들을 보내어 선포하게 하고,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가지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열둘과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 관계에 놓고, 그들에게 예수님과 똑같은 능력과 사명을 부여합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목적인데, “함께 있음”과 보냄 받음“입니다. 함께 있음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보냄 받음으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 공동체의 모습과 사명입니다.
예수님이 그 산 위에 올라가서 그가 원하는 사람들을 불렀을 때에, 나아가서 세움을 받은 사람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배우고, 보냄을 받은 사람들처럼 삶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려는 애씀이 필요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뜻을 잘 모를 수도 있고, 오해할 수도 있고, 나의 욕망을 위해 예수님을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낙심하지는 맙시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고 기꺼이 그의 제자가 된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 속에 당신의 통치를 실현하실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그 산에 올라서 열둘을 부르신 이야기와 그들의 전체적인 활동에서 우리는 위로와 용기를 얻기도 하고, 강한 사명감과 제자도를 배우기도 합니다. 또한 공동체로 모인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이 활동하신 일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닮아가고 우리의 삶의 현장인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은 함께 거하고 뜻을 펼쳐갈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 (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그 산 위에 올라가서”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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