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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죽어도 위태하지 않다” - 沒身不殆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16
이병일 | 승인 2018.04.23 23:55
“비움에 이르는데 극진하게 하고, 고요함을 지키는데 도탑게 하면, 만물은 함께 자라지만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나는 본다. 대저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지만 각기 그 근본으로 돌아간다.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고요하다(靜)고 말하고, 고요하다는 것은 명(命)에 돌아간다고 말하고, 명에 돌아간다는 것은 영원(항상 그럼)이라 말하고, 영원을 아는 것은 밝음이라 말한다. 영원을 모르면 어그러져 해치는 일을 하게 되고, 영원을 알면 누긋하게 된다. 누긋하면 곧 공공이 되고, 공이 되면 곧 왕이 되고, 왕이 되면 곧 천이 되고, 천이 되면 곧 도가 된다. 도는 곧 장구함이니 몸이 죽어도 위태하지 않다.”
- 노자, 『도덕경』, 16장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其復. 夫物芸芸(藝藝),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靜)曰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노자는 객관적 순환의 질서를 명(命)이라고 합니다. 命은 만물이 따르도록 자연의 도가 만물에 부여한 명령과 같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그 명령을 경험하고 감지할 수 있습니다. 도가 만든 자연적 순환을 어길 때, 피로와 고통이 옵니다. 만물은 모두 이 한계를 지키며 순환하므로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요함이라고 합니다. “젊음이 다하면 노쇠와 죽음이 일어난다. 사람의 생명도 그 실상은 곧 생사이니 생사는 자연의 명령이다. 살게 하고 죽게 하는 것은 그 누가 시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는 저절로 움직이며 의도가 없으니, 죽음과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명령이다.”(『열자』, 역명편>

도가 만물에게 부여한 질서를 지키는 것이 늘 오래 가는 길임을 알 때, 밝음이라고 합니다. 밝음은 만물이 가지고 있는 도의 명령을 이해하여 지성을 회복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성이 밝음을 회복할 때, 자연의 순환을 질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연적 한계를 무시하는 다스림은 흉한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자연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자세는 만물에 대해 공평할 수 있습니다. 만물이 모두 각자 고유한 질서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이것이 왕이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하늘을 따르지만 하늘은 도의 길을 따릅니다. 노자는 유가나 법가가 존중하는 하늘 위에 다시 만물의 질서를 의미하는 도를 최상의 개념으로 놓고 있습니다.

자연의 순환과 질서를 깨닫기 위해서 노자는 비움과 고요함에 이르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자연의 순환과 질서는 만물이 자라서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비움과 고요함은 모든 수련의 바탕이며, 몸과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하는 것 자체가 자연과 도를 깨치는 방편입니다.

그런데 이미 자연을 떠나서 너무 많이 어그러진 인간의 삶 속에서 그 과정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도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이 많지 않은 것도 이미 인간의 삶이 자연의 순환과 질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삶과 가까이에서 함께 한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습이 필요합니다.

길을 걷다 보면 길이 되어 버린
다른 사람이 걸은 길이
길이 되어 걷게 되고

길을 걷다 보면 길이 아닌
내가 걸어 온 길이
다른 사람의 길이 된다

그의 발자국이 나의 길이고
나의 발자국이 그의 길이듯
너와 나는 길을 개척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행해야 할 운명이다
내심 작심하고 한 발만 딛어도
길이 되는 그 길은
도처에 산재해 있다
- 공석진의 시 “길을 걷다 보면”

우리말에 “미쳤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는 의미와 “어떤 경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둘은 서로 다른 뜻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리 다르지도 않습니다.

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질서와 순환에 맞게 사는 삶을 위해서는 먼저 어그러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어그러진 삶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에서 미쳤다는 말은 정상적이지 않은, 이미 정해진 예법과 규칙을 벗어나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적으로 종종 광인(狂人)으로 취급된 사람들이나 예수님의 삶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몸과 입으로 행한 가르침은 당시의 지배자들의 권위를 뒤흔들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악한 영에 의해서 조종당하고 있다고 모함합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본주의 체제를 마치 인간 사회의 궁극적인 모습으로 세뇌당한 사람들에게 자연의 순환과 질서를 추구하는 삶은 미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적 사고와 삶이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직접 보면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미 자연의 순환과 질서를 벗어난 인간의 삶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비움과 고요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즐거움의 바탕으로 깨치는 사람들이 더 많아 질 때에 우리 사회는 몸이 죽어도 위태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씌웠던 “미쳤다”는 말은 ‘밖에[ἐξ] 서 있다[ίστημι], 밖에서 일어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경계선 밖에서 그 경계를 만드는 질서와 제도에 대하여 비판하고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비난했던 말을 그대로 받아서 그들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분열과 힘의 논리입니다. 함께 살아야 하는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평화롭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싸움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 그들의 본질입니다. 분열을 조장하고 싸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바로 사탄이요, 바알세불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리와 지식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음해하고 거룩한 영의 활동을 모독하는 것, 즉 예수님 안에서 일하는 거룩한 영을 더러운 영과 혼동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그 죄는 선을 악으로 바꾸고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사탄의 파괴적 행위와 바꾸는 것이며, 생명과 평화를 위한 활동을 불법으로 몰아가서 탄압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활동, 즉 생명과 평화를 위한 일을 악마적인 것이라고 왜곡하는 사람의 죄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활동과 정체를 순간적으로 오해하는 자들은 용서받은 수 있지만, 자기들의 자리와 지식을 이용하여 진정한 인간 해방의 거룩한 사역을 추악한 그 어떤 것으로 말하는 자들은 우리의 역사와 후손들에게 결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미친 예수와 악한 영”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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