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에게 한나 아렌트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나 아렌트 학회 전직 회장이었던 이은선 교수가 학회 동료교수로부터 『한나 아렌트의 생각』(서울: 한길사, 2017)이란 책자를 선물 받아 내게 읽도록 권했다. 평소 아렌트의 생각에 낯설지는 않았으나 실상 주저들을 읽을 기회는 없었다. 그녀의 주저를 접하기 전에 개론서라도 읽을 생각에 본 책을 손에 잡았다.

두텁지 않게 쓰인 이 책은 단숨에 읽혀질 만큼 쉽게 쓰였으나 사유할 주제를 많이 제시했다. 15장으로 구성된 본 책 곳곳에서 저자는 아렌트 철학을 대한민국의 현실과 접목시키고자 노력한 것이다. 철학 내용의 단순 전달을 넘어 그녀의 사유가 우리 현실과 어찌 만날 수 있는 지를 잘 설명했다.

마지막 장의 제목도 ‘아렌트는 우리를 사유하게 한다’로 되어있다. 아렌트의 주저 한권을 제대로 읽지 못했음에도 분석하여 쉽게 풀어준 저자의 노고 덕분에 읽은 소감을 나눌 용기가 생겼다. 본고에서 필자는 전체 내용을 소개하기보다 이 책이 제공하는 사유거리 몇 가지를 나름대로 풀어 정리할 생각이다. 이 책을 소개해준 이은선 교수도 조만간 아렌트의 주저 『전체주의 기원』을 풀어 길잡이 책을 만들어 준다하니 반갑게 기다려 본다.

저자는 촛불 정국을 목도하며 위 책을 썼다. 한나 아렌트의 시각에서 당시 대한민국이 너무도 잘 독해되었다고 했다. 널리 회자되던 아렌트의 말, ‘악의 평범성’을 국정농단의 주범들 속에서 보았던 까닭이다. 물론 전체주의화된 이 땅의 민낯 역시 아렌트가 잘 드러내 주었을 것이다. 많은 정치철학자들이 아렌트 사상을 좋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아렌트의 종교성, 곧 신학적 면모 역시 크게 관심할 주제이다. 그녀의 박사논문이 어거스틴의 ‘사랑’을 주제로 했고 ‘용서’와 ‘약속’ 역시 정치철학에 있어 핵심 개념이었던 까닭이다. 하이데거에게서 배움을 시작했으나 유신론적 철학자 칼 야스퍼스 제자된 것 그리고 유대인이었으나 유대주의를 비판한 것 역시 신학적 감수성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무자비하고 폭압적인 전체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아름다운 정치’를 상상한 것도 신학적 상상력과 유관하다. ‘정치’ 자체를 아름다운 것으로 여겼었다하니 놀라울 뿐이다.

이런 연유로 언급해야 될 더 많은 내용과 주제가 있을 것이나 필자는 본 책에서 종교적 관점들을 내포한 몇 주제를 정해 이 글의 내용을 채울 것이다. 첫째는 노동, 작업 그리고 행위 등 세 차원에서 인간을 새롭게 정의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는 노동하는 인간(Homo farber)의 다차원성이 갖는 정치, 종교적 의미가 중요하다.

둘째는 ‘악의 평범성’과 ‘말의 무능함에 대해서이다. 말의 무능함을 통해 일상적 존재들이 악을 범한다고 했다. 이는 기독교의 경우 말이 곧 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새삼 각인시킨다. 셋째는 유대인이면서 유대주의를 비판한 아렌트의 시각에서 민족주의의 의미와 한계를 반추해 볼 것이다. 넷째로는 전체주의를 비판한 아렌트의 시각을 갖고서 이 땅에 스며든 파시즘의 그림자들을 적시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론 정치를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근거로서 칸트에게서 차용한 ’공통감각‘(sensus communis)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것이다.

최근 호모 데우스(Homo Deus)란 말이 생길 정도로 목하(目下) 인간이해 역시 달라지곤 있으나 본래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였다.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철학자(헤겔, 마르크스)들은 노동을 인간 본질로 여겼고 신학자들조차 노동 속에서 신의 형상(Imago Dei)을 찾았었다. 이에 반해 아렌트는 노동으로부터 ‘작업’과 ‘행위’를 분리시켜 이 셋을 갖고서 인간을 정의 했다. 물론 앞선 철학과 신학의 경우에도 ‘작업’과 ‘행위’의 측면이 없지 않았겠으나 아렌트는 이를 분리시켰고 달리 의미화시켰다.

우선 노동은 생존을 위한 활동을 총칭한다. 자연을 통해 생산물을 얻는 수단을 일컫는말이다. 한마디로 먹고 살기 위한 몸짓들이다. 이점에서 수 만 가지 직업들도 노동일 수밖에 없다. 노동에서 소비가 비롯하며 즐거움을 발생시키나 그 반복됨으로 인간은 지루해지고 권태에 직면한다.

여기서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역설적 모순이 생겨났다. 주인으로서의 노동이 노예 노동으로 변질되었고 이 변질이 인간의 일상사가 되고만 것이다. 살기 위한 노동이길 그치고 먹기 위한 노동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말이다. 성서가 말한 ‘저주받은 노동’이 이에 적합한 말이 되었다.

이로부터 아렌트는 ‘작업’(work)을 생각한다. 앞선 노동과 다른 점은 이것이 삶에 우선성(긴급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작업 없이도 인간 삶이 당장 소멸되는 것이 아닌 탓이다. 그 끝이 있기에 지루함도 없(적)다. 나무를 다듬어 집을 만들고 광물을 채굴하여 반지를 만드는 일이 ‘작업’에 속한다. 예술을 떠올려도 좋겠다.

본래 아렌트가 ‘노동’과 ‘작업’을 분리시킨 것은 생태적 위기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나무와 광석은 사용 대상이지 소비대상이 아니란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일치로 인해 소비와 사용의 경계가 실종되고 말았다. 현대사회가 소비(자)의 시대가 된 것도 여기서 비롯한다. 사용대상과 소비대상의 구별을 위해서 ‘작업’은 반듯이 노동과 구별되어야 옳다.

마지막으로 ‘행위’는 정치적 차원을 지닌다. 이런 ‘행위’는 생존요구나 생활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 개성을 지닌 존재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감에 있어 요청된 것이 ‘행위’ 곧 정치였다. 이런 ‘행위’는 인간의 복수성, 다원성에 근거한다. 같은 것을 보고도 해석을 달리하는 것이 인간인 까닭이다. 공동체 속에서 이견을 조정하는 작업이 반드시 요구된다. 이런 ‘행위’ 곧 정치가 경제와 다른 것은 후자가 사람들 간의 차이와 다름을 배제, 혹은 최소화 시킨 채로 공통적인 것-경제적 결과-만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는 다름을 최대화시킨다. 개성과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공통의 장을 만드는 일, 이것이 바로 인간을 규정하는 ‘행위’, 즉 정치이다. 후술하겠으나 아렌트가 말과 공통감각을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행위’에 방점을 둔 정치철학자, 아렌트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는 성 어거스틴이었고 그가 말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개념이었다.

아렌트는 여기서 탄생성(natality)이란 말을 채굴하였다. 인간은 누구든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고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자신의 이전 세계와 변별된 것은 인간존재를 사멸성으로 규정한 후자와 달리 언제나 ‘한 아기가 새롭게 태어났다’(A Child is new born)는 탄생성에 방점을 찍었다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아렌트는 ‘행위’, 곧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 인간은 거듭 새로움을 창조할 수 있는 존재라 여겼다. 그가 정치를 아름답다 여긴 것도 이런 이유라 할 것이다. 이렇듯 먹고사는 문제를 비롯하여 창작할 수 있고 나아가 다름을 존중하면서도 공통세계를 꾸려 나갈 책임은 오직 인간의 몫이다. 이를 행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란 말이다. ‘무엇을 알고 행하며 희망할 수 있는가?’를 물었던 칸트적 계몽주의 인간이해와 비견될 수 있는 부분이다.

두 번째 주제로서 악의 평범성과 말의 무능함의 연관성을 성찰할 지면이다. 본 주제는 앞서 말한 ‘행위’ 곧 정치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아렌트에게 있어 말과 ‘행위’는 애시 당초 분리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성서가 보여주듯 말은 곧 행위였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일어나 걸으라 하니 사람들이 걸었다는 것이 성서의 증언이다. 그렇기에 행위를 일으키는 말이 하느님 말씀이자 강단의 설교여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행위를 분리시킨 목하 기독교는 말을 타락시킨 종교가 되었다. 행위 없는 (오직)믿음이란 종교개혁의 칭의론은 말의 종교인 기독교에 있어 가당치 않다. ‘믿음’을 이렇듯 호도한 개신교 신학은 악의 평범성을 자체 속에 잉태할 수밖에 없다. 말의 무능, 타락 탓에 ‘행위’를 생기(生起)치 못했고 새로운 세상(탄생성)을 포기했던 까닭이다.

‘행위’를 중시하는 아렌트에게 있어서 ‘악의 평범성’은 이처럼 말의 무능과 연계되며 ‘탄생성’과 적대한다. 교회 내에서 통용되는 수많은 말들이 탄생성과 무관해져 버렸다. 생각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달리 만드는 힘을 잃었던 탓이다. 거듭 말하나 아렌트에게 있어서 말 자체가 행위였다.

행위를 낳지 못하는 말(언어)들은 종교적 언어일지라도 상투어가 될 뿐이다. 이런 상투어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종교적 지식(말)이 독단이 되어 세상을 옳게 대면 못하면 그와 맞설 힘을 잃고 만다. 세상과 싸우지 못하는 종교언어와 지식이 거듭 악의 평범성을 부추길 수 있다.

촛불혁명의 시대에 광장의 일부가 된 태극기 부대 속 다수 인파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이 바로 이를 실증한다. 악의 평범성을 조장하는 기독교의 민낯을 태극기 부대 속에서 여실히 보았다. 유대인 학살에 동조했던 독일 기독교와 함께 세월호 유족들을 거리로 내친 이 땅의 대형교회들 또한 말의 힘을 잃고 사유(이해)를 포기한 전체주의적 모습들, 즉 평범한 악의 희생양들이라 말해도 좋겠다.

다음 주제는 아렌트의 유대주의 비판에 관한 것이다. 그 스스로 유대인이었음에도 그녀는 세계 속에서 게토화된 유대인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다. 바울이 자기 동족 유대인을 사랑하였음에도 그들의 특수성을 비판했던 것과 유사하다. 물론 아렌트는 홀로코스트를 야기한 독일 전체주의를 혹독하게 정죄했다. 자기 동족 600만 명을 희생시킨 야만적 파시즘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유대인 스스로 져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강변했다. 이 일로 아렌트는 유대인 동족으로부터 왕따를 당해야만 했다.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게토화된 공간을 만든 유대인들 역시 자신들 내부에서 전체주의적 성향을 들어냈던 까닭이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중산층에 속할 만큼 부를 획득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유럽 사회 내 공적 일에는 무관심했다. 홀로코스트 이면에 공적책임을 방기한 유대인 책임이 결코 작지 않았던 것이다. 이점에서 아렌트는 게토화된 자신들 종교영역에 함몰된 채로 개인으로만 존재했던 유대인의 과오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을 쓴 것도 이런 두 모습을 함께 보았기에 가능했다.

아렌트는 전후 유대인들이 시오니즘에 근거하여 팔레스타인에 자신들 독자 국가를 세우는 일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는 것보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공동정부 세우는 것을 더욱 중히 여겼다. 당시 세상 언론도 이에 동조했다. 타임지 표지에 ‘정의의 두 차원들’(two Standards of Justice)을 제목삼아 이를 비판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믿는 성서(신앙)적 정의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기존 주거지라는 실정법 사이에서 충돌이 생길 때 무엇을 우선시 할 것인가를 물었다. 후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 많았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팔레스타인을 이스라엘 수도로 공포한 것 역시 큰 반발을 일으켰다. 필자가 유대인 주제를 택한 것은 3.1 독립선언 발표 100주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 땅의 미래를 염려해서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민족주의는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사안이 되었다. 민족주의의 공과 화를 아는 탓이다. 3.1 독립선언이 봉건제 국가를 벗고 민주 공화제를 선포했듯이 통일을 민족주의 차원을 넘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3.1 선언 백 년이 되는 2019년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우리 역시 아렌트처럼 민족(주의)에 대한 아픈 성찰을 했으면 좋겠다.

다음으로 이 땅에 짙게 드리웠던 파시즘의 그림자를 아렌트의 시각에서 살펴 볼 일이다. 다행히도 제 3기 민주정권의 등장으로 그늘이 벗겨지곤 있으나 블랙리스트 파동에서 보았듯 우리 사회는 실상 전체주의의 위협에 처해 있었다. 『전체주의 기원』에서 아렌트는 테러와 이데올로기를 전체주의의 핵심 축으로 보았다. 이를 통해 백성들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려 했던 것이다. 국가와 백성을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만들어 버렸다. 개인의 외면은 물론 내면의 세계조차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 된 것이다.

지난 정권 시절 우리들 다수는 경제우선주의 이념에 휘둘리면서 자발적으로 사상검증을 했었다. 좌파적 생각은 모든 영역에서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 시대에 ‘설마’ 했으나 연극계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심지어 판사들조차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려 진 것을 보았다.

이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인간 개성(복수성)을 말살한 채 일체 자극에 동일한 반응을 요구받는 현실이다. 경제 환원주의가 그 핵심원인일 것이다. 경제를 우선하는 이데올로기 하에서 사람은 누구나 교환 가능한 부품이 되고 말았다. 비정규직을 강요받는 돈벌이 시장의 실상이 바로 그렇다. 여기서 인간성(개성)은 존재할 수 없다.

아렌트는 전체주의 하에서 인간성 말살 과정을 다음 세 단계로 설명하였다. 처음에는 인간의 법적 인격을, 이어서 그의 도덕적 인격을 마지막으로 개성자체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법 밖으로 내몰았고 자기 생존을 위해 이웃을 해하도록 했으며 그로써 급기야 고유한 인간 내면까지 망가트린다는 것이다.

얼마 전 까지 이 땅의 현실이 이와 같았다. 이 현실을 고치겠다고 나선 정부가 얼마나 잘 할지 두고 볼일이다. 아직도 인간성 말살과정이 지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말살은 인간의 자발성을 죽이는 것으로서 탄생성에 대한 살해라 할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는 명제에 대한 부정이겠다.

그러나 탄생성은 인간의 본질에 속하기에 어떤 이념(Ideology)도 이를 부정할 수 없다. 설령 이념이 현실을 억압하고 ‘없는 현실’(fake news)을 만들어 세상을 힘겹게 하겠으나 이에 저항하는 힘 역시 새로움을 낳는 인간의 능력에 달렸다. 그렇기에 아렌트는 시종일관 ‘탄생성’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 탄생성이 기독교인인 우리에게 신(神)의 창조성이자, 그리스도의 구원일 것이며 내주하는 성령의 역할이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주제는 정치를 아름답다고 말한 근거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앞서 봤듯이 의당 탄생성에 있다. 하지만 탄생성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답일 뿐이다. 인간 ‘행위’의 소통가능성이 정치에 있어 더없이 중요했다.

아렌트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본래 미학적 개념인 개별인간의 취미판단에 주목하여 이를 정치적으로 차용했다. 보편적 기준 없이도 뭇 의견과 판단이 소통되어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 생겨날 수 있는 까닭이다. 이런 판단을 가능케 하는 근거로서 아렌트는 공동체 감각이라고도 불리는 ‘공통감각’이란 개념에 주목하였다.

‘공통감각’은 보편적 이성과는 크게 다르다. 이것은 동일 공동체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유한 감각을 말한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한 공동기반 탓에 상이한 의견과 판단들이 소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공동체들마다 공통감각이 다를 수 있음을 전제한다. 다른 공동체와 나눌 수 없는 특정 공동체만의 감각이 있다고 했다. 전통을 중시하는 G. 가다머의 해석학적 원리, ‘전이해로서의 편견’이란 말이 떠올려진다.

여하튼 거듭 말하지만 공통감각은 개별성을 무시한 보편과는 많이 다르다. 이성이 추구하는 보편원리, 즉 보편으로의 환원을 결코 추동치 않기 때문이다. 개별성에 무게중심을 두면서도 소통 가능한 판단을 구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통감각이 원리나 이념이 아니라 ‘맥락’ 속에서 현실을 봤다는 점이다. 개별성을 중시하는 그 이상으로 특수한 현실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예측 불가능한 인간사(人間事)를 목도하며 상황의 고유성에 입각한 아렌트의 정치적 판단은 그래서 늘 논란거리가 되었다. 아렌트만큼 종잡을 수 없는 정치사상가가 없다고 했다. 그녀의 두 스승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사이의 간극이라 해도 좋겠다.

하지만 언제든 정치현실(현상)에 집중하면서 자기 길을 모색했기에 아무리 진보 이론이라도 이론이 앞세워질 경우 이를 거부했고, 개별성보다 전체가 우선시 될 때에도 그리하였다. 전자의 경우는 보수주의자로, 후자의 경우에는 진보주의자로 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렌트는 정치를 아름답다고 보았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차용한 ‘공통감각’에 대한 신뢰가 컸던 까닭이다. 개인의 탄생성과 인간 공동체 내의 ‘공유된 기반’에 대한 믿음이 전체주의를 넘어 아름다운 정치를 상상토록 한 것이다.

이상에서 아렌트의 주요 개념 중 필자에게 중히 생각된 종교적 차원들을 중심으로 다섯 주제를 택해 나름 감상문을 적어 보았다. 쉽게 쓰여 진 개론서 덕에 그리 어렵지 않게 읽고 정리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렌트를 배우며 드는 생각,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로 아렌트 철학 속에 기독교 신학의 흔적과 잔재가 너무도 많이 남겨졌다는 사실이며, 둘째 아렌트 철학으로 한국 사회를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이 둘의 발견이 향후 아렌트에 대한 공부를 촉발시킬 필연적 이유가 되었다. 신학이 없는 교회, 현실을 잃은 신학의 병폐를 고쳐줄 약이 바로 한나 아렌트 사상 속에 있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듯싶다.

이정배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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