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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무슨 색깔일까?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교회들
이이소 | 승인 2018.04.26 23:13

외국 나그네살이에서 돌아와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좌빨”이라는 말을 들을 때 마다 한숨과 탄식이 절로 나왔다. 지구상에 있는 나라 중에 색깔로 사람을 공격하는 나라가 거의 다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주로 순수 복음을 강조하는 교파에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믿으며 하나님의 대변인처럼 행세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색깔에 대하여 묻고 싶은 충동이 종종 일어났다.

반공과 친미가 득세하는 이상한 나라의 교회

역사적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영구집권을 꾀하고자 했던 독재자들이 정적을 때려잡기 위해서 사용했던 “좌빨”이라는 말을 아직도 무기로 휘두르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들이 “색깔논쟁”하며 사람 사냥을 할 때 마다 내세우는 명분은 “애국애족”, “민주주의 수호”, “한반도의 안전과 평화”이다. 그들의 정치적 구호는 그럴 듯하지만 한국 역사 속에서 그 말로 정적을 제거하며 독재자로 살았던 자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곧이듣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으며 국제 사회가 이념논쟁을 벗어나서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는 사실을 외교와 경제활동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음을 직시하기 때문이다.

ⓒ홍성담

그런데 한국사회는 아직도 독재자의 언어였던 “좌빨”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하며 자기들과 다른 정치와 경제 이념을 가진 사람들을 마구 매도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 중에 크리스천이 많다는 사실에 억장이 무너진다. 하나님과 복음을 독점하고 있는 그들은 한 결 같이 기독교를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로 이해하고 있으며 “반공신학과 신앙”과 “친미신학과 신앙”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들로 말미암아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반공주의와 친미주의의 보루가 되었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가 아니고 미국이 한국 교회의 머리가 된 것이다. 미국은 결코 한국의 하나님도 큰 형님도 아니며 영원한 우방도 아니다. 자기들의 국익을 따라 움직이는 수많은 세상 국가 중에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한국이 친미에 빠진 날

친미사대주의에 빠진 한국이 미국을 만난 역사는 길지 않다. 1882년 고종 19년 조미수호조약을 통해서 역사적인 조우를 하였다. 1884년 미국공관의 의사로서 알랜이 들어와 광혜원에서 의료선교를 행하였고 1885년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초기 미국 선교사들의 조선에 대한 애정과 헌신은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미국을 영원한 우방국처럼 생각하게 만들었고 고종마저도 그렇게 착각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조선에 대한 생각은 1905년에 일본과 맺은 ‘가쓰라태프트밀약’에서 드러났다.

러일 전쟁 직후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과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문제를 놓고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의 내각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가 1905년 7월 29일 도꾜에서 만나서 밀약을 했는데 각서에서 미국이 일본제국의 대한제국 침략과 한반도를 ‘보호령’ 삼아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이다. 역사가 밝힌 대로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으며 통감부를 세워서 식민지로 접수하는 수순을 밟았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나타난 미국은 결코 우방도 아니고 세계 평화와 정의를 위하는 선한 나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회들이 ‘친미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미국의 교단을 한국에 이식한 근본주의자들의 교육과 훈련, 그들에게 혜택을 받은 지도자들과 교단들의 신학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대한제국을 일본이 식민지로 삼키도록 용인한 미국이 다시 한반도의 역사에 나타난 것은 1945년 포츠담 회담을 통해서다. 처칠, 트루먼, 장졔스 3인이 포츠담에 모여서 전후 일본의 항복과 전후 처리문제를 논하였으며 회의 참석하지 않았던 스탈린도 이에 동의하며 서명을 하였다. 8월 10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표명하자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함에 있어서 38도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담당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포츠담 선언대로 미국은 결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서 왔으나 식민지 통치를 끝내는 해방군으로 아니고 또 다른 점령군으로 왔다. 그것은 미국이 우리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임정요원들의 환국을 방해하였으며 결국은 개인의 자격으로 입국하게 만든 역사적인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군정을 통해서 통치하며 식민지 앞잡이 노릇을 했던 매국노 경찰들을 재임용하는 불의를 자행하였으며 이념분쟁의 갈등의 씨앗들을 우리 의식 속에 주입을 하였다. 미군의 군정 통치는 3년 만에 끝났지만 그들이 통치한 3년 동안에 친일 매국노들이 재기하였으며 남북분단과 이념의 대립이 공고하게 되었다.

미군정의 통치가 끝나고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국무장관이 발표한 애치슨 선언과 한반도를 미국의 전략적인 동북아시아 방위라인에서 제외한 애치슨 라인은 불행하게도 한국전쟁의 한 요인이 되었다. 한국전쟁은 대대적인 파괴와 살상 끝에 휴전을 하였지만 한반도는 오늘날까지도 동족을 원수로, 적국으로 대하는 불행과 비극의 나라가 되었으며, 한반도는 휴전상태의 불안한 나라. 강대국 정치인들의 입맛과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주권이 없는 허수아비 나라로 세계에 보여 지고 있다.

미국 환상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들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사드배치의 과정과 트럼프 미국대통령의 전쟁 발언을 통해서 미국의 약소국에 대한 폭력과 강제를 절절하게 맛보았다. 무기를 팔면서 전쟁을 부추기는 강대국들의 진면모에 눈을 감고 아직도 그 옛날 미국이 좋아했던 이념논쟁에 눈이 멀어서 “미국 구세주”, “구원자 미국”이라는 거짓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의 교회는 더 이상 한국사회에서 소금과 빛으로서 이바지할 길이 없다.

한국 교회가 성서에도 없는 친미주의도 반공주의의 옷을 벗지 않으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걸림돌이 되어 역사에서 길이길이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고려가 의지했던 송나라. 조선이 의지했던 명나라. 조선 후기 왕들 특히 고종이 의지했던 청나라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한국 교회가 그토록 짝사랑하는 “구원자 미국”도 몰락할 수 있으며 역사에서 사라질 수 있다.

미국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복음을 전하였다고 해서 미국을 우상화하는 것은 공자를 받들며 중국을 우상화했던 중화사대주의와 다름이 없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며 식민지 앞잡이를 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의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다.

예수님의 색깔은 예수님이다

촛불집회가 시작된 이후로 카톡을 통해서 받은 “좌빨”에 관한 과장, 왜곡, 유언비어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되길 바란다. 아무리 선하고 의롭고 좋은 사상과 이념, 비전과 프로젝도 폭력적인 언어로 상대방의 의견을 얕보며 무시하며 제시하는 것은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보수든 진보든 간에 건강한 언어로 소통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아직도 카톡의 익명성과 스피드를 이용하여 색깔논쟁을 계속하는 분들에게 예수님의 색깔에 대하여 묻고 싶다. 
  
“포도원의 품꾼들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빨강색으로 보인다.
“주기도문”도 빨강색이 진하게 보인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도 빨강색 느낌이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으시는 예수님은 빨강색에 가까워 보인다.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신 예수님은 빨강색으로 보인다.
세리와 죄인, 소외된 여성들을 편애하신 예수님 또한 빨강색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 속에 빨강색이 두드러져 보인다고 해서 예수님이 공산주의자인가? 가당하지도 않는 말이다.

예수님에게는 민주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자는 아니다. 
예수님에게는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자는 아니다.
예수님에게는 자본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자는 아니다.
예수님에게는 공산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그렇다고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예수님에게는 금욕적인 요소가 있다. 그렇다고 금욕주의자는 아니다.
예수님에게는 세속적인 요소가 있다. 그렇다고 세속주의자는 아니다. 
예수님에게는 카리스마가 있다. 그렇다고 영웅주의자는 아니다. 
예수님에게는 이해가 불가능한 신비가 있다. 그렇다고 신비주의자는 아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언어로 다 담아낼 수 없다. 
예수님을 세상의 색채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예수님에게는 세상 모든 색이 다 들어 있다.
 
이념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빨강색으로 보이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그 반대의 색깔도 오롯이 지니고 계신다. 예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색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색채를 가지고 계시다. 

예수님은 빛으로서 빛의 색채이시며 
예수님은 생명으로서 생명의 색깔이시며 
예수님은 진리로서 진리의 색갈이시다. 
 
예수님은 독점 될 수 없다. 어느 종파나 어느 교단에 갇히지 않으신다. 어느 신학과 철학, 사상과 이념에 묶이지 아니 하신다. 예수님을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며 “좌빨”이라는 말로 자기와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정죄하며 심판했던 역사의 비극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님의 색깔은 태초처럼 신비하다.

생명의,
생명에 의한,
생명을 위한 색깔이다.

사랑의
사랑에 의한
사랑을 위한 색깔이다.

평화의
평화에 의한
평화를 위한 색깔이다.

자유의
자유에 의한
자유를 위한 색깔이다.

예수님은 이 모든 색깔로서 인간을 억압하며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와 살을 우리에게 밥으로 주시면서 살리며 구원과 해방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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