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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간음(마태복음 5:27-30)마음을 감추는 사람들
이성훈 | 승인 2018.04.29 18:35

오늘 저희가 읽은 말씀은 성경 말씀 중에서도 지키기 어려운 말씀 베스트에 무조건 들어갈 법한 말씀입니다. 어려서부터 이 말씀을 들을 때면, 이걸 과연 지킬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갖기도 했습니다. 길을 걷다가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눈을 한 번이라도 돌려본 적이 있다면, 눈을 뽑아야 하는 걸까?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을 보면서 열광했던 사람들이라면, 다들 간음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요즘 사용되는 ‘시선강간’이라는 말의 원조는 예수님이신 것 같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시선강간을 성희롱 급이 아니라 눈을 뽑아낼 범죄라고 말씀하십니다.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과연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이해해도 되는 것일까?’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고, 지금 시대에 있어서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음욕을 품고 보는 자

오늘 본문의 말씀은 흔히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말씀(마태 5-7장) 중에서도 여섯 개의 반명제에 속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 27-48절에는 여섯 가지 율법에 대한 반박이 등장합니다. “너희가 ~을 들었으나, ~하라”라는 형태로 이루어진 말씀들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에는 27-32절이 하나의 단락으로 묶여서 ‘간음하지 말라’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습니다만, 사실 27-30절은 ‘간음’에 대한 말씀이고 31-32절은 ‘이혼’에 대한 말씀입니다. 혹시 소제목만 보시고 ‘다섯 가지 아닌가?’ 하고 생각하실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가 대학에서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이 여섯 가지를 ‘반박명제’라고 배웠는데, 요즘은 ‘명제-반명제’, ‘강화명제’, ‘수정명제’ 등등으로 부르는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자체를 반박하신 것이 아니라 수정 혹은 강화하신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반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입장에서 여러 용어들이 사용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께서 율법을 더욱 강화하셨다는 입장이기는 합니다만, 용어는 반명제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가 그래도 가장 중립적인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여섯 가지의 반명제 중에서 오늘 본문은 간음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강력하게 반박하시며 더욱 강화하시는 말씀입니다.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는 모두 간음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음욕을 품었다’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가 동사 형태인 ‘에피튀메오(ἐπιθυμέω)’입니다. 명사는 ‘에피튀미아(ἐπιθυμία)’인데, 기본적인 의미는 ‘열망’, ‘갈망’입니다.

그런데 ‘열망하다’라는 말로는 ‘에피튀메오’를 설명하기 약간 부족해 보입니다. 성경에서 ‘에피튀메오’는 크게 세 가지 의미로 번역되는데, ‘탐내다’, ‘바라다’, ‘음욕을 품다’입니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기록한 70인역 성경에서는 보통 ‘이웃의 물건을 탐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십계명 중 제10계명에 사용된 단어가 ‘에피튀미아’입니다. 신약성경의 서신들에서는 ‘성령을 바라다’, ‘직분을 바라다’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세 번째인 ‘음욕을 품다’라는 의미는 특정해서 말씀드리기에는 애매하게 여기저기에서 사용됩니다.

‘열망’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씀드린 이유는, 이 단어가 일반적으로는 ‘남의 재물을 탐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무엇인가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지 ‘열망’이 아닌 ‘소유욕’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립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조금 더 명확해집니다. “여자를 보고 ‘소유하려는 마음’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하였다.”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는 남성에게만 적용되었지만 지금 시대의 남성, 여성 모두에게 적용해본다면, 누군가를 보고 그저 ‘멋있다’, ‘예쁘다’라는 생각을 품은 사람이 간음한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의 신체는 내 것이 아니지만 내 것으로 갖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간음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해본다면 조금 안심은 됩니다. 그나마 지킬 수 있는 법으로 바뀐 듯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빼고 손을 자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조금 거칠게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이 말씀에서 눈을 빼고 손을 자르라는 명령이 아니라, ‘왜 음욕이라는 마음의 상태에 대해 말씀하시는가?’를 먼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마네의 올랭피아와 비평가들

제가 좋아하는 미술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863년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는 ‘올랭피아’라는 작품을 출품합니다. 이 유명한 작품은 19세기 후반 인상주의를 활성화시키는데 기여한 작품입니다.

▲ Olympia, Edouard Manet, 1863, ⓒGoogle Arts & Culture

몇 년 전, 최순실 사건이 터졌을 때, 한 작가가 ‘올랭피아’를 패러디한 ‘더러운 잠’이라는 작품을 전시해서 우리나라에서 더 유명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그 패러디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뉴스에서 봤을 때, ‘올랭피아’의 가치를 한 없이 떨어뜨린 작품이었기 때문에 분노했습니다만 미술사를 공부하는 개인적 소견이고 패러디 작품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열어놓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도 봅니다. 본래 마네의 ‘올랭피아’가 지금까지도 유명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는 그 구도나 소재 때문이 아닙니다.

간단하게 작품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올랭피아라는 이름은 모델의 본명은 아니고 당시 창녀들의 흔한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속설에는 이 작품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 여성은 흙이 묻은 신발을 신고 있고, 여성의 옆에는 꽃을 들고 있는 흑인 여성 시녀가 있습니다.

당시의 남성들이 창녀를 찾아가 관계를 맺을 때, 꽃다발을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오른쪽에는 꼬리를 치켜든 고양이가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고양이는 샤(chat)인데, 여성형인 샤트(chatte)는 암컷 고양이라는 뜻과 함께 성행위를 의미합니다. 로코코 화가인 부셰(François Boucher)와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가 자주 사용한 오브제입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았을 때, 그림 속의 여성은 창녀가 분명하고 마네는 자신이 창녀를 소재로 그렸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 작품이 출품된 후, 화랑은 엄청나게 시끄러워졌습니다. 이 작품이 형편없는 외설이라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여신이 아닌 일반 여성의 누드를 그렸으며, 이름도 창녀의 이름을 붙였고, 여성의 형태도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은 일반 여성의 몸을 그대로 그렸다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좀 더 후기의 비평가들은 여성이 관람자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점 역시도 건방지다고 표현하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동일한 이유로 극찬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비평들은 사실 예상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100년 전 부셰가 자신의 아내를 모델로 ‘오달리스크(궁녀)’를 그렸을 때, 비평가들은 ‘부셰는 아내를 팔아먹는 사창가 포주다.’라고 말했습니다.

본래 마네는 티치아노(Tiziano Vecelli)의 작품인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보고 영감을 얻어서 ‘올랭피아’를 그렸다고 말했습니다. 마네가 영감을 얻었고 거의 동일한 구도를 따온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가장 아름다운 여성상을 그렸다는 평을 받는 작품입니다.

▲ Venus of Urbino, Titian, 1534 ⓒGoogle Arts & Culture

이 작품은 티치아노가 우르비노 공작가의 요청으로 그렸는데, 공작의 아들이 결혼 할 때, 결혼 선물로 그려진 작품입니다. 티치아노는 자신의 스승인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의(‘드레스덴의 비너스’라고도 불립니다.) 구도를 따와서 작품을 완성합니다. 이때 재미있는 점은 과거에는 여성을 그릴 때, 선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굳이 모델을 쓰지 않고 상상으로만 그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티치아노는 분명히 모델을 두고 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그래서 대단한 작품이라고도 말해집니다만, 그런데 그 모델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우르비노 공작부인’이라고 전해집니다.

미술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항상 길어집니다만,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왜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찬사를 받지만 동일한 구도를 따온 ‘올랭피아’는 저질스런 외설이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여성의 누드화에는 당연히 여신의 이름, 특히 비너스의 이름이 붙여지길 원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붙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관람자들은 비너스의 아름다운 몸을 찬양합니다. 여신이기에 이 땅에 없는 존재라고, 그렇기에 마음껏 감상하고 찬양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모델이 우르비노 공작부인이라는 설은 어디서 유래되었을까요? 사람들은 입으로는 비너스의 아름다움을 말하였지만, 사실 속으로는 그림 속에 담겨진 ‘실제 사람’을 상상했고, ‘실제 사람’인 공작부인을 욕망했습니다. 하지만 마네는 그러한 관람자들의 행태를 짓뭉개버립니다. 당신들이 보고 있는 것은, 당신들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여신이 아니라 실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네는 비평가들과 관람자들로부터 공격당했고, 그래서인지 이후로는 그런 작품을 그리지 않게 됩니다.

마음을 감추는 사람들

미술 작품의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여성을 보고 마음에 욕망을 품은 자’는 분명 겉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음욕을 품었는지, 소유욕을 품었는지는 본인만이 아는 문제입니다. 자신은 아니라고 말하면 그만일 문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눈을 뽑고 손을 잘라야 천국에 갈 수 있으리라.’

예수님의 이 거친 표현은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라기보다 그만큼 심한 죄를 범하고 있음을 깨우치시는, 또는 고발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속에는 얼마나 더럽고 추한 욕망을 품고 있는지, 그러면서 그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자신은 아닌 것처럼 꾸미고 살아가는지 고발하십니다.

그렇기에 마태복음 15장 19-20절에서는 장로들의 전통을 비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음은 추하고 더러우면서도 손을 깨끗이 하려고 하는, 겉만 깨끗한 척 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강하게 질타하신 말씀입니다.

겉만 깨끗한 척 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비너스의 누드를 보면서 추한 욕망을 품었던 사람들이 자신들은 그저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여신을 본 것일 뿐, 아무런 죄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추한 욕망을 품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에 이에 대해서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악한 마음을 변화시켜 달라고 간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며 삶을 살아갑니다.

요즘 언론은 지방선거와 남북정상회담 이야기로 정신이 없어서 미투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 사람들이 미투 문제에 흥미를 잃었기에 이야기하지 않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의 미투 운동 초기에 제기되었던 고은 시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당시 고은 시인과 그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과거에는 그래도 되는 줄 알고 그렇게 했던 시대였다. 지금 시대에 문제가 된다면 문제이겠지만, 지금의 기준으로 과거의 행동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일본 위안부 문제도 ‘그래도 되는 시기’였으니까 넘어가야 할 문제가 될 것입니다.

미투 운동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점은 남성들의, 넓게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긴 폭력성을 드러내는 일이고, 또한 잘못을 행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악한 일을 행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운동입니다. 더 나아가서 잘못을 깨닫고 피해자에게 사죄하며 반성하고, 법적으로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달게 받으라는 외침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언론을 통해서 보고 있는 대부분의 가해자들은 자신의 ‘죄’ 자체보다는 자신이 받게 될 ‘처벌’만을 바라보면서 이를 숨기기에만 급급해 보입니다. 속에는 추악한 마음을 품었음에도 손은 깨끗이 씻고 밥을 먹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그림 속 모델을 향해 음흉한 눈빛을 보내면서도 자신들은 비너스를 보고 있다고 말해왔던 사람들처럼 끊임없이 감추며 아니라고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지금 모습은 눈을 뽑고 손을 잘라야 할 정도로 악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악한 죄를 범하고 있는지 깨달으라는 말씀이십니다. 내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꼭꼭 감춘다고 끝나는 죄가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악한 죄입니다.

마음의 죄는 마음에만 있었으니까, 내가 품은 악은 내 마음에만 있으니까 문제되지 않는, 전혀 죄가 아니라는 우리의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죄가 아니라고 생각해버리면 우리는 결코 회개할 수 없고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죄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비록 미투 운동과 관련하여 성적인 문제만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더 넓게도 해석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우리가 품고 있는 모든 악한 마음들, 그 역시도 잘못입니다. 또한 아닌 척 하면서 겉만 깨끗하게 하려는 것도 잘못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그곳에 악한 마음이 있다면, 악한 마음이라면 너무 범위가 넓으니까 오늘 말씀의 이야기로만 좁혀서, 무언가 남의 것을 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죄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에서 죄가 사라지고 주님의 평화와 성령의 감동만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만 가득 차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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