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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 謂我自然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17
이병일 | 승인 2018.05.01 00:12
“태고에는 아래 백성들은 그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가장 훌륭한 임금은 그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다음엔 그를 가까이 하여 찬양하였고, 그 다음엔 두려워하였고, 그 다음엔 업신여겼다. 믿음이 부족하니 이에 불신만 있게 되었도다. 그 귀한 말을 그리워하나니, 공을 이루고 일을 마치면 백성들이 모두 ‘내가 스스로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 노자, 도덕경, 17장
太上不(下)知有之. 其次親之譽之. 其次畏之. 其次侮之. 信不足 焉(案)有不信焉. 悠兮其貴言. 功成事遂(成功遂事). 百姓皆謂我自然

노자는 백성을 인위적으로 다스리는 정치를 정당화하는 학문과 도덕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태고의 자연적 질서가 무너지면서 인의와 충효의 도덕이 나왔으나, 백성은 오히려 왕을 욕하며 정치를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태고시대에는 백성들은 타고난 자연적 성품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저 위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태고시대에는 자연의 도를 따라 통치했다고 노자는 주장합니다.

요임금은 백성에게 인을 베푼 임금이라고 합니다. 요임금이 백성에게 은덕을 베풀자 백성은 왕을 따르고 덕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인위적으로 仁을 베푼 정치가 있자 백성은 자연의 명령보다 왕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순임금에 이르러서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義를 만들어 백성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옳고 그름이 있자 이것으로 백성에게 형벌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백성이 이윽고 왕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우임금에 이르러 상과 형벌이 심해지면서 백성은 욕하며 저항했다고 노자는 말합니다. 왕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지자, 마침내 백성 또한 왕을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Getty Image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차치하고 그 다음의 좋은 지도자상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가까이하며 명예롭게 여기는 지도자입니다. 이른바 유교식으로 말하자면 王道政治를 실현하는 德治主義의 이상을 실현하는 지도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자의 눈으로 볼 때에 이는 최상의 방식이 못되고 그 차선에 불과한 지도력입니다. 최상의 방식은 임금이 없는 무위자연의 다스림이니, 임금이 없는 듯 하는 지도력을 보이는 것입니다. 요임금이 지방을 순찰하면서 들에서 노래 부르는 농부의 노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격양가(擊壤歌)의 노랫말은 이렇습니다. “해가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가 지면 휴식한다.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으나, 황제인들 내게 어찌하겠는가?” 요임금은 농부의 노래 소리를 듣고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흡족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실제로 정치가 안정된 나라의 국민들은 정치에 관심이 별로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정치인 특히 정치지도자(대통령)의 철학과 행위에 너무 많이 의존해 있습니다. 지난 정부의 지도자들이 나라를 사적으로 소유하여 자기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 적폐를 쌓아올렸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지금 갑자기 태상의 무위로 돌아가면 혼란이 가중될 것입니다. 그래서 무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다수가 될 때까지 올바른 정치철학을 가진 지도자가 사람 사는 세상에 가깝게 이끌어 가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민주(民主)를 넘어 모든 생명이 주인이 되는 날까지.

길은 끝이 없구나
강에 닿을 때는
다리가 있고 나룻배가 있다.
그리고 항구의 바닷가에 이르면
여객선이 있어서 바다 위를 가게 한다.

길은 막힌 데가 없구나.
가로막는 벽도 없고
하늘만이 푸르고 벗이고
하늘만이 길을 인도한다.
그러니
길은 영원하다.
- 천상병의 시 “길”

시냇물에 쓰레기가 하나 떠갑니다. 그것을 건져내었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고, 그 자신도 덕을 행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을 깨끗하게 한 행위입니다. 밑에서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산의 물은 원래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누가 위에서 쓰레기를 치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다스림이라고 합니다. 그 다스림은 정치적 행위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다른 사람이나 다른 생명에 대한 마음과 행위입니다. 노자가 계속 강조하듯이 공을 세우거나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마음으로 배려하고 환대하는 행위가 저절로 나오는 몸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사회는 법과 제도와 인의에 의해서 고착화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잘못된 그것을 바르게 잡는 것이 미래 세대를 위해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궁극적인 가치를 이룰 수 없는 이상이나 헛된 꿈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의 흐름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대정신을 모두가 더불어 함께 이루며 누리는 생명과 평화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몸과 마음의 상태로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람 사는 세상”, “평화, 새로운 시작”이라는 올바른 지도자의 정치철학이 확산됨으로써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가족이라는 경계를 허물고 재구성하면서 이루려 했던 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잡으러 와서 “밖에” 서 있는 가족(친척)들과 집 “안에서” 그의 주변에 둘러앉아 있는 무리들을 대조시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제시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갈 새로운 공동체는 사람들의 상호 관련을 지향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피와 인종과 민족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혈연과 지연과 학연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억압과 폐쇄가 아닙니다. 반대로 하느님 나라는 개방과 해방 곧 엶과 놓음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과 평등하게 맺는 형제 됨이고 자매 됨이며 어미 됨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중심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개방합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스스로 쳐 놓은 울타리를 허무는 것입니다. 그 울타리를 허무는 중심에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하느님의 가족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이 새롭게 하시고 하느님의 뜻이 중심이 되는 곳이 하느님의 가족입니다. 비록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일지라도, 서로 다른 이름의 신을 믿는 사람들일지라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연대할 수 있는 끈이 바로 “하느님의 뜻”과 “그 뜻을 행함”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그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가족이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우리가 연대하여 함께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시대의 흐름으로 볼 때에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하느님의 뜻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들의 권리를 헤아리고 보전하려고 애쓰는 일, 나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다른 생명들을 애지중지 하는 일,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다른 생명들의 희생이기 때문임을 확실히 깨닫고 내게 주어진 생명을 사랑하는 일, 세상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생명 파괴의 관계와 현장을 찾아가서 함께 하는 일, 하느님이 만드신 생명들의 평화를 깨뜨리는 세력들과 함께 할 수 없다고 단호히 선언하고 행하는 일, 그러기에 더욱 나의 평화를 비롯하여 모든 생명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일, 이런 일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으로 연대할 수 있는 끈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연대의 끈” 중에서

이병일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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