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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변혁운동(행 8:26-40; 요 15:1-8)기독교와 주체사상의 대화를 준비할 때
조헌정 | 승인 2018.05.03 23:52

제자에서 사도로

사도행전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 체험을 통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고 이 깨달음을 전파하기 위해 예루살렘과 갈릴리와 사마리아를 넘어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를 향해 나아간 최초의 교회 기록입니다. 같은 사람이었지만, 복음서에서 예수가 살아 있을 때는 배우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제자(弟子, disciple)라 불리었고, 예수 부활 이후에는 사명을 받고 나선 사람이라는 뜻에서 사도(司徒 apostle)라 불린 것입니다. 물론 복음서에도 사도란 말이 등장을 하고 사도행전에도 제자란 말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 제자에서 사도로의 전환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신자들이 예수를 평생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로서 신앙의 홀로서기를 하지 못하고 여전히 제자로서 목사의 가르침에 매여 있기 때문입다.

물론 이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교회 성장에 사로잡혀 있는 목사들의 욕심 때문입니다. 말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외치지만, 실제는 교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만 하도록 붙잡아 두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교회를 선악 이분법으로 구분하여 세상 안에 머무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이요, 교회 안에 머무는 신앙을 참 신앙으로 잘못 가르치기 있기 때문입니다.

▲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중세 ⓒGetty Image

그러면서도 세상 물질 많이 바치라고 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예수 따르는 신앙인들을 교회지상주의자로 만들고 예수의 하느님 나라 확장을 교회 성장으로 오해하게 만듭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후 약 천년동안 유럽의 가톨릭교회가 그렇게 믿고 가르침으로 교황이 세상 권력 위에 군림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일어난 것은 교회의 타락과 천동설을 영구불변의 진리로 믿는 어둠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한때 제자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사도가 되어 세상 안으로 나아가 세상을 변혁해가는 추동자들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한 교회 성장이 아닌 성공 욕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정의와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전파하는 일에 앞장 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는 부활 후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고 나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사실 이런 대목에서는 불트만이 말한 ‘비신화화 해석’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2천년전의 고대인과 현대인 사이에는 사고틀에 있어 큰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인이 현대인보다 어리석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쉽게 말해 부활과 승천을 내재(內在)화 내지는 실존(實存)화하여야 합니다. 이는 비(非)역사화가 아닙니다. 초(超)역사적 사건을 인간의 언어 안으로 역사화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런 초역사적 사건 이후에 나타난 현상에 주목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성령 강림과 세상 소란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에 천사들이 전한 말을 믿고 제자들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120여명이 모여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열흘이 지났을 때, 당시로 말하면 유대인들의 삼대 절기 중에 하나인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때 일어난 사건을 우리는 오순절 사건 혹은 성령강림사건이라 부릅니다. 이때 일어난 현상을 “세찬 바람”과 “혀와 같이 갈라진 불길”로 설명합니다. 이후 네 가지의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 그들이 거리로 나선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죽음이 두려워서 숨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거리에 나가 상대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불과 50일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군중들이요, 예수를 고발했던 바리새파, 사두개파 사람들과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죽음을 넘어섰다. 부활의 영이 저들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두 번째 그들은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였는데, 요즘 교회에서 말하는 방언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요즘의 방언은 주위 사람들이 그 뜻을 알기 힘든 이상한 언어를 말하지만, 첫 번째 방언은 외국어를 의미하였습니다. 각국에서 모인 순례자들 저들의 언어로 제자들이 말을 한 것입니다. 이는 곧 바벨탑 사건 이후 민족들의 언어가 서로 달라지는 신의 심판이 끝나고 예수의 영 안에서 일치와 화해의 새 역사가 시작하였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참 메시야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사람들이 거리에 나가 외치는 예수천당 불신지옥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신을 모독하고 군중을 선동한 죄로 로마의 최고 극형인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는데,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는 빨갱이 두목으로 처형을 당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 빨갱이 두목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그리고 메시야로 외쳤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 신의 아들로 불리고 있었던 사람은 로마 황제였습니다. ‘아우구스토스’란 의미가 신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신의 아들로 고백하는 행위는 로마 황제를 거부하는 일이요, 그럼으로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 행위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그리고 메시야로 고백하는 것은 종교행위에 해당하지만, 당시에는 이는 로마제국을 부정하는 정치행위였던 것입니다.

네 번째 그들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끼리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갔는데, 이는 오늘날의 교회와는 그 차원이 달랐습니다. 단순히 기도하고 말씀 배우는 일만 할 뿐 아니라, 구성원들이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공동소유의 경제평등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에서 부자되는 일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강조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오히려 가난한 것이 축복이라고 가르쳤고, 부자들에게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복음의 말씀에 양심이 찔린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내어놓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복음은 사실상 예수 이름으로 외쳐지긴 하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반(反)예수적인 세상 가르침입니다.

초대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이었습니까? 단순히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는 일에서 그치지를 않고 이를 실천하였습니다. 저들은 재산을 내어 놓는 나눔을 통해 세상 가치를 뛰어넘는 사랑공동체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일종의 사회 변혁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소란케 하는 자들”이라고 불립니다.

평등ㆍ사랑의 변혁공동체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8장이 이를 하나의 예로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립이 성령의 지시를 따라 나아갔습니다. 거기서 에디오피아 나라의 재정을 담당하는 관리를 만난다. 그는 순례 차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고 있었습니다.

사실 왜 갑자기 에디오피아 사람 얘기가 등장을 할까 의문이 드는데, 우리는 솔로몬 왕과 에디오피아 여왕 쉐바가 만난 역사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 유대교가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읽고 있었던 이사야서의 53장 말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처럼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정당한 재판을 받지 못하고 굴욕만 당하였다. 지상에서 그의 생애가 끝났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

여기서 관리는 이 얘기가 이사야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에 빌립이 다가가 바로 그 수난당하는 하느님의 종은 다름 아닌 갈릴리 나사렛 예수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한 사람의 세례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모든 종교는 민족과 인종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를 뛰어넘는 예수 복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관리는 한 나라의 재정을 담당하는 고관이긴 했지만, 그는 환관으로 생식기를 거세당한 곧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성 여성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신명기 23장 2절에 이런 사람은 유대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될 수 없다고 명시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고 세례를 통해 예수공동체의 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의 금기를 깨고 나아가는 사랑과 평등공동체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여성은 물론 성소수자에 대해 극심한 차별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당시 사회가 갖고 있었던 모든 차별의 벽을 뛰어 넘은 사랑공동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 교회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되겠다고 자원하는 사람을 막을 법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서의 후편입니다. 누가는 예수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눈뜸을, 갇힌 자에게 해방을 주기 위해 오셨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던 곧 유대사람들이 가장 멸시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유대 사람들보다 더 높게 인정합니다. 한센병 환자 10명이 고침을 받았지만, 예수께 와서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혼자였고,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 사회의 존경받았던 레위사람이나 제사장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비유를 통해 말해집니다. 이는 오늘날로 말하면 북의 (공산)사회주의자들이 남의 (자본)자유주의자들보다 더 훌륭하다는 얘기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도행전에서 새 역사를 주도해가는 사람들 또한 예수의 12제자가 아닌 새로운 사람들입니다. 빌립은 누구인가요?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스데반 집사와 같이 헬라파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던 7명의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빌립의 이야기를 하지만, 조금 있으면 바울을 선교의 핵심 인물로 조명합니다. 히브리파 12명의 예수 제자들이 아닌 헬라파 빌립 그리고 교회를 박해했을 뿐더러 예수를 만난 적이 없었던 바울이 예수 공동체를 움직여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은 단순한 사도들의 기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사명을 위해서는 새로운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또한 어느 조직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교인들은 새로 온 교인들에게 지도력을 넘겨주는 일을 꺼려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는 정체되고 이어 퇴보합니다. 이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기독교와 주체사상

우리는 27일 천지개벽과 같은 역사적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 사회에서 사탄의 두목으로 여겨졌던 김정은 위원장과 악수를 하고 벤치에 앉아 마치 연인처럼 오순도순 대화를 하고 끝내는 깊은 포옹을 한 것입니다. 사실 이 장면은 일찍이 29년 전 문익환 목사님이 김일성주석을 포옹하던 모습의 재현입니다. 그런데 문 목사님은 이 일로 옥고를 치루여만 했다. 물론 지금도 이를 거짓 평화쇼라고 치부하는 전쟁광들이 있지만, 저들이야 말로 적대 이념에 사로잡힌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남쪽의 기독교인들이 북쪽 인민들 특히 주체사상을 자신들의 신념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릴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통일의 과제는 단순히 국토와 체제의 통일만이 아니라 이념과 사고의 통일이 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목요일 한신대학원에서 문익환 목사님에 대한 강연을 하면서 마지막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지금 문 목사님 살아계신다면 무슨 일을 하실까? 아마도 기독교와 주체사상과의 대화를 모색하지 않을까? 사실 이는 제가 평소 꿈꾸어 온 일이기도 합니다. 통일은 국토통일 이전에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사상의 통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국토통일이 흡수통일과 같은 하나의 정부나 국가를 반드시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이 사상의 통일 또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흡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기독교와 불교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대화하듯이 기독교도 주체사상을 인정하고 대화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북조선도 헌법에서 종교자유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자유가 남쪽에서 말하는 그런 자유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난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큰 스피커를 이용해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소리치는 일은 종교자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상식에 어긋난 어리석은 행동일 따름입니다. 크게 보면 이런 행위는 예수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교회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을 뿐입니다.

농부(하느님)가 하는 일

요한복음의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포도나무로 우리는 포도열매로 그리고 하느님을 농부로 설명하고 있는 비유입니다. 물론 농부나 포도나무가 존재하는 목적은 열매를 풍성히 맺는 일입니다. 다른 열매나무도 마찬가지로 포도나무도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좋은 토양에서 거름과 햇볕과 물이 충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결코 열매가 많이 맺지 않습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걷다 보면 수많은 포도밭을 지나갑니다. 작은 농장은 사람들이 손으로 가지치기를 하지만, 대규모농장에서는 기계로 가지치기를 합니다. 가지치기할 때 보면 정말 과감하게 가지를 쳐내는 것을 봅니다. 농부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열매를 위해 우리의 삶의 곁가지를 과감히 쳐내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를 불행 혹은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훗날 우리는 그 아픔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귀한 본이 되는 열매를 맺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지가 줄기에 머물 듯이 예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종교적 황홀감에 머무는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결단 속에서 우리 개인의 욕망을 잘라내는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세상 성공을 말하는 것일까요? 전도의 열매나 선교의 열매를 말하는 것일까요? 성서구절을 많이 아는 말씀의 열매일까요? 아니면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하는 기도의 열매일까요? 우리가 예수 안에 머물면서 맺어야 하는 신앙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이 열매는 서로를 비교하는 그런 보이는 열매를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은 애초부터 열매맺는 일에서 제외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소수자 그리고 약한 자의 가치가 더 소중해지는 하느님 나라 기본 가치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꼴찌가 첫째가 되는 그런 열매여야 합니다. 저는 그 열매를 가치관(價値觀)의 전복(顚覆)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 생각을 완전히 하느님 생각으로 바꾸어내는 그런 정신혁명 말입니다. 여기에 열매를 맺어 하느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깨달음이 함께 하기를 바라며 하늘뜻펴기를 마치겠습니다.

조헌정  choshalo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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