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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사람들(왕상 17:1절, 행 4:1-4)롯데타워 앞 강남향린교회 기도회
이연정 | 승인 2018.05.04 22:10

‘기호 3번 안석뽕’이라는 동화책에는 초등학교 6학년 석뽕, 조조, 기무라라는 별명을 가진 세 명의 아이들이 나옵니다. 이들의 요즘 관심사는 시장 근처에서 몇 달째 가림막을 쳐 놓고 공사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아이들은 그 건물에 FBI한국지부가 들어오려고 한다는 둥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아이들의 부모님은 모두 시장에서 일하시는 상인이었습니다. 석뽕이네는 떡집, 조조네는 순댓국집, 기무라네는 건어물집을 하고 있습니다. 시장 근처에 생기는 FBI한국지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교실로 들어서는 순간 세 명의 아이들은 교실 사용을 독점하려는 회장후보 패거리들과 시비가 붙게 됩니다. 그러다 얼떨결에 석뽕이는 기무라의 허풍에 떠밀려 전교 회장 선거에 출마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선거에 출마하려면 전교생 중 열 명의 추천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고민 고민하다가 시장통 남자 아이들로 9명을 다 채워 넣었지만 마지막 한 명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써넣은 추천인은 시장 슈퍼집 딸 백보리였습니다. 백보리는 추천인이 되어줄 테니 나중에 자신이 시키는 일, 한 가지를 꼭 해달라고 합니다. 이틀 뒤 석뽕이는 보리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내가 시키는 일 해 주기로 한 거 오늘 해 달라며, 저녁 7시까지 시장 화장실 앞으로 오라고 합니다.

석뽕이는 집에 가는 길 요란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몇 달째 둘러쳐져 있던 공사용 가림막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피마트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장 바로 옆에 대형 마트가 들어서니 상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시장 바로 옆에는 대형 마트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 시행되기 이틀 전, 피마트가 미리 점포 등록을 할 수 있도록 구청과 경찰이 한통속이었다며 상인들은 분개했습니다.

보리는 석뽕이를 데리고 피마트로 들어가서 바퀴벌레를 살포하고 달아납니다. 보리가 하고 싶었던 일은 시장을 망하게 하는 피마트에 한방 멋지게 날려주는 일이었습니다. 석뽕이는 그제서야 마트라는 괴물이 시장 가게들을 모두 잡아먹으려 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다음 날 석뽕이는 떡집으로 찾아온 경찰 아저씨에게 잡혀 경찰서에 가게 되는데 경찰서에서 석진이는 마트 점장님 앞에서 그저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비는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아버지와는 반대로 보리엄마인 슈퍼아줌마는 마트 점장에게 큰소리로 따졌는데 석뽕이는 왜 아버지는 슈퍼 아줌마처럼 떵떵거리며 큰소리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시장 사람들은 한심하고 답답한 어른들 대신 애들이 나섰다며, 이대로 손 놓고 있지 말자고 결의합니다. 시장 안에는 아이들이 어른들을 대신해 물건을 팔고 있고 어른들은 단체로 빨간 조끼를 맞춰 입고 확성기와 손팻말을 챙겨들고 피마트 앞으로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석뽕이 아버지도 빨간 조끼를 입고 함께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석뽕이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시끄러운 거 싫다던 아버지도 빨간 조끼를 입었다. 엄마가 왜 당신은 안 나오느냐고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할 수 없이 나간 거 같다. 슈퍼 아줌마는 ‘시끄럽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그 말이 맞는 거 같다.”

저는 이 동화책을 읽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바로 위 슈퍼 아줌마의 말이었습니다. 시끄럽게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 강제집행 당한 강남향린교회가 교회 앞에 천막 기도처를 만들고 강제집행의 부당성을 알리고 있다. ⓒ김수산나 제공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늘 말씀에는 시끄러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열왕기상 17장 1절은 악한 왕 아합에게 시끄러운 사람으로 등장하는 엘리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에 아합 왕은 성경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악한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아합이 가장 악한 왕으로 기록되었을까요? 그가 두로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혼인을 해서일까요?

단지 혼인만이 아니라 그는 생명에서 떠나 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엣바알이라는 이름의 뜻은 바알의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알은 농경 사회에서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가나안 지역에서 믿었던 신이었습니다.

아합 왕이 이세벨과 결혼하여 이스라엘도 바알 신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알이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 준다하여 바알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물질을 풍성히 가져다준다는 바알 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유혹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먹을 것을 해결한다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알 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돈 말고는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바알의 대표적 추종자 이세벨은 여호와를 믿는 선지자를 무자비하게 죽였으며,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바알의 대결에서 바알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몸에 자해를 하면서까지 신에게 비를 구했습니다. 또한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포도원을 가진 나봇에게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나봇을 죽이기는 일까지 아무렇지 않게 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믿는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 거리며 미지근한 물이 되어 둘 다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열왕기상 17장 1절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그는 디셉이라는 성경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지역의 사람입니다. 주목받아 오지 않는 곳에 주목받지 않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아합 왕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당당히 말합니다.

17장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길르앗의 디셉에 사는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내가 섬기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비는 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가 다 침묵하고 있을 때 시끄러운 사람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말합니다. 비를 내리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생명의 하나님이라고 아합 왕을 향해 세상을 향해 엘리야는 시끄럽게 선포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1절-4절에는 시끄러운 베드로와 요한이 나옵니다. 이들이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백성을 가르치고 예수의 부활을 전파하는 것이 듣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가두어 놓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용기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신 날 밤 제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 명도 빠짐없이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침묵으로 예수를 붙잡아간 사람들에게 순응했습니다. 멀찍이 떨어져 뒤따르던 베드로는 그를 알아본 사람들에게 세 번이나 나는 모른다고 나는 아니라고 예수를 부인합니다. 이랬던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통하더니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보기에 시끄러운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23-24절에서 베드로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무법자들은 법이 없는 자들입니다. 법 없는 것 같은 세상에,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계층은 누구일까요? 권력자나 상류층은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법 없는 자들의 손에 죽임당한 예수를 하나님께서 죽음의 ‘아픔’에서 해방하셨습니다. 겁쟁이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과 발의 못자국을 보며, 폭력으로 인한 고통에서 해방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베드로는 승자가 아닌 패자, 강자가 아닌 약자를 세계의 구원자로 삼으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베드로는 죽임당한 예수를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음을 경험했습니다.

부활했다로 쓰인 희랍어 ‘에게로이’는 ‘봉기하다’, ‘일어나다’의 뜻이고 ‘아나스타시스’는 ‘대항하다’, ‘맞서다’라는 뜻입니다. 폭력에 맞서 일어나는 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폭력구조에 더 이상 순응하고 침묵하는 것을 벗어던지고 폭력에서 해방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시끄러운 사람들로 일어섭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자 목숨을 지키려고 도망친 제자들의 모습은 간데없고 목숨을 걸고 증언하는 증언자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가둔 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풀어주면서 더 이상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며 엄중히 경고합니다.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도행전 4장 19-20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엄중히 경고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침묵할 수 없다고, 폭력적인 구조에 순응할 수 없다고 우리는 시끄러운 사람들로 예수의 부활을 증언할 것이라고 당당히 맞섭니다.

▲ 들꽃향린교회 이연정 목사가 잠실 롯데타워 앞에 기도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김수산나 제공

강남향린교회가 예고 없는 강제집행으로 성전이 침탈 당한지 35일째가 되었습니다. 그 날 부터 우리는 거리에서 내몰려있습니다. 그리고 지난주 목요일, 지난주일, 오늘로 3번째 우리는 롯데건설을 지탄하며 롯데타워 앞에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거리에서 왜 이렇게 시끄럽게 하냐며, 롯데 사람들은 쟤들 또 왔다며, 와서 또 시끄럽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에게 기호3번 안석뽕 동화책에서 초등학교 6학년 석뽕이가 전교회장선거에 출마 연설에서 한 말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옛날 옛날에 개하고 사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사람들이 개하고 사자를 잡으려고 막 돌을 던졌대요. 그랬더니 개는 괜히 날아오는 돌한테만 화를 내면서 와작와작 돌을 물어뜯더래요. 하지만 사자는 좀 달랐대요. 사자는 돌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돌 던진 사람을 쫓아가서 물었대요. 그래서 사람들은 사자한테는 ‘역시 사자’라고 했고, 개를 보고는 ‘멍청한 개자식’이라고 비웃었대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요. 그런데 요즘에도 그런 개자식이 있대요. 저런 문제아! 골치 아픈 놈! 나쁜 녀석은 혼나야 돼! 이렇게 욕부터 하는 사람들이 바로 돌한테만 으르렁대는 멍청한 개자식들이래요. 사자는 안 그러거든요. 현명한 사자는 뭣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먼저 생각하고, 뭘 물어뜯어야 같은 일이 다시는 안 벌어질지 잘 판단한 다음 행동하니까요. 쟤는 왜 저렇게 공부를 못하는지, 얘는 뭣 때문에 자꾸 말썽을 피우는지, 그리고 피마트 바퀴벌레 사건은 도대체 왜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서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까요.”

초등학교 6학년 석뽕이는 말썽피우지 말라는 사람,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사람들을 향해 당당하게 말합니다. 왜 시끄럽게 하는지 그 이유에 주목하라고 말이지요.

지금 대한민국은 재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소중한 삶의 공간을 빼앗겨 억울한 눈물로 뒤덮여 있습니다. 막강한 재벌과 그의 자본은 재개발에 눈독들이며 사람들을 좌절로 절망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재개발지역에서 안 나가고 버티는 주민들을 상대로 용역과 중장비를 동원해 강제집행이 이루어집니다.

동네 전체가 가림막에 둘러싸인 서울 장위동 재개발 7구역은 철거가 시작된 지 9개월 만에 6백여 가구가 떠났고, 이제 마지막 한 집만 남았습니다. 벌써 다섯 번째 강제 집행이 있었습니다. 결국 집주인 조한정 씨는 어제 옥상 위 첨탑에 올랐습니다. 아내 이상의 씨도 첨탑에 몸을 묶었습니다. 이상의 씨는 옥상에서 “갈 데가 없다고요. 갈 데가 없는데 어떡하라고 그러는 거예요?” 라고 눈물을 흘리며 외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까지 쫓겨나고 삶의 터전을 잃어야 할까요? 우리는 언제까지 강제집행이라는 폭력과 마주해야 할까요? 우리는 언제까지 갈 곳이 없다고 억울하게 울어야 할까요?

강남향린교회는 35일째 거리에 쫓겨나있습니다. 우리가 여러 번 들어 알고 있듯이 재개발조합이 법원에 제출한 탄원서엔 “강남향린교회 성도들의 강력한 저항이 예측 되는 바 예고 없이 강체 철거를 해주시기를 부탁한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은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가져올 정의로운 세상이 두려워 성전을 침탈하는 폭력을 자행했습니다.

생명을 버리고 돈을 택하는 막강한 재벌 자본에 결탁된 사람들에게 엘리야와 부활하신 예수를 증언하는 사도들의 시끄러운 외침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아합 왕에게 분연히 일어난 시끄러운 자 엘리야를 기억합니다. 또한 십자가 폭력의 고통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부활을 증언하는 시끄러운 자들로 일어선 것을 기억합니다.

문제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쟤네 또 왔다며 와서 또 시끄럽게 한다”고 하겠지만, 시끄럽게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자본의 폭력에 침묵하고 순응하여 상식 이하의 행동으로 폭력을 일삼는 저들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맙시다. 생명보다 돈을 더 중시하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그 날을 바라며 우리는 더욱 시끄러운 사람들로 살아갑시다. 이 땅에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생명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폭력적인 세상에 맞서 부활하신 예수를 온 몸으로 증언하며 살아갑시다. 함께 침묵하겠습니다. 

이연정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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