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에 나오는 히브리어 <루악흐 하엘로힘רוּחַ אֱלֹהִים>은 개역에서 ‘하나님의 영’이라고 번역되었다. 여기에 “영(靈)”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루악흐רוּחַ>이다. 2하반절을 “세찬 바람<루악흐>이 물<마임> 위에 활개치고 있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여기에 새번역은 ‘또는 하나님의 바람 또는 강한 바람’이라는 각주를 달아둔다. <하엘로힘>을 ‘하나님의’라고 옮겼는데 수사법에서 이것을 magistrie pluralis기법이라고 한다. 매우 강력함을 나타낼 사용하는 수사법이라는 것이다. 창1:3은 빛의 창조를 보도하고 창1:2은 빛의 창조 이전의 상태를 묘사한다. ‘빛’<오르> 이전에 ‘영’<루악흐>과 ‘물’<마임>이 기존하고 있었다.

<루악흐רוּחַ>는 무엇인가?. 세번째 철자가 후음 ח이기 때문에 <흐>앞에 받침 ㄱ을 붙여야 쎈 소리가 난다. <루아흐>가 아니라 <루악흐>라고 해야 거친 숨소리가 제대로 들린다. <루악흐>는 창1:2에 처음 나온다. 옛날에는 자전이 없었기 때문에 낯선 단어가 나오면 그 자체의 문맥 속에서 그 개념을 파악해야 한다. 창조의 문맥에서 맨 앞에 <루악흐>가 언급되었음을 미루어 볼 때 <루악흐>는 천지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힘 내지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루악흐>의 작용으로 나타난다.

칼빈은 이런 뜻으로 성령의 우주론적 개념을 논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권능 아래 놓여 있으며 <루악흐>의 작용 안에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삼위일체를 고백해왔는데 성령<루악흐>은 성부, 성자와 더불어 하나의 인격이다. 삼위일체론에 따르면 성령은 어떠한 힘이나 에너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루악흐>가 에너지와 무관하다면 어떻게 물질을 창조하고 움직일 수 있는가?

<루악흐רוּחַ>는 빛 보다 먼저 있었기에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3차원 내지 4차원의 우주 안에만 한정될 수는 없다. 빛의 창조로 인하여 시공간의 우주가 생겨났고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루악흐>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을 존재하도록 작용한 실질적인 힘이다. 이것이 에너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루악흐>는 피조계를 초월하여 다른 차원에서도 활동하기 때문에 삼사차원의 우주에 종속될 수는 없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동일한 차원에서 움직인다. 그렇다면 창1:2의 <루악흐>는 삼위일체 신학에 더 깊은 내용을 더해 준다. <루악흐רוּחַ >는 현상계에 작용하는 힘이나 에너지일 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신 <엘로힘 אֱלֹהִים>과 동일한 차원에서 움직인다. 다시 말하자면, <루악흐>는 우주 바깥의 초월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우주 안의 피조된 영역에서도 작용하고 있다.

<루악흐רוּחַ>는 그리스어 성서에서 일제히 <프뉴마 πνεῦμα>라고 번역된다. 오경에는 <루악흐>를 딱 70회 언급하고 있는데 모두 <프뉴마>로 번역되었다. 신약성경에도 <프뉴마>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을 나타낸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프뉴마>가 거센 바람의 소리로 임하여 성도들 각자의 머리 위에 불꽃으로 강림하였다(행2:2~3). 오순절성령강림의 사건으로써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지어갈 새 사람이 창조되었다. 출애굽기를 보면, 홍해를 가를 때 동쪽에서 <루악흐>가 밤새도록 불어와서 바닷물을 갈랐다(출14:21).

▲ Jan Janssens(1590-1650), The Annunciation (수태고지, first half of 17th century), Museum of Fine Arts, Ghent ⓒWiki Common

이처럼 <루악흐>와 <프뉴마>는 인간의 내면에서 움직이는 영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우주에 가득하여 계속 창조하시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성령운동은 개인영혼의 구원에만 한정되지 않고 사회구원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된다. 더 나아가 사람의 역사와 자연환경의 구원에까지도 적용되는 운동이 성령운동이다.

<루악흐רוּחַ>는 우리말로 기(氣), 기운(氣運), 힘이란 용어들로 번역될 수 있다. 옛날 한글역본에서는 <루악흐>를 “신(神)”이라고 옮겨서 “성신(聖神)”이라고 했다. 찬송가 가사에도 “성신이 오셨네”라고 노래했다. 이것을 영(靈)이라고 고친 것은 일본어의 영향인 듯하다(참조. 민영진).

우리말에 ‘귀신’이란 용어와 ‘혼백’이란 용어가 있는데 이 모든 것이 피조물의 영역 안에 있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귀(鬼)’는 음의 영역에 있고 ‘신(神)’은 양의 영역에 속하며, ‘혼(魂)’은 음, ‘백(魄)’은 양이다. 그러나 음양에 속하는 것은 피조물이기에 그 어느 것도 빛의 창조 이전에 기존하고 있던 <루악흐>를 표현하지 못한다. 성서의 <엘로힘>을 ‘신(神)’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일본어의 영향이지 싶다. 일본인은 하나님을 가리켜 ‘가미사마(かみさま[神様])’라고 부른다.

그러면 ‘영(靈)’이란 번역어는 어떤가? 한글사전을 보면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1. 육체 속에 깃들어 생명을 부여하고 마음을 움직인다고 여겨지는 무형의 실체
2. 풍습으로 숭배하는 모든 신
3. 애니미즘에서, 인간 이외의 생물과 무생물에 머무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이 세 가지 정의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능력을 다 표현하지는 못한다. 한글역본들이 <루악흐 엘로힘>을 일제히 “하나님의 영”이라고 번역했는데 유독 공동번역만이 “하나님의 기운”이라고 옮긴 것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한 시도로 보인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은 성서의 <프뉴마>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서 오랜 세월 동안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왔던 것이다.

영어로는 spirit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불가타 성서의 라틴어 spiritus와 일치한다. 흔히 spirit를 ‘정신(精神)’이라고도 번역하는데 이렇게 되면 <루악흐>의 개념 중 극히 일부분만을 표현하게 된다. 또한 sprituality를 ‘영성(靈性)’이라고 옮기고 여기서 ‘영성신학(靈性神學)’이란 용어도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루악흐>의 개념을 다 담지 못한다. <루악흐>가 하나님에게 적용되어 “나의 영”이란 표현이 있는가 하면(창6:3 רוּחִי <룩히>), 사람에게 적용될 때에도 “나의 영”이란 표현이 성립한다(시31:6 רוּחִי <룩히>).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시31:5개역). 그러므로 성서의 영성신학은 인간의 심리작용에 국한하지 않고 창조론과 우주론으로까지 그 지평이 넓게 펼쳐져야 한다.

독일어로는 <루악흐רוּחַ>를 Geist라고 옮긴다. 독일의 구약성서신학자 폰 라트(G. von Rad)는 <루악흐>를 제대로 번역할 용어는 독일어나 영어에서나 찾을 수 없다고 아쉬워했다. 성서가 알려주는 <루악흐>는 하나님의 창조계 전체에 편만하고 창조계 바깥에서도 활동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이다. 이 개념을 성서 이외의 어떠한 문헌이나 문화의 용어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은 성서의 핵심인 유일신 사상이 인간의 의식의 전개에서 얼마나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는지를 보여준다.

<루악흐>는 인간을 이루는 구성요소 곧 인간론(anthropology)에 한정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와요메르 엘로힘וַיֹּאמֶר אֱלֹהִים ), 그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여 이루어 피조물을 창조하고 계속 존재하게 하는 힘이 <루악흐>이다. 그러므로 <루악흐>는 우주론(cosmology)까지도 품는 개념이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이루는 힘은 성령의 능력이며 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다. “주님,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생각하여 주십니까? 인생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염려하여 주십니까?” (시144:3 새역)

이영재  rheeyjae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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