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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과 교회(창 11:1~9, 행 4:32~35)교회, 거대 자본제국에 저항하는 공동체
양재성 | 승인 2018.05.12 22:05
이 설교문은 지난 5월10일(목) 잠실 롯데타워 앞에서 진행된 <강남향린교회 강제집행 문제헤결을 위한 촛불기도회>에서 양재성 목사님이 전하신 말씀입니다. 원고를 보내주신 양재성 목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갑질

재벌과 그 2세들의 갑질이 도를 넘고 있습니다. 대한항공의 갑질은 사회적 이슈를 넘어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마치 조선시대 못된 주인이 하인 부리듯 직원을 대하는 태도는 지금이 21세기 맞나 의문을 품게 합니다.

이는 대한항공만의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재벌가들의 갑질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 롯데 일가의 만행과 비리는 작년 박근혜 국정 농단이 밝혀지면서 드러났습니다. 권력과 야합하여 지배구조를 강화하고 거래를 통해 개발권을 따내고 돈으로 노조를 매수하는 등 정의로운 사회를 혼탁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드 대체부지 제공으로 국가권력과 거래를 하였고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들에게 비난을 사고 있으며 지금 중국의 무역보복으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 공감과 연대

이 시대의 지성 박노자 교수는 그의 책 <비굴의 시대>에서 비굴하게 살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내가 사는 세상은 좋은 세상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권합니다. 그는 ‘갑질’ 뿐만 아니라 ‘을질’ ‘병질’을 지적합니다. 가령 오너의 딸이 비행기를 회항하는 것이 ‘갑질’이라면, 한 노동자가 마트에 가서 마트 노동자에게 ‘진상 짓’을 하면 ‘을질’이라 지적합니다.

박 교수는 비굴의 시스템에 순응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파멸의 길임을 경고합니다. 본인이 위로부터 당하는 만큼 아래를 당하게 하고, 차별당하는 만큼 차별하는, 그것이 비굴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나만 잘 살면 이런 악순환을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기만이며 착각이라고 지적합니다. 오늘날 영토를 식민지화할 수 없는 자본이 식민지화하고 싶은 대상은 아동이나 청소년입니다. 그들을 식민지화함으로써 그들을 유순한 자로 만들고 소비에 매달리게 함으로써 자본의 노예로 만들고 비굴한 자로 육성한다고 꼬집습니다.

▲ 양재성 목사가 <바벨과 교회>라는 제목으로 <강남향린교회 강제집행 문제해결을 위한 촛불기도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강남향린교회 제공

자본의 노예가 되는 패러다임에 한 개인으로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비굴의 시대에 맞서려면, 어쩔 수 없이 맺어져야 하는 것이 타자와의 연대입니다. 홀로 만족해하고 나만 생각하게 만드는 악습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비굴의 시대는 아동 시기부터 자기와 타자를 가깝게 생각하는 고리를 원천 봉쇄시킵니다. 어릴 때부터 타자를 먼 존재로 만드는 것이 자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키워졌음을 발견하고 타자를 발견하고 타자와 함께 비굴의 시대에 맞서야 합니다.

프랑스의 지성 피에르 신부는 세상은 신자와 비신자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며 홀로 만족하며 사는 자와 더불어 공감하는 자로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자이면서 홀로 만족하는 자보자는 비신자이면서 공감하는 자를 더 좋아하신다고 말합니다. 결국 개인적 구원은 사회적 구원이 전제되어야 함을 지적한 것입니다.

▪ 강남향린교회

지난 3월 30일, 부활절을 이틀 앞 둔 성금요일 오전 8시 20분경. 법원의 집행관과 송파경찰서의 경찰관, 조합원이 삼위일체가 되어 예고도 없이 강남향린교회를 기습적으로 쳐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구둣발에 짓밟혔고 성물은 마구잡이로 강탈당했습니다. 교회는 철판 펜스로 막혔고 경찰이 교회를 막고 있어 교회에 계신 하나님은 감금되었고 주인인 교인들은 교회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백주 대낮에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법원과 조합의 무지의 소치로 보기엔 너무 황당하고 법원과 경찰, 건설주와 조합간의 내부 거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철거는 치밀하게 전광석화처럼 감행되었습니다. 교회를 그것도 민주와 정의를 외치며 불의에 맞서 싸워왔던 강남향린교회를 이렇게 강탈할 정도면 힘없는 철거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 사례가 용산 참사입니다.

▪ 용산 참사

2009년 1월 20일, 매섭게 추웠던 겨울날 새벽. 용산역과 마주한 남일당 건물 옥상 망루에서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특공대 한 명이 화염 속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철거민은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망루에 올랐고, 경찰은 부당하고 위험한 명령이지만 따르지 않을 수 없어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 왔던 대한민국 건설자본과 그 자본의 의해 매수된 권력과 공권력은 우리들의 남편이고 자식이고 아버지였던 여섯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유가족들의 한(恨)과 눈물, 거리에서 노숙하며 생존권 투쟁으로 살아온 철거민들의 하루하루는 너무나 고단한 삶이었습니다. 총리와 서울시장의 유감 표명 뒤에 숨어 있었던 용산참사의 실질적인 책임자 이명박은 지금 다른 사유로 구속되었고 당시 서울 경찰청장으로 참사의 정점에 서 있었던 김석기는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용산 참사는 단순히 자본과 세입자 간의 대결이 아닙니다. 집을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건설자본과 이들의 비인간화에 밀려 쫓겨나는 이들의 편에 선 양심의 대결이었습니다. 국가공권력과 철거민들의 싸움이 아니라, 국민을 힘으로 눌러 통제하고 억압하는 부당한 공권력과 내 삶의 터전을 지키겠다는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국민들의 싸움이었습니다. 강남향린교회 사태를 보면서 용산 참사는 끝난 것이 아니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용산 참사를 겪고도 법원과 자본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생각하니 갑갑하고 참담한 마음입니다.

▪ 율법과 예언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만물 가운데 내재하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지어주시고 이를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니 법은 모든 것을 관통하고 관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율법으로 육화된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의 한 부분이었기에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말씀의 신비보다는 보이는 율법에 맹종하였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율법의 정신보다는 율법 조항에 집착하는 율법지상주의가 작동하게 되면서 신앙은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작은 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 작은 자들을 착취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작동이 예언자 전통입니다.

예언자란 미래를 미리 알아 미래를 예언하는 자란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예탁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으로 구체화되어 작동하지만 오히려 더 근원적인 말씀의 신비는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경청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는 이들이 나타났으니 바로 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 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입니다. 고통의 소리, 억울한 소리, 탄식의 소리를 경청했습니다. 예언자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에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소리가 부담되었고 두려웠으며 거북했습니다. 결국 권력자들은 자신을 대변하는 거짓 예언자들을 세워 참 예언자들을 비방하고 모함하여 박해하였으며 심지어는 죽였습니다. 결국 예언자 전통도 그렇게 실패하는 듯 보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은 직접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사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고 하나님의 신성은 그가 지은 만물 가운데 심겨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고 살았기에 이 사실을 알리려고 오신 분이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인의 몸에 잉태하여 태어나셨고 말씀에 이끌려 살아가셨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했고 한 마디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는 당신과 하나님은 하나라고 고백하십니다. 이것이 종교 권력자들이 예수를 비방하여 죽이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동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이 완벽하게 표출된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완전히 보여 진 완전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을 본 자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 말씀의 부활

우리는 절기상으로 주님의 부활 절기를 걷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몸의 부활입니다. 이는 육체의 부활과는 다릅니다. 몸의 부활은 생물학적 부활이란 의미보다는 예수의 삶의 부활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삶이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예수의 삶을 이어서 살기 시작한 사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며 삶의 부활이요 예수 제자들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입니다.

또한 예수의 부활은 예수 운동의 부활입니다. 예수 운동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율법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삶의 현장으로 이끌어갑니다. 율법의 핵심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면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을 하나님처럼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약자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율법의 중심입니다.

하지만 율법은 가진 자들의 노리개로 전락되어 지극히 작은 자들을 정죄하고 낙인을 찍어 족쇄로 채워 노예로 전락시켰습니다. 정신과 그 정체성을 잃은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였습니다. 예수는 그런 율법을 폐하고 새로운 말씀의 법, 사랑의 법을 세우러 오셨습니다. 사람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권력과 자본을 어두운 세력 악마로 규정하고 거기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참 된 복음운동이며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부활은 말씀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뜻대로 전 생을 걸고 걸어가신 예수의 삶이 옳았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사건입니다. 그 삶을 이어가는 거룩한 행진을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이들을 하나님처럼 대하며 사랑하는 삶입니다.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말씀, 그 뜻이 우주를 섭리하고 이끌어 간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명하는 삶이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삶임을 믿고 나아가는 삶입니다. 자신의 이기적 삶을 버리고 이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 놓는 삶입니다.

▪ 바벨

사람들은 과학이 발전하면서 벽돌을 굽게 되면서 더 높은 건물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건물을 높게 짓는 것을 본 하나님은 분노하시고 땅에 내려오시어 탑 쌓기를 중단시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고층 건물을 짓는 것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높은 탑을 쌓으면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그토록 싫어하신 것일까요?

바벨은 바브라는 문을 의미하는 단어와 엘이라는 신을 의미하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바벨은 신의 문이란 뜻으로 문을 거대하게 지어 그리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고 복종하게 한 것입니다. 당시 탑 쌓기는 대부분 민중들이 동원되었고 대를 이어서 고된 노동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대표적인 갑질 문명으로 극소수를 위해 대중들의 자유를 빼앗고 폭력적 삶을 구성하는 사회를 질타하시고 탑 쌓기를 중단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소수의 자본권력과 정치권력을 위한 문명을 하나님이 거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민중의 자유를 억압하고 피를 흘리게 하고 빼앗은 것으로 세우는 문명은 붕괴시킬 것입니다.

▲ 강제집행 당한 강남향린교회가 매주 목요일 저녁 잠실 롯데타워 앞에서 촛불기도회를 진행하고 있다. ⓒ강남향린교회 제공

국정농단의 정점인 박근혜 주범의 단죄가 내려졌습니다. 박정희-박근혜로 이어진 불행한 일가이지만 한국 현대사를 불행하게 만든 일가의 몰락이기도 합니다. 재판부는 삼성 승계와 관련된 혐의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의 정점보다 자본의 정점이 더 강고함을 입증한 것인지 그간의 삼성의 로비의 결과인지 알 수 없지만 삼성 봐주기 선고라는 말을 피하긴 어려울 전망입니다.

자본은 전 세계를 이미 장악하였습니다. 자본주의의 첨단인 미국은 으름장을 놓으며 세계를 겁박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중국이나 되니 맞장을 뜨고 있지 약소국가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삼성이 무노조 원칙을 고수하고 노조 파괴를 위해 얼마나 악랄하고 치졸하게 광범위하게 노조파괴 기획을 운영해 왔는지에 대한 관련 문건이 발견되어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5년 전에 관련 노조 고사화 문건이 심상정 의원이 문제제기하며 보도 되었었지만 그냥 덮어졌었습니다.

당시 노조 고사화 문건이 지금 노조 그린화로 바뀐 것뿐입니다. 마치 국정원이 프락치를 보내 내부 갈등을 유발하고 핵심 인사들을 조사하여 정보를 빼돌리고 인사 불이익을 주는 등 회유와 압박을 통해 노조 무력화를 실행하였습니다. 때로는 어용노조를 만들어 기존 노조를 와해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인권에 대한 헌법을 유린하는 것이며 노동법을 무시하는 처사로 그 죄가 아주 악랄합니다. 이번에 반드시 그 진위를 밝혀 삼성 무노조 원칙을 깨고 노동자들이 주인인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 평화 공동체

주군인 예수가 극형으로 처참하게 처형되는 것을 본 제자들은 두려워 숨었고 패닉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스승을 배신한 비겁함으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평화를 잃고 샬롬을 빼앗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으라고 샬롬을 선포하십니다. 평화로운 사회, 샬롬의 나라의 부활입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왕국의 시작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린 그간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국외적으로는 일제와 미제 때문에 국내적으로는 권력과 이념과 분단과 자본의 횡포 때문에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은 권력, 자본, 이념, 분단, 민족을 넘어서는 평화의 세상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평화로 가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던 제자들은 부활의 기쁨을 맛보고서야 평화를 되찾고 문을 박차고 거리에 나섭니다. 그리고 너희가 죽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외칩니다. 이는 세상을 향한 선전포고입니다. 학살과 압제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저항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저항은 비폭력이었습니다. 이는 예수가 선택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꼭 비폭력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대와 그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 당시 그 상황에서 비폭력 저항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신비요 신앙의 신비입니다. 무력해 보이지만 가장 강력한 길입니다.

▪ 교회

사도행전은 부활 공동체인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 안에서 한마음 한뜻이 되었습니다. 이는 영성적 공동체요, 마음의 공동체로 서로 깊이 사랑하는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습니다. 그들의 중심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역설적이게도 예수의 죽음에 주목하게 만들었고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의 삶에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를 죽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예수의 삶이었습니다. 그 삶은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 목적이었습니다.

결국 초대교회 공동체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 된 말씀 공동체였습니다. 부활이 예수의 삶이 옳았음을 하나님께서 확인해주신 사건이라면, 부활신앙은 예수처럼 살아가는 모든 이들도 하나님께서 부활시킬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삶에서 구원의 길을 찾았습니다.

부활공동체는 자본 권력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해줍니다. 원시공산주의 사회입니다. 원시공산주의는 부활공동체의 이상입니다. 공동체는 자기의 소유를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자기의 것을 다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공동 소유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 것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 중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신비요 나눔의 신비입니다. 이 길은 아직도 유용한 길입니다. 지금 우린 자본주의라는 거대 제국과 싸우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알고 있듯이 권력이 모두 자본의 눈치를 보고 있으며 때로는 자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자본을 극복하는 길이 공동체적 삶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운행되는 사회. 사랑의 신비로 구성된 마을입니다. 가급적이면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체의 식구들은 형제자매로 함께 살아갑니다. 경쟁보다는 협동을 소중히 여기고, 차이를 인정하고 각 자 주어진 재능을 존중하며, 하고자 하는 일을 하도록 권장하고 도와주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도 그 길 위에 서 있습니다.

▪ 새로운 길 찾기

강남향린교회는 동부지법의 요청으로 관련자들을 만나 공식 사과를 요청하였고 당장 철판 펜스를 치우고, 집기를 원상회복하고, 교회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즉각 조치를 해야, 실제적인 사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요구하였습니다. 조합 사무국장은 사태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지만 오리무종입니다. 청와대와 국회 등 다양한 창구를 통해 부당한 사태를 고발하고 대응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교단과 노회, 기독교 제 단체들과 연대하여 부당한 개발과 갑질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있습니다. 이는 강남향린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과 권력에 의해 무참히 자유를 빼앗기고 있는 민중들의 첨례한 문제입니다.

바라기는 도시 미관 공사로 포장하여 자본가들을 살찌우게 하는 도시재개발사업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쫓아나는 재개발사업이 사라지길 기도합시다. 철거민들의 눈물을 닦아내고 하나님의 성전이 그 위상을 되찾고 평화의 공동체로 세워지길 기도합시다.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지닌 인간을 악마화하고 노예화하는 거대 자본제국에 저항하는 공동체를 실현합시다. 사람이 밥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며 자본의 유혹을 단칼에 잘라버린 예수의 광야체험의 지혜를 배웁시다. 자기를 부인함으로 자기 속에 숨겨져 있던 신성한 빛을 되찾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감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동참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 평화 공동체인 교회를 건설합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신성한 곳입니다. 여긴 세상의 논리가 판을 치는 곳이 아니요,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사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용되고 사랑으로 섬기는 평화공동체입니다. 또한 교회는 이 땅의 불의한 권력, 부패한 자본과 맞서는 가장 강력한 저항공동체입니다.

이 땅의 교회들은 이 길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강남향린교회도 예수의 길 위를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예수가 죽음으로 만든 평화로 가는 그 새로운 길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리 눈을 들어 말씀의 신비를 믿고 자본권력에 저항하고 평화를 이루는 새로운 길을 걸어갑시다. 아멘.

양재성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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