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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라(신명기 8:2-4)악, 변화, 그리고 평화를
이성훈 | 승인 2018.05.13 21:33

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는 모세의 마지막 연설이면서, 요단 건너편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연설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다르게 생각해보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연설은 지긋지긋한 광야 40년의 지긋지긋한 생활이 끝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후에는 가나안 침공이라는 긴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40년간 헤매었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광야 생활을 끝낸다는 이 순간은 참으로 달콤했을 것입니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자신들이 꿈꾸던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아주 긴 연설을 시작합니다. 연설의 내용은 그들이 이미 다 아는 이야기들, 어쩌면 듣고 싫지도 않은 지긋지긋했던 광야 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들에게 광야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줍니다.

기억하라

저는 오늘 본문 말씀 중 핵심 단어를 ‘기억하라’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짜카르(רכז)’입니다. ‘짜카르’는 명사로 사용되면 ‘남성’이라는 뜻이기에 성경에서는 많은 곳에서 명사형으로 사용됩니다만, 신명기에서 ‘짜카르’는 대부분 ‘기억하다’라는 동사형으로, 특히나 ‘기억하라’라는 명령형으로 사용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광야 40년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신8:2). 광야에서 하나님께 행했던 잘못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신9:7; 24:9). 더 나아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신5:15; 15:15; 16:12; 24:18, 22).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신7:18; 8:18; 16:3).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광야 생활은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빨리 떨쳐 내버리고 싶은 기억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모세가 광야 40년이라고 말하는 것도 분명 좋은 의미보다는 안 좋은 의미에서의 광야 40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힘들었던 순간, 그 고통스러웠던 순간이라는 의미로 광야 40년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광야 40년은 그저 광야라는 생활환경으로 인해서 고생했던 기간일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끊임없이 하나님께 대항하였고 잘못을 행했기에 벌을 받았던, 벌을 받느라 고통스러웠던 기간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애굽에서 종으로 생활했던 기간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는 치욕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말합니다. 그 순간들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진화학자들은 망각이야말로 인간이 더 원활한 삶을 살기 위해 진화된 결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망각의 기술’이라는 책도 나와 있습니다. 망각이 단지 잊어버린다는 의미를 넘어서 사람의 삶에 도움을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가 망각하는 것들을 생각해보면 내가 잘못했던 일들, 내가 실수했던 일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어버리게 됩니다. 반면에 남이 나에게 잘못한 일들, 남에 의해서 기분이 나빴거나 고통 받았던 일들은 잊으려고 해도 자꾸만 머릿속에서, 기억의 저편에서 슬금슬금 올라옵니다. 그리고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망각하지 말고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남의 잘못으로 인해 고통 받은 순간을 기억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났기에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갔던 순간을 기억하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에 벌 받았던 순간을 기억하고, 그들의 오랜 죄로 인해 광야에서 40년간 떠돌 수밖에 없었음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메두사호의 뗏목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얼마 후, 많은 사람들은 과거에도 동일한 사건이 있었다면서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을 이야기했습니다.

ⓒGetty Image

프랑스가 아프리카 세네갈을 식민지로 삼은 후, 여기에 이주할 사람을 포함하여 400여명을 태운 프랑스의 군함 메두사호는 1816년 항해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이 배는 7월 2일 난파하게 되었고, 선장을 비롯하여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들 250명은 구명보트에 올라탔습니다. 하지만 구명보트가 부족하여 나머지 150명은 급조된 뗏목을 타고 표류하게 됩니다. 12일에 걸친 표류 끝에 이들은 작은 범선인 아르귀스호를 만나게 되었고 살아남게 되었습니다만, 그때 살아남은 사람은 15명뿐이었습니다. 당시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간되면서 메두사호의 사건이 드러나게 되었고, 젊은 제리코는 이 사건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아 작품을 만들게 됩니다.

여기까지의 내용은 많은 인터넷 글들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대부분 이 그림을 이야기할 때, 작가인 제리코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있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은 제리코가 충격을 받고나서 휘리릭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몇 년에 걸쳐서 고민하고 연구하며 그린 작품입니다.

제리코는 본래 승마와 말을 좋아하고 멋 부리기 좋아하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메두사호 사건을 접한 이후로 그로테스크한 작품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제리코가 그린 시체 그림들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왜 시체에 집착했을까요?

바로 메두사호의 뗏목을 더욱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뗏목 위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이를 더욱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서 시체안치소에서 불법적으로 시체를 사와서 집에 놔두고 시체의 부패를 살펴보며, 12일 동안 시체가 어떻게 부패되는지를 살폈습니다.

광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런 행동을 하면서까지 그가 이 작품에 빠져들었던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 순간의 처참함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150명을 뗏목에 버리고 떠난 이들의 잔인함을, 뿐만 아니라 뗏목에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뜯어먹으며 생명을 부지한 사람들의 참혹함을, 그리고 그런 순간에도 아무런 감흥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잔혹함을 여실히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당시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많은 작품을 남겼겠지만, 그는 낙마 사고로 3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납니다. 물론 시대를 고민하고 더욱 명확하게 시대를 그리고자했던 그의 정신은 그의 후배인 들라크루아가 잘 이어받아, 미술비평가들은 낭만주의라고 말하는 신고전주의 역사화의 전통을 이어가게 됩니다. 제가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을 참 좋아하는데, 볼 때마다 하는 생각은 ‘기억하자’, ‘작가가 바라던대로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자’입니다.

기억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다시 그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기억해야 하고, 모세 역시도 그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분명 입에서 입으로 말씀을 전하였고, 매주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즉 그들은 기억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끊임없이 기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사람은 분명 그런 존재입니다. 아무리 실수하지 않으려고 해도, 아무리 잘못하지 않으려고 해도, 또 실수하고 또 잘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의 잘못을, 과거의 실수를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 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기억할 때에야 잘못을 범할 가능성을 줄여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너무나 많아서 손에 꼽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앞서 언급한 세월호 사건은 당연히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사건입니다. 제주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학살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광주에서 일어났던 민주화운동과 그들을 향해 자행된 학살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정부에 의해 자행된 악한 일들 뿐만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그 사건의 방관자였고, 자본주의라는 체계 속에서 나의 이익을 위해서 때로는 침묵했던 사람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때로는 나 같은 사람 한 사람이 떠들어봤자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쉽게 포기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인해 이 사회에서 끊임없이 고통과 슬픔의 사건들이 벌어졌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해야 할 또 한 가지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잘못만이 아닙니다. 앞서 모세가 기억하라고 말한 목록에도 나와 있지만, 기억하라고 말한 것은 이스라엘의 잘못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 해방의 기쁨을 기억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도우셨음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모세는 말합니다.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아무도 깨닫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발을, 그들의 육체를 보호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을 돕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그들에게 도우시는 하나님,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일어났을 때, 이 나라가 변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군부에 의해 광주에서 학살이 벌어지던 그 순간에 명령에 불복하면서 오히려 시위대를 도왔던 경찰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수치를 무릅쓰고 일본의 악행을 고발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용기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역사 속에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기억할 때에, 남과 북이 휴전선 위에서 뜨겁게 손을 마주잡았던 것처럼 또 다른 평화의 소식들이 이 땅위에 울려 퍼지게 되리라 믿습니다. 이 일은 분명 우리가 기억할 때에 가능합니다.

기억을 막는 것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3절의 이야기는 기억하지 않고 잘못을 범하게 되는 근원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실 때에 인용하셨던 말씀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이 말씀 속에는 이스라엘이 행했던 죄의 근원, 또한 우리가 삶 속에서 망각하며 또다시 잘못을 저지르는 근원이 있습니다. 사람이 떡에 집중하며 살아갈 때에, 기억하려 하지 않고, 행동하려하지 않고, 다시금 과거의 잘못에 머물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광야 생활이 어렵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를 곪았던 적은 없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항상 무엇인가를 먹고 살아왔습니다. 물이 필요할 때는 하나님께서 물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품었던 불만은 더 좋은 음식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더 맛있는 음식, 더 배부를 수 있는 음식, 물도 목마를 때만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마시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물을 먹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떡에만 집중하며 살아가게 되면, 지금 가지고 있는 떡에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더 좋은 것을 먹고 싶어 하고, 더 값진 것을 갖고 싶어 하게 됩니다. 더 즐거운 경험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떡만을 바라보며 사는 삶은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며 반성하고 변해가는 삶이 아닙니다. 그저 현실 속에서 어떻게 떡을 더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고통은 무시하고 나의 일만을 생각하게 되고, 남의 손해보다는 나의 이득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요즘 부동산이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에 부동산 문제가 왜 발생했습니까? 물론 정부에서 부동산에 거품을 넣으면서 국민소득을 부풀리고 세금을 올린 이유도 있습니다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을 집으로 생각하지 않고 가장 빠르고 쉽게 돈을 버는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님비현상, 자신의 집 앞에 혐오시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현상인데, 본래 혐오시설을 막는 이유는 말 그대로 혐오스럽기 때문에, 삶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 뉴스에 나오는 님비현상을 보면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집값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사회 전체적인 현상을 바라보지 않고, 먼 미래를 바라보지 않고, 지금 자신의 집값 오르기만을 바라보고 살기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청년들은 30년간 돈을 모아도 강남에 있는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잘못들을 기억하지 않고 떡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떡이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려 하셨습니다. 그것에만 치우쳐서 사는 삶이 되지 말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보내셨고, 가장 처참한 순간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알지 못하는 음식, 살아가는데 지장을 주지 않을 수 있는 음식, 그런 만나만을 그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 광야에서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였고, 더 고귀한 삶을 누리지도 못했습니다. 광야의 삶은 그들에게서 쾌락을 빼앗았습니다. 강제적인 금욕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옷이 해어진 적이 없었고 발이 부르튼 적도 없었습니다. 즐거운 삶이라는 것은 그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고 삶의 쾌락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들은 아무 문제없이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르치려 하셨고, 모세는 그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바벨론에 잡혀간 다니엘의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바벨론이 속국의 영재들을 모아서 교육시킬 때에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곳에 끌려가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바벨론의 관원들은 그 소년들에게 좋은 음식과 좋은 음료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좋은 음식과 음료를 거절합니다. 그런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채식만을 하였고 하나님 말씀 안에 굳게 서 있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열흘 뒤에 바벨론 관원들이 본 모습은 놀랄 정도였습니다. 채식만 했던 다니엘과 세 친구가 좋은 음식과 음료를 마셨던 다른 소년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살이 윤택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취한 것은 최소한의 음식이었습니다. 채소를 먹었기에 피부가 좋아졌다는 그런 과학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가 최소한의 음식을 취한 이유는 바벨론의 뛰어난 음식에 도취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음식, 그런 삶에 빠져 하나님을 잊지는 않을까 염려했기에 취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분명 옳았습니다.

나가는 말

현실의 떡은 맛있습니다. 계속 맛있는 떡을 먹고 싶고 그것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싶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런 삶은 결국 과거의 잘못들, 악행들을 망각하게 만듭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에 침묵하며 방관해야만 현실에서 떡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이끕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처참했던, 처절했던 과거의 잘못들과 이 땅에서 벌어졌던 악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모두 소리를 모았을 때, 이 땅이 변화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평화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더 맛있는 떡은 아닐지 몰라도, 더욱 큰 쾌락을 주는 어떤 것은 아닐지 몰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옷을 상하지 않게 하시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주시고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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