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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면허와 승용차 없이 살아온 내력세월따라 역사따라 16
박준성 | 승인 2018.05.15 22:59

춤추다가 삐끗하면서 부었던 무릎이 시간이 가도 저절로 낫질 않았다. 그전에도 축구하다 여러번 다쳤던 다리다. 짬나는 대로 몇 번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았다. 붓기도 가라앉고 걷기도 편해졌다.

무릎상태가 어떤지 걱정이 돼서 정형외과에 갔다. 엑스레이를 찍고 초음파 검사를 했다. 아직 속에 물이 차 있고 왼쪽 무릎 연골도 좀 달았다고 한다. 10년 전에 비해 요추 4, 5번도 더 좁아져 다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한다.

이제까지는 어디든지 걸을 수 있는 두 다리 믿고 승용차 없이 잘 살아왔다. 내 몸이 늘 팔팔한 청춘일 수는 없다. 언젠가 잘 못 걸을 때를 대비해서 자동차 운전면허라도 따 두어야 할까.

1988년 3월 혼인하고 서울 개봉동에 집을 얻었다. 상가 목욕탕 건물 2층 방이었다. 복도 끝 쪽에 있는 공동 화장실은 아침이면 쓰기도 어려웠고, 방도 서향이라 여름에는 집 나갈 때부터 땀이 비질비질 흘렀다. 혼인하기 전 10여년 가까이 자취를 하는 동안 출퇴근 시간에 버스를 탈 일이 거의 없었다. 연애할 때는 ‘121’이라는 숫자만 보아도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리던 개봉동에서 신림동 가는 121번 버스가 지옥 같은 만원 버스가 되었다.

ⓒ박준성

개봉동에 산 지 몇 달이 지난 뒤에야 학교로 가는 통근버스가 있는 줄 알았다. 광명시에서부터 교직원을 태우고 오는 버스였다. 앞자리가 비어 있는데도 젊은 직원 몇 명이 버스 뒤쪽에 서서온다.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빈자리를 골라 앉았다. 이삼일 지나자 누군가 빈자리에 앉지 말라며 눈치를 주었다. 그러건 말건 며칠을 별 생각 없이 앉아 다녔다.

하루는 규장각에 근무하는 나이 많은 직원이 통근버스에 앉아 다니느냐고 묻는다. 빈자리는 교수나 학교 본부의 간부들이 타기 때문에 비워둔 것이라고 한다. 앉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앉았다가 양보를 하면 될 것 아니냐고 따졌다. 그러면 앉을 분들이 미안하고 불편해 한다고 한다.

세상에! 통근버스 안에도 빈자리를 놔두고 멀리서부터 서서 오는 말단 직원들이 있는가 하면 학교까지 거리가 얼마 안 남았는데도 자기 자리인양 궁둥이를 들이 미는 고위급들이 있었던 것이다. 누구도 따지려 들지 않고 오히려 굽실거리는 분위기였다.

나도 언제 그만두어야 할지 모르는 ‘조교’ 주제라 ‘더러워서... 안타고 말지’하며 속으로 침이나 뱉었다. 그 때문은 아니었어도 실제 그 다음해 규장각 조교도 더 이상 못하게 되었다.

빈 자리를 두고 서서가느니 힘들어도 만원버스를 타는 편이 마음 편할 것 같았다. 통근 버스를 타지 않고 만원버스를 타고 다니는 고난의 행진으로 돌아갔다. ‘러시아워’ 때 버스를 타면 가방을 가슴팍에 놓고 손을 내려놓아도 떨어질 염려가 없을 정도였다. 버스 안에서는 밀리고, 밟히고, 언성 높이는 싸움이 끊이질 않는다. 지하철도 마찬가지였다. 손님이 하도 많아 4호선 지하철 전동차 유리창이 터져나간 적도 있었다.

1980년대 말까지 내가 아는 선후배 동료들 가운데 승용차를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때까지도 세상을 바꾸겠다면서 자가용을 소유하는 것은 쪽팔리는 짓이었다. 1970년대에 자가용은 ‘사장님’들 전유물이었다. 1975년부터 국내에 판매되기 시작한 현대의 ‘포니’는 국산 자가용의 상징이었다. 김민기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에 들어 있는 ‘야근’에서는 사장님네 강아지만도 못한 노동자들의 처지를 “사장님네 강아지는 감기 걸려서 포니타고 병원까지 가신다는데 우리들은 타이밍약 사다먹고요 시다신세 면할 날만 기다리누나” 하고 노래했다.

1980년대 들어서도 자가용은 부자들의 돈자랑의 표식으로 보였다. 누구를 만났다하면 잘 아는 사이던, 심지어는 연애하라고 처음소개를 받았던 소주와 막걸리를 기울이며 ‘광주’와 ‘전두환’과 ‘자본주의 구조적 모순’, ‘미제국주의’ 가운데 어느 한 마디로 말을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승용차는 그들의 상징적인 전유물이었다. 산에 갔다 술 한 잔 걸치고 내려오면서 골목길에 세워놓은 비까번쩍한 남의 차에 틈새로도 들어가지 않는 오줌을 싸대기 일쑤였다.

평소에도 자가용이 마뜩치 않았는데 하루는 숨 막힐 듯한 만원버스에서 흔들리며 창밖을 내다보니 옆을 지나쳐가는 승용차 안에 대부분 한두 명이 타고 있었다. 버스가 좀 한적할 때 기사에게 러시아워 때 몇 명까지 타느냐고 물어보았다. 150명은 탄다고 한다. 다른 기사에게 또 물었다. 자기까지 포함해야 하니까 151명이라고 농담 삼아 대답을 한다.

승용차 두 대에 평균 4명이 탄다고 치고, 만원버스에 타는 승객 숫자를 확 줄여 120명이 탄다고 해도 1:30이었다. 승용차 두 대가 버스 한 대 보다 더 많은 도로를 점유하고 여유 있게 달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자기 혼자 편하겠다고 30명을 불편으로 몰아넣는 것 같았다. ‘내 평생 승용차를 갖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돌아보니 승용차를 '갖지' 않겠다고 했으니 망정이지 '타지' 않겠다고 하였다면 못 지킬 약속이 될 번했다.

ⓒ박준성

아내도 승용차 없이 살자는데 뜻을 같이했다. 결혼하고 나서 둘 다 10여 년 동안 승용차 없이 지냈다. 첫째 아이는 유치원 들어가기 전까지 논산 양촌 외가집에서 컸다. 아내는 대중교통 수단을 몇 번이나 바꿔가며 한 달에 두 번꼴로 아이를 보러 논산에 갔다. 고생고생하면서 아이를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아내는 눈물을 달고 다녔다.

1992년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이 1천만명을 넘어섰고, 주변에서도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993년 나온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불티나듯 팔려나간 것도 자동차 보급과 관련이 있다. 역사기행을 하다보면 자가용 타고, 답사기 들고,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들어왔다.

강의를 가도 사장님만 타던 자가용을 몰고 강의를 들으러 오는 노동자들이 늘어났다. 차가 늘어나면서 술자리가 건전해지고(?) 뒤풀이가 줄어들었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쓴 E. P. 톰슨은 노동자들이 술자리에서 벌이는 토론과 소통이 노동자 문화에서 중요하다고 했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던 노동자 문화가 점차 사라져갔다.

자동차 소유가 늘어나면서 상권이 바뀌고 생활양식도 달라졌다. 가족주의는 더 공고해졌다. 노동조합운동에서도 자동차를 사고, 자동차를 유지하려고 임금인상 투쟁을 하는 양상까지 생겨났다. 승용차를 타면서 노동운동이 가능할까 하는 논쟁도 있었다. 노동자들도 다 자가용을 가지고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노동해방 세상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세상이 그렇게 변해갔다. 1994년 둘째 아이를 낳았다. 누나와 7살 터울이다. 두 살부터 네 살까지 3년 동안 강원도 홍천 서석에 있는 할머니가 키워주셨다. 경기도 부평 살 때 서석까지 가려면 차를 다섯 번 갈아타야 했다. 아내는 초등학교 갓 들어간 첫째를 끌다시피 하며 시골에서 바리바리 싸 주시는 짐을 어깨가 빠질 듯 짊어지고 오르내렸다.

둘째 아이를 보고 오는 일은 오로지 아내 몫이었다. 나는 토요일 일요일마다 역사기행이다, 강의다 하면서 빠졌다. 그때는 또 ‘역사와 산’ 초창기이기도 하였다. 달마다 둘째 주가 되면 금요일 저녁부터 밤을 꼬박 새워 자료집을 만들었다. 토요일 아침 인쇄소에 맡겼다가 저녁에 찾아가지고 시청 앞으로 달려가곤 했다.

산행을 마치고 올라와서는 뒤풀이가 2차 3차로 이어졌다. 돌이켜 보면 아내가 내 항암할 때 병 수발하다가 심장이 나빠져 같이 약을 먹어야 했던 일보다도 더 부끄럽고 미안한 과거였다. 평생 두고 갚아야할 빚이라고 생각한다.

ⓒ박준성

둘째를 데리고 올라와 공동육아를 하면서 아내가 더 이상 차 없이 버티지 못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먼 곳으로 출퇴근 하면서 아침 일찍 아이를 맡겼다 데려와야했다. 매일 일반 교통편을 이용하기가 쉽지 않은 거리였다. 아내는 한 달 만에 운전면허를 따고 1999년 소형차를 샀다.

아내가 차를 샀을 때, 내 사적인 일로 차를 태워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20여 년을 거의 잘 지키며 살아왔다. 그런데 함께 시골을 갈 때면 아내 차를 타지 않을 수 없었다. 강의 다닐 때도 대중교통이 닿지 않는 곳에 교육 장소가 있을 경우는 누군가 중간에 마중 나와 태우고 가야 했다. 그래서 암 진단 받기 전까지는 걷는 거리가 4km 정도 쯤은 줄창 걸어 다녔다.

내 평생 승용차를 갖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지만 흔들릴 때도 많았다. 무거운 환등기를 짊어지고 만원 버스에 겨우 낑겨 타고 강의 다닐 때, 역사기행 사전 답사하러 갈 때, 목공예.목공 배우고 나서 나무나 작품 운반할 때... 그럴 때는 자동차 면허증이라도 따둘까 하고 망설이기도 하였다.

요즘 무릎을 다치고 나서도 앞뒤로 테이핑을 하고 백두대간 일부 구간을 걸었다. 아직은 골고루 테이핑하고 양손에 지팡이 집고 조심스레 걸으면 하루 20km 쯤은 걸을 만하겠다. 내 살아 있는 동안 백두대간 북쪽 구간을 마저 걷고 싶은 꿈이 망상만은 아닐 듯도 하다. 어차피 백두대간 위로 차가 다니지는 못한다. 가게 돼도 걸어야 갈 수 있다. 걸을 수 있을 때 걸으려면 내 무릎을 잘 보듬어 살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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